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6화 〉 5. 빵과 비수(74)
* * *
그날 이후, 세리아의 밤은 지독히도 길어졌다.
태양이 지평선을 덥힐 때조차 세리아의 세상은 어둠으로 가득했다. 낮과 밤을 구분하는 것조차 무의미했다.
세상은 지옥이었다.
종종 제정신이 돌아올 때면, 세리아는 제 손이 덜덜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곤 했다.
알렉스가 죽었다.
누구의 손에?
사랑하던 선배는 기억을 잃었고, 이제 그 칼끝을 인류에게 향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세리아 또한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상실감이었다.
제 심장을 누군가 쥐어뜯는다면 이러한 고통을 느끼리라.
아니, 차라리 누가 그래 준다면.
이 아프고 외로운 열상을 치료할 수 있을까?
생에 처음으로 연모했던 사내의 빈 자리는 너무나도 컸다. 고립된 소녀를 섬에서 꺼내 주고, 나란히 걸어주기까지 했던 상냥한 사람.
이제는 없다.
으득, 하고 세리아는 재차 손톱을 깨물었다.
이미 닳고 닳은 엄지손톱이었다. 더 깨문다고 해서 손톱이 그토록 빨리 자랄 리는 없었다. 지금도 핏물과 진물이 줄줄 흐르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왜, 소름 끼치는 소음은 계속해서 이어지는가.
손톱이 자라고 있다는 뜻이었다.
통상적인 인간과 비교도 되지 않는 재생 속도였다. 커튼으로 해를 가리고 어두컴컴한 방에 칩거한 지 며칠째, 세리아의 몸에는 이상이 감지되고 있었다.
허나 세리아는 제 몸에 일어난 변화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럴 만한 여유는 진작에 사라진 지 오래였다.
방 안에는 메마른 마찰음만이 계속해서 이어질 뿐이었다.
아득, 까득, 으드득.
기나긴 침묵 끝에, 세리아는 발작처럼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방 안을 이리저리 배회하며 고민에 잠겼다. 어느덧 소녀의 푸른 눈동자가 요사스러운 빛을 품고 있었으나, 밤에 갇힌 세상은 거울을 볼 기회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내 선배를 돌려받을 수 있을까.
느닷없이 증오와 분노가 목젖을 치고 올라왔다. 불길처럼 뜨거운 감정이 가슴과 식도를 태우며 꿈틀거렸다. 세리아는 무심코 기침을 터트리고 말았다.
죽여야 해.
어떠한 논리적 검토도 없이 내려진 결론이었다.
또한 합리적이지도 못한 결심이었다.
도대체 누구의 죄를 정죄하겠다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세리아는 막 내려진 선고가 실로 마음에 들었다. 며칠만에 처음으로 입술이 옅은 호선을 그릴 정도였다.
그래, 죽이면 된다.
지금껏 그래왔던 삶이 아니었던가.
상대가 엘프든 인간이든 상관없었다. 선배에게 잘못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만일 잘못이 있더라도 세상의 몫이었다.
인류를 위해 희생하고, 마지막까지 제 몸을 던졌던 영웅이었다.
그랬던 사내의 기억을 앗아간 뒤, 동족에게 칼끝을 겨누게 하는 것이 운명이라니.
그러니까 죽여야 한다.
대상조차 명확하지 않은 살의였다. 다만 그것이 헛된 충동은 아니라서, 세리아의 눈동자에 질척한 의지가 어리기 시작했다.
웅덩이의 진흙처럼 어둡고 은밀한 욕망이었다.
저벅저벅 걸어 세리아는 제 검 앞에 섰다. 머리맡에 내려두었던 소녀의 애병은 아직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세리아의 손이 거침없이 검을 쥐었다. 그리고 그 새하얀 검신을 세상에 드러내려던 찰나.
소녀의 귀가 쫑긋거렸다.
홀로 고민에 잠겨 있어 눈치 채지 못했는데, 어디선가 묘한 기척이 느껴졌다.
세리아의 눈동자가 멍하니 그 진원지를 수색하려던 그때.
쾅, 하고 창문이 거칠게 열렸다.
“으, 꺄아아아악!”
비명과 함께 낯익은 인형이 바닥 위를 굴렀다. 세리아는 깜짝 놀라 주춤하며 물러서는 수밖에 없었다.
맹렬한 북풍이 열린 창문을 타고 들어왔다.
흔들리는 불 그림자가 암청색의 머리카락을 비추었다. 마치 밤하늘을 닮은 색감, 그리고 제 머리를 문지르며 살짝 눈물을 머금은 모양새까지.
