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375화 (375/649)

〈 375화 〉 5. 빵과 비수(73)

* * *

엘프 위병이 하품을 내쉬고 있었다.

저 멀리에 있어도 그 기척이 느껴졌다. 예민해진 감각은 모든 풍경을 예외 없이 해부했다. 자그마한 점처럼 보여야 하는 장면조차 내 이목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수준은 나름 높아 보였다.

최소한 포프 영감보다는 강한 사내였다. 일전에 상대했던 설표 마인과 비할 바는 아니었으나, 굳이 위험을 감수할 이유는 없는 상대였다.

‘본부’는 엘프의 전력이 집중된 장소였다. 말하자면 제국의 황궁과 비슷한 곳이었으니, 위병조차 고르고 고른 실력자일 수밖에 없었다.

심혈을 기울여 상대하기는 시간이 없고, 또 무시하기는 힘든 적이었다.

이때 내가 고르는 선택지는 대개 비슷했다.

기척을 죽이고, 눈치 채지 못한 사이 멱을 딴다.

안전하고 확실한 방식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일부러 이를 택하지 않았다.

목적이 달랐던 탓이었다.

나는 엘프 위병을 깔끔히 처리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도리어 소란을 일으켜서, 레오릭의 손아귀에서 아비앙이 빠져나갈 틈을 버는 것이 내 목표였다.

따라서 땅을 박차는 내 몸이 멈칫하는 일은 없었다.

내달리고 내달려, 어느덧 엘프 위병도 내가 보이는 거리.

위병은 다소 비현실적이라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엘프의 ‘본부’는 침엽수림의 심부에 위치한다. 더불어 그 소재지 또한 기밀이라, 인류는 공식적으로 ‘본부’는커녕 엘프 마을조차 발견한 적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설원을 밟으며 내달리는 인간이 등장한 것이다.

이를 납득하고 받아들일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일부러 위병이 내 의도를 잘 이해하도록 미리 검을 뽑아들었다.

그 은빛 예기를 마주하고 나서야, 엘프 위병은 제정신을 차렸다.

마치 발악처럼 엘프 위병의 목청이 드높아졌다.

“적습이다! 침입자는 하나… 켁!”

그것이 최후의 단말마였다.

팍, 하고 내던져진 손도끼가 엘프 위병의 골통을 터트렸다. 핏물과 골편이 비산하는 광경은 언제 보아도 불쾌했다.

후두둑 핏물이 떨어지며 새하얀 눈이 물들었다.

나는 급격히 숨을 죽이고 몸을 숙였다. 그리고 최대한 주변의 엄폐물을 찾아 이동했다.

혼란을 일으키는 것은 좋지만, 단독으로 엘프 본부를 습격하는 것은 무리였다.

당장 마인이 둘 이상 나오면 내 목숨을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일부러 기척을 지우고 잠행을 하는 편이 내 목적에 더 어울리기도 했다.

보이는 적보다, 보이지 않는 적이 더 무서운 법이었으니까.

내 가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증명됐다.

곳곳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침입자가 보이지 않는다! 샅샅이 뒤져!”

“비전투 인원들을 가옥에 숨겨!”

“레오릭 님, 레오릭 님께 보고를 올려라!”

우르르 몰려오는 병사들 중에는 익숙한 모습을 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특히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 ‘칼잡이’들.

군영을 야습하던 당시 보았던 엘프들의 정예 전력이었다. 당시에는 그 보법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포프 영감의 가르침을 받은 지금은 달랐다.

엘프만의 독특한 호흡법이었다.

포프 영감은 내 손을 묶고 침엽수림을 걸어 보라 했었다. 모든 감각을 발에 집중하고, 주위의 자연물을 느끼라는 의도였다.

아직 그 묘리를 모조리 터득하지는 못했다.

다만 그 호흡이 이어져, 저 귀신 같은 걸음걸이가 가능하다는 사실은 이해하고 있었다. 나는 ‘칼잡이’들의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과정에 주목했다.

내 숨소리가 점점 더 잦아든다.

희미하던 기척이 더욱 옅어지고 있었다. 몇 분이 지나도 나를 발견하지 못하자, 엘프들은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내부의 구조는 알지도 못한 채로 들어선 나였다.

무작정 시작한 잠입치고는 우수한 결과였다. 과연 엘프들의 호흡법이 효과가 있는지, 임시로 숨어든 내 기척을 눈치 채는 인물이 없었다.

