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7화 〉 5. 빵과 비수(75)
* * *
끓어넘치는 살점 위로 사내가 하나 섰다.
화상을 입어 추레한 몰골을 한 중년이었다. 해진 사제복이 한때 그가 천신교에 몸담았던 인물이라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었다.
이제는 아니겠지만.
까마귀의 기억에서 그는 침착해 보였다. 때때로 광증이 도지긴 했으나, 본질적으로는 심유한 눈빛을 가진 종교인이었다.
허나 지금 나를 내려다보는 저 사내의 눈빛은 어떤가.
이글거리는 욕망이 끓어 넘치고 있었다. 정작 본인조차 그 감정의 이름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터였다.
너무나 강렬해서, 무엇을 겨누는지조차 알 수 없는 시선.
나 하나만을 향한 마음은 아니리라.
내 입술이 나지막이 적의 이름을 읊조렸다.
“……레오릭.”
“제 이름을 이미 알고 계셨군요.”
의외라는 듯 던진 말이었으나, 그 음색에는 경탄이나 동요가 섞여있지 않았다.
지극히 평온한 말투였다.
얼핏 들으면 이웃사촌에게 안부라도 전하는 듯했다.
엘프들은 느닷없는 대치에 겁에 질린 기색이었다.
나와 레오릭이 마주 선 사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몇몇 엘프들은 무기를 든 채 주춤주춤 나를 포위해 가고 있었다.
난감했다.
지금 내 품에는 아비앙이 안겨 있었다.
만일 내가 당하면, 높은 확률로 다음 차례는 그녀가 될 터였다. 그 사실이 유독 내 마음을 묵직하게 짓눌렀다.
이제야 막 자매 상봉을 이룬 뒤가 아닌가.
그럼에도 아비앙은 여동생과 제대로 된 대화조차 나누지 못했다. 더불어 그 여동생은 정신을 잃고 적의 품에 안긴 판이었다.
비극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장르는 아니었다.
나는 자세를 낮추고 성대를 거칠게 긁었다.
“베티를 어떻게 한 거지? 그리고 그 꼴은 뭐고?”
“임마누엘… 이 또한 주의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저 또한 몰랐는데, 아무래도 제 몸에는 특별한 ‘축복’이 머무르고 있는 듯합니다.”
또 다시 ‘축복’이었다.
이제 지긋지긋할 정도였다. 아마 북부를 떠난 뒤에도, 한동안 그 낱말을 들을 때마다 진절머리를 치지 않을까.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살아남아야겠지만.
나는 조용히 무장을 정비했다. 아비앙의 몸이 설원 위로 살포시 내려앉았다.
상대는 레오릭이었다. 누군가를 지키며 싸우는 것은 무리였다.
그러니 우선 아비앙의 안전을 보장받을 필요가 있었다. 내가 자꾸만 레오릭과 대화를 시도하는 이유였다.
“그리고 베티 자매님이라면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잠시 잠이 들으셨을 뿐… 육체는 ‘아직’ 건강합니다.”
“아직?”
“정신의 부재 상태가 길어지면 육체에도 악영향이 갈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러니 저로서는 어서 형제님을 설득해 보고 싶군요.”
내가 그랬듯이 레오릭 또한 베티의 몸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그러자 부글거리며 끓는 살점이 단숨에 베티를 파묻어 버렸다. 내가 무어라 하기도 전에 벌어진, 눈 깜짝할 새 벌어진 사건이었다.
내가 미간을 찌푸리자 레오릭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의외로 걱정이 많으시군요, 형제님… 다시 말씀드리지만, 위험하지 않습니다.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모든 엘프들이 저의 형제이자 자매인 것을.”
“그다지 우애가 좋아 보이진 않던데.”
“너무 편협한 시각으로 보지 마시죠. 그리고 형제님께서도 느끼지 않으셨습니까?”
나는 레오릭의 말에 노골적으로 빈정거리며 대응했다.
그럼에도 레오릭의 표정은 여전히 평온하기만 했다. 단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가슴에 성호를 그었을 뿐.
훌륭한 종교인의 표본 같은 모습이었다.
하반신이 살점 괴물에게 삼켜졌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는 계속해서 설득을 이어갔다.
“종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약자들과 연대하려는 의지입니다… 인류가 엘프에게 저지른 만행을 똑똑히 보지 않으셨습니까?”
“……네가 한 짓이잖아, 이 개자식아.”
나는 그쯤에서 결국 참지 못하고 으르렁거렸다.