세리아는 곧장 그 정체를 추론해냈다.
“……황녀 전하?”
“세, 세리아 선배님.”
황녀는 다소 겁먹은 표정으로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그 까닭을 짐작할 수 없어 세리아가 넋을 놓고 있지, 시엔은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 입에서는 황급한 변명이 함께 터져 나오고 있었다.
“제, 제가 훔쳐보려고 했던 것은 아니고요! 창문을 몇 번 두드렸는데 반응이 없으셔서… 그, 그렇다고 칼까지 드실 필요는……!”
아, 하고 그제야 세리아는 옅은 탄성을 내질렀다.
어느새 손이 검의 손잡이를 쥐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검무를 추겠다는 양 단단히 힘이 들어간 채였다.
화들짝 놀란 그녀는 검을 얼른 등 뒤로 숨겼다.
그리고 어색한 미소와 함께, 헛기침을 몇 번.
내가 무슨 짓을 하려고 했던 거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단지 황녀가 오지 않았다면, 무언가 사단이 났으리라 추측해 볼 뿐.
세리아는 무안한 마음에 살짝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아, 아니에요! 제가 어찌 용의 핏줄에게 불경한 마음을… 오해입니다. 검은 너무 오랜 시간 방치해서 손질이나 좀 해보려고… 그, 그보다!”
더듬거리며 이어지던 언어가 한 가지 의문으로 응축되었다.
이내 평정을 되찾은 세리아는 지당한 물음을 던져야 했다.
“왜 창문으로 들어오신 거죠? 유르디나 성을 통해도 될 것을…….”
“위험한 비밀을 들어버렸거든요.”
‘비밀’, 그 짤막한 낱말에 세리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여전히 의문은 풀리지 않은 채였다.
세리아의 방을 찾아온 방법은 짐작이 갔다. 아마도 비행 마법의 일종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창문이 열리자마자 바람을 타고 들어온 것만 봐도 그랬고.
하지만 어째서 그럴 필요가 있단 말인가.
이곳은 제국의 5대 귀족 가문 중 하나인 유르디나의 성이었다. 황가의 피를 이은 황녀를 위협할 만한 존재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럼에도 황녀는 무척이나 긴장한 낯빛으로, 마른침을 꼴깍꼴깍 삼키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에게 쫓기기라도 한다는 듯.
시엔은 뻣뻣이 굳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세리아 선배…….”
그렇게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세리아의 머리가 살짝 기울였을 무렵.
“혹시, ‘패륜’에 관심 있어요?”
세리아는 잠시 침묵에 잠겼다.
그리고 생각했다.
칼, 이대로 뽑아버릴까.
**
치이익, 하고 약품이 짓밟힌 눈 위로 쏟아져 내렸다.
그러자 붉은 발자국이 슬금슬금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방향을 몇 분에 한 번씩 확인하며, 여인들은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델핀과 엘시, 그리고 엠마였다.
길잡이 겸 수행역으로 데려온 병력들은 엘프들의 은신처에 놔둔 뒤였다. ‘본부’로 향했다는 이안을 마주치기 위해서는 그 편이 낫겠다는 생각에 내린 결단이었다.
어차피 길잡이를 할 만한 이는 하나가 더 있었다.
다름 아니라, 여인들에게 붙잡혀 처음으로 심문 당했던 엘프.
바로 이샤였다.
그녀는 아직도 공포가 가시지 않았는지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여인들도 딱히 이샤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다.
인류와 엘프는 수백 년 동안 반목해 왔다.
진실을 듣더라도 이를 전적으로 신뢰하기는 힘들었다. 하물며 들으면 들을수록 믿고 싶지 않은 이야기투성이였다.
알렉스가 가문의 배신자라니.
상상도 못했던 소리였다. 델핀은 그 이후 말을 잃어버렸다.
오직 엘시만이 이샤를 툭툭 치며 종종 위협을 가할 뿐이었다.
“야, 엘프… 너 제대로 길 찾고 있는 거 맞지? 보다시피 우리 동생이 조금 유능해. 만일 잘못된 길로 안내한다면……!”
“그, 그런 짓 안한다니까요!”
울상을 지으며 내지른 소리에 엘시는 흠, 하고 미묘한 소리를 냈다.
여전히 의혹이 가시지 않는 눈빛이었다.
이샤는 이제 애원하다시피 엘시를 설득하고 있었다.
“인간은 우리의 친구라고요! 친구의 친구를 속이는 엘프가 세상에 어디 있어요?”
“어딜 엘프 따위가 감히 주인님의 친구를 참칭… 후, 됐다.”