나를 수색하는 엘프들은 최소 두 명 이상이 조를 짜고 있었다.

혹여 기습을 당하더라도 침입자의 위치를 알리기 위해서였다. 두 명의 입을 동시에 막을 수단은 많지 않았으니까.

물론 훌륭한 전략이었으나, 그것도 잠시.

혼란이 점점 더 심해지자 그 원칙을 무시하는 경우가 생겨났다. 본부 구석구석을 뒤적이기엔 엘프들의 인력이 부족했던 탓이었다.

내가 노리고 있던 바였다.

나는 오두막 뒤편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점차 내게로 다가오는 기척이 선연했다.

모퉁이를 돌면 내가 바로 보이리라.

그래서 나는 살금살금 그 모퉁이 방향으로 이동했다. 그 이후에 벌어질 일은 뻔했다.

엘프 병사가 나를 보기 직전, 내 검이 은빛의 지평선을 그었다.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엘프 병사는 죽는 순간까지도 내 존재를 깨닫지 못했다. 도리어 제가 죽는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팍, 하고 머리가 눈에 젖은 땅 위를 뒹굴었다. 뒤늦게 핏물이 뿜어져 나오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짚단처럼 풀썩 쓰러지는 몸뚱어리.

엘프들은 귀가 긴 만큼 청력이 예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위치를 들킬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다시금 숨을 죽이고 이동했다. 내 예상대로 몇몇 엘프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지금이 기회였다.

소란은 더욱 커지고, 모두의 이목이 다른 곳을 향하고 있을 때.

나는 까마귀의 눈으로 보았던 지리를 떠올렸다. 레오릭의 오두막은 조금 외진 곳에 위치하고 있던 기억이 났다.

그곳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야 했다.

그리고 아비앙과 합류한 뒤, 신속히 탈출한다.

그것이 내 계획이었다.

사실 막무가내로 난입한 터라 그보다 정교한 전략은 짜지 못했다. 그나마 이 편이 나와 아비앙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홀로 엘프 본부의 전력을 상대할 수는 없다.

그러기는커녕 레오릭 하나조차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인 상황이었다. 단 둘이서 이곳을 이탈하는 쪽이 최선이었다.

오두막과 오두막 사이, 혹은 나무와 나무 사이를 오고갈 무렵이었다.

칼잡이 둘이 어슬렁거리며 내 근처로 다가오고 있었다.

마침 레오릭의 오두막이 얼마 남지 않았던 참이었다.

나는 잔뜩 쌓인 장작 뒤편에 몸을 숨겼다. 긴장한 낯빛의 칼잡이 둘은 혀를 차면서 걸음을 옮겼다.

의문이 해소되지 않는 듯했다.

“도대체 어떻게 이곳을 알아낸 거지? 혹시 형제자매 중에 배신자가……?”

“오늘은 레오릭 님의 ‘예배’가 있는 날인데 큰일이군.”

운이 좋지 않았다.

‘칼잡이’들은 일종의 기사 계급으로 보였다. 병사처럼 단숨에 죽일 수 있는 수준의 상대가 아니었다.

하물며 둘이라.

질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한시가 급한 나로서는 그다지 마주치고 싶지 않은 적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칼잡이들을 방향을 틀 기미가 없어 보였고, 그렇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존재를 눈치 챌 터였다.

어쩔 수 없이 선공을 해야 할 판이었다.

내 손이 손도끼의 자루를 만지작거렸다.

손도끼를 던져 하나를 끝장낸 후, 당황한 칼잡이를 덮쳐 둘을 단숨에 죽인다. 그 이후 오두막까지 내달릴 심산이었다.

포위를 당해서 죽을 미래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아비앙을 홀로 보낸 과거의 선택을 후회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나는 의지를 다지며, 칼잡이들의 걸음걸이에 주목한다.

세 걸음, 두 걸음, 그리고 마지막 한 걸음.

내게 정해둔 한계선에 두 칼잡이가 도달하기 직전.

쿵, 하고 어디선가 묵직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나는 물론이고, 두 칼잡이의 시선도 자연스레 그 진원지를 향했다.

쿵, 하고 다시금 땅이 울린다.

지축이 뒤흔들리는 충격이었다. 파장이 일 때마다 땅 위에 쌓인 눈이 분연히 일어나 흩날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진원지가 명확해지고 있었다.

레오릭의 오두막이었다.

모두가 이 원인을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발생한 거지?

그 의문은 오래 가지 않아 풀렸다.