인류와 엘프 사이를 이간질해 놓고, 마치 정의와 평화를 좇는 양 떠들어대는 꼴을 더는 참기 힘들었다. 헛구역질이 나올 지경이었다.
“마을의 엘프들은 아무런 죄도 없었어! 인류도 굳이 침엽수림까지 도망친 엘프를 건드릴 이유는 없었지… 그런데 네가 습격과 약탈을 주도하며 모든 것이 달라졌어!”
“달라지다니요? 무엇이, 어떻게 말입니까.”
“네가 평화를 망쳤지.”
내 주장에 레오릭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의 시선이 툭 땅으로 떨구어졌다.
납득한 기색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말을 이어갔다.
“네가 인류를 도발하지만 않았어도, 마을의 엘프들은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었어! 토벌군이 꾸려지는 일도 없었겠지… 그런데 네가 모든 걸 망쳤……!”
“그걸 ‘평화’라고 부릅니까?”
난데없는 물음에 내 말문이 턱, 하고 막혀 버렸다.
나는 무슨 뜻이냐는 듯 레오릭을 응시했다. 그는 쓴웃음을 지은 채로, 다시금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그 눈동자에 은은한 열기가 어린다.
“대수림에서 살고 있던 엘프들을 이 춥고 건조한 북부로 쫓아내,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하게 하는 것이 평화입니까? 영원히 이 침엽수림에 가두고 문명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 평화냔 말입니다!”
무어라 반박을 하고 싶었는데.
차마 입술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수많은 회상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빵을 보고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던 엘프들.
임신한 쥐를 끓여 먹던 돌프 아저씨와 루게트.
그리고 매일 아침 아비앙이 식사라고 가져오던 ‘나무 죽’까지.
처량한 삶이었다.
과연 이를 ‘삶’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저 질기디 질긴 목숨을 놓지 못해 모진 하루하루를 견디는 것이 아닐까.
나로서는 함부로 단언하기가 힘들었다.
왜냐하면 나는 제국의 귀족이었으니까.
적어도 먹을 것이 없어 배를 곯아본 적은 없었다. 최소한의 존엄성을 유지하지 못할 상황까지 몰려본 적도 없었다.
내가 침묵을 지키자 레오릭은 더욱 흥분해서 목청을 돋우었다.
“형제자매들이여, 그대들은 어떻습니까? 이 오만한 자를 보십시오! 그대들에게 삶이 축복이었던 적이 있었습니까? 이 세상이 천국이었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냔 말입니다!”
음울한 눈빛들이 나를 겨눈다.
빛과 그림자가 사라진 시선이었다. 삶의 의지나 희망 따위는 꺾여 스러진 지 오래로 보였다. 차라리 건어물의 것에 가까운 눈동자들이었다.
그 와중에도 레오릭의 목소리는 열기를 더해가고 있었다.
어느덧 새하얀 마력이 몰려들어, 토해내는 한 마디 한 마디마다 이글거리는 열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기득권의 논리! 기득권의 기준! 이안 형제님, 당신 또한 마찬가지였던 겁니다! 당신 또한 우리가 부수어야 할 세상의 일부!”
그리고 그 다음 순간.
나와 아비앙의 몸이 포개졌다. 마치 내가 아비앙을 감싸는 듯한 모양새였다.
나조차도 그 까닭을 알 수 없었다.
단지 본능적으로 몸을 던져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
그 선택이 옳았다는 사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증명됐다.
쿵, 하고 지축이 흔들리고.
세상이 백열하며 시야를 새하얗게 달구었다.
눈을 감았음에도 불그스름한 잔상이 남을 정도였다. 등줄기를 태우며 지나가는 강렬한 열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광선이다.
가까스로 포착해냈다. 레오릭의 눈과 입에서 빛이 줄기줄기 뻗쳐 나오더니, 레오릭이 비명을 내지르는 것과 동시에 광선이 쏘아졌다.
나는 내 가슴팍에 닿는 숨결을 확인하고 고개를 들었다.
광선이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숲이 일렬로 관통되어 시원한 시야를 제공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진풍경이었다.
그 광경을 연출한 사내를 내가 상대해야 한다는 사실은, 조금도 유쾌하지 않았지만.
나는 발악처럼 몸을 일으키며 외쳤다.
“양심적으로 비전투인원은 건들지 마!”
“일부러 노리지는 않겠지만, 휘말리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레오릭은 찰박이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느리지는 않았지만, 빠르지도 않은 속도였다.