엘시는 잠시 울컥하는 기색을 보였으나, 이내 제 마음을 다스려냈다.
소녀가 고개를 내젓자 고깔모자의 첨단이 함께 흔들렸다. 그 푸른 눈동자에는 옅은 피로가 비치고 있었다.
지난 며칠 강행군을 속행한 대가였다.
더불어 몸뿐만 아니라 마음 고생도 심했으니, 지친 모습을 보이더라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다만 그 표정은 다소 밝아져 있었다.
“그래서, 주인님의 기억은 멀쩡하다고?”
“네, 네에… 아마도 그 기사와 나누던 대화를 들어보니.”
“흥, 주인님 취향도 독특하시지.”
엘시는 코웃음을 치며 우쭐한 미소를 지었다.
나름 기분이 좋아졌을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기억도 있는데 엘프들과 어울릴 건 뭐람? 얼마나 애를 졸였는데…….”
“저, 그.”
이샤가 처음으로 던진 반문이었다.
무슨 일이냐는 듯 엘시의 눈이 물끄러미 이샤를 향했다. 체구는 이샤보다 한참이나 작았으나, 이샤는 잘 알고 있었다.
저 자그마한 손이 한 번 휘둘러지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하늘이 찢겨 나가고, 그 열상으로부터 신의 징벌이 내리꽂힌다.
이처럼 강한 주술사는 난생 처음이었다. 그럼에도 이샤는 타고난 호기심과 푼수끼를 이기지 못했다.
꼴깍, 하고 참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질문이 이어진 것은 그 다음이었다.
“호, 혹시 진짜로 인간이 기억을 잃었으면… 어쩔 생각이셨는지…….”
흐음, 하고 엘시는 침음을 삼켰다.
잠시 주위를 살피던 엘시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엘시는 이샤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책임지라고 해야지… 나, 주인님의 아이를 가졌다고.”
“이, 임신하셨어요……?!”
이샤는 깜짝 놀라 엘시의 배와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임신한 여인의 몸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임신 초기에는 티가 나지 않는다더니, 정말이었구나.
이샤가 나지막히 생명의 신비에 경탄하고 있을 때였다.
엘시는 뻔뻔할 만큼 태연한 낯빛으로 말했다.
“아니? 임신은커녕 나 처녀인데.”
“그럼 나중에 어떻게 하려고……!”
“진짜로 임신하면 되잖아… 밤에 확, 남몰래 덮쳐버려서.”
이샤는 그 태연자약한 소리에 입을 꾹 다물었다.
혹시 농담인가 싶어 눈치를 살폈으나, 엘시는 한없이 진심으로 보였다. 그 푸른 눈동자에서는 어떠한 동요도 느껴지지 않았다.
광인의 발상에 가까운 이야기였다.
고작해야 남자 하나 차지하겠다고 제 순결을 버리려 하다니. 심지어 혼전임신이라면 여인에게 그만한 불명예도 없을 터였다.
그래서 이샤는 다시금 깨닫는 수밖에 없었다.
역시나, 인간은 무서운 존재라고.
하지만 그 생각은 오래 가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잡념을 털어내야만 할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던 탓이었다.
쿵, 하고 울려 퍼지는 진동.
일행의 걸음걸이가 곧장 멎어버렸다. 아직 ‘본부’와는 거리가 있었다. 그럼에도 이처럼 선명히 느껴지는 진동의 정체는 무엇인가.
얼음장 같은 정적이었다.
델핀은 침묵 속에서 어느 방향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 호흡을 가라앉히기를 몇 초.
핏빛 눈동자가 부릅떠졌다.
“피해!”
일행은 본능을 거스르지 않았다.
땅 위로 던져진 여인들의 몸이 눈 속에 파묻혔다. 그 아슬아슬한 회피 동작 직후, 세상을 불태우며 날아드는 광선.
이글거리는 열기가 망막을 백열시켰다.
폭음조차 들리지 않았다. 광선이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못헸다.
나무도, 동물도, 그 무엇도.
광선의 궤적을 따라 일직선의 시야가 확보될 정도였다. 일행들은 신음을 흘리며 주춤주춤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불타오른 직선의 끝에서, 보였다.
아주 자그마한 점과 같은 풍경이었다. 그러나 누군가가 저 멀리에서 검을 들고 싸우고 있었다. 넘실거리는 그림자가 춤을 추고 있었다.
엘시는 그 광경을 보자마자 곧장 땅을 박찼다.
“주인님!”
그것이 시작이었다.
일행은 곧장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오매불망 찾고 있던 사내를 향해서.
결전의 신호탄이 올라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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