쾅, 하고 폭음과 함께 오두막이 터져 나갔다.

단숨에 산산조각 난 나무의 파편들이 이곳저곳에 틀어박혔다. 주위에 넋을 넣고 있던 엘프 몇몇은 비명을 내지르며 엎어질 정도였다.

비산하는 것은 목편뿐만이 아니었다.

레오릭의 오두막에 잠들어 있던 온갖 도구와 가구들이 하늘을 날았다. 그리고 레오릭의 오두막에 숨어들었던 아비앙까지.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변신 마법이 풀린 채였다.

마침 아비앙은 내 쪽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더는 망설일 틈이 없었다.

내 손도끼가 파공성을 그리며 쏘아졌다.

넋을 놓고 있던 칼잡이들이 이에 대응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팍, 하고 핏물이 터져 나오자 칼잡이 하나의 눈이 나를 향했다. 반응속도는 그나마 빨랐으나, 얼떨떨한 눈빛에서는 현실감이 실종되어 있었다.

내게는 좋은 일이었다.

나는 내달리던 힘을 그대로 실어 칼잡이의 가슴을 발로 차버렸다.

“컥!”

그리고 공중에 붕 뜬 칼잡이의 몸을 양단하는 손도끼.

정중동의 묘리였다.

나는 칼잡이를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다시 땅을 박찼다. 그 직후 몸을 던지자, 아슬아슬하게 내 품속에 떨어지는 회색 머리카락의 소녀.

아비앙이었다.

충격을 받아낸 팔이 얼얼했다. 아비앙도 무사하지는 않을 터였다.

그러나 소녀의 입에서는 비명조차 흘러나오지 않았다. 단지 눈을 감은 채로, 끙끙거리는 신음만을 흘리고 있을 뿐.

어찌됐든 행운이었다.

나는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모두가 넋이 나간 와중에, 아비앙까지 내 품에 떨어졌다.

천신께서 도우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는 아비앙의 귓가에 대고 향후의 계획을 읊어주기로 했다.

“아비앙, 괜찮아?! 지금 당장 탈출한다!”

“베, 베티…….”

그러나 아비앙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나는 멈칫하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여동생은 어디에 있지?

아무리 훑어보아도 오두막에서 튕겨 나온 인형은 하나뿐이었다. 그 주인공이 내 품에 안겨 있으니, 베티는 오두막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것이 가능한가.

내 의문을 일깨우는 것은, 또 다시 흘러나오는 비명 소리였다.

내 눈이 터져 나간 레오릭의 오두막을 향했다.

그곳에서는 녹아내린 살점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그래, 살점의 파도.

끓어오르는 살점은 용암처럼 걸쭉하면서도 흉측했다. 제 부피를 끝없이 넓혀가는 그 살의 바다 위로, 구세주라도 되는 양 사내가 하나가 뚜벅뚜벅 걷고 있었다.

아니, 그것을 걷는다고 할 수 있을까.

사내의 다리는 이미 살점에 융화된 뒤였다. 철퍽, 하고 발을 들 때마다 진득한 살점과 핏줄이 늘어졌다.

레오릭.

그의 품에는, 아비앙이 그토록 찾던 소녀가 안겨 있었다.

나는 주춤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베티는 안타깝지만, 지금 와서 그녀를 구하는 것은 무리였다. 내게 남은 선택지는 오직 도주뿐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일순 망설임을 떨치지 못했다.

“베티, 안 돼…….”

그렇게 나지막이 속삭이는 아비앙의 목소리가, 어린 시절 리아를 지켜주겠다 맹세하던 나와 겹쳐 보여서.

여동생을 지키기 위해 죽었던 작은 기사를 떠오르게 해서.

고작해야 몇 초에 불과한 갈등이었으나, 그 대가는 썼다.

“오, 임마누엘… 이처럼 절묘한 운명이 있을까요?”

탄식처럼 흘러나온 목소리가 나를 겨누었다.

조곤조곤한 어조였다. 분명 목청을 높이지 않은 것이 분명한데도, 사내의 음성은 기묘한 울림을 퍼트리며 내 귀에 내리꽂히고 있었다.

내 눈이 말없이 돌아갔다.

그리고 마주쳤다.

징그러울 만큼 신념에 가득 찬 광인의 눈동자와.

“이안 페르쿠스 형제님, 처음 뵙겠습니다.”

그는 노골적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도망치기는 그른 듯했다.

*

어느 날 밤, 세리아의 방에 불청객이 찾아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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