나는 이를 악물고 칼을 빼들었다.
이대로 접근을 허용할 수는 없었다. 충돌지점이 멀어질수록 아비앙은 안전해질 테니까.
내 몸이 곧장 땅을 박차고 쏘아진 이유였다.
그 직후.
쾅, 쾅, 쾅!
지축이 세 번 더 울렸고, 나는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
성녀는 매일 두통에 시달렸다.
뇌를 혹사시킨 대가였다. 사랑하던 사내가 떠난 이후, 성녀는 무심코 매일 밤 그를 구출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현실성은 딱히 높지 않았다.
이미 델핀과 엘시, 엠마가 출발한 뒤였으나 아직 소식은 없었다. 사실 기억을 잃고 인류를 적대하는 이안을 구해낼 수 있을지부터가 의문이었다.
혹시 침엽수림에서 살의를 품은 그를 만난다면?
필패였다. 문답무용으로 멱을 따러 오면 지금의 전력으로는 제압이 불가능했다. 심지어 델핀이 있더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두통은 심장의 통증을 동반한다.
이안을 떠올릴 때마다, 성녀의 가슴은 견딜 수 없이 아팠다. 늘 이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되뇌였으나, 마음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았다.
보고 싶다.
그 간결한 욕망만이 성녀의 뇌리를 가득 채웠다. 눈물을 뚝뚝 떨구면서, 기도를 한 지도 며칠째.
성녀는 헛웃음을 머금었다.
짙은 피로가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그러니까… 유르디나 후작이 배신자다?”
존칭과 경어가 생략된 말이었다.
평소의 그녀였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극히 피폐해진 성녀에게는 그 실수를 정정할 여유조차 남아있지 못했다.
대비되는 광경이었다.
성녀의 앞에는 의지로 활활 타오르는 소녀가 서 있었다. 암청색 머리카락의 소녀는 두 주먹을 꼭 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디 보자…….”
성녀는 그 망설임 없는 대답에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손을 황녀의 이마에 대고, 손가락으로 황녀의 눈꺼풀을 열어 살피고.
그러기를 얼마쯤.
성녀는 이상하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흐음, 아직 증상은 없는데… 우리 상담을 시작해 볼까요?”
“지, 진짜라고요!”
병자 취급이 억울했던 황녀는 목소리를 드높였다.
울상을 지은 그 얼굴에서 그녀의 심정이 그대로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 반응에 성녀는 더욱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설령 진짜라고 해도 어쩌자고요? 유르디나 성의 주인은 후작입니다… 제국의 황제가 나서지 않는 이상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요. 델핀 자매님께서 계셨다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세리아 자매님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면서요?”
하나하나 정론이었다.
황녀는 반박할 말이 마땅치 않아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황녀가 세리아 다음으로 성녀를 찾아온 이유가 그것이었다.
세리아는 황녀의 말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더불어 받아들인다고 해도,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고작해야 서녀 따위가 제 아비를 참할 힘이 있을 턱이 없었다.
만일 그럴 수 있는 이가 있다면, 오직 델핀뿐이었다.
혹은 제국의 권력에서 벗어난 존재거나.
천신교의 지원을 받는 성녀가 유일한 희망이었다.
황녀는 그 희망에 배신당하자 어깨를 축 늘어트리는 수밖에 없었다. 성녀도 말로는 ‘제국 황실’을 운운했으나, 그 증거를 받는 작업이 지난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을 터였다.
이안의 누명이 벗겨질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하겠지.
그 전까지 이안의 칼에는 얼마나 많은 피가 묻을 것인가.
결국 성녀는 기나긴 한숨을 내뱉어야 했다.
“지금으로서는 이안을 믿어 보는 수밖에 없어요. 유르디나 후작 주위를 정찰할 인물이 우리 주변에는 존재하지 않…….”
“있습니다.”
어디선가 들려온 대답이었다.
성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려다가, 문득 깨달은 바가 있어 멈칫했다.
황녀는 대답을 하지 않았는데?
여인의 몸이 퉁겨오르듯 일으켜졌다. 경계 어린 연분홍색 동공이 주위를 훑었다. 그러자 서서히 내려앉는 그림자가 하나 있었다.
갈색 머리카락, 독을 암시하는 진녹색의 눈동자.
하녀복을 입은 첩보원이 싱긋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특히그… 유르디나 후작에 관해서.”
네리스의 귀환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