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9화 〉 5. 빵과 비수(77)
* * *
낯익은 얼굴은 엘시 선배로 끝이 아니었다.
뒤이어 델핀 선배와 엠마가 내게 달려왔다. 그리고 저 멀리에서 눈치를 보며 걸어오고 있던 이샤까지.
나는 우선 내 품에 안기는 엘시 선배의 감촉을 만끽했다.
델핀 선배는 나를 보자마자 만면에 화색을 띠었다. 그녀로서는 매우 드문 감정 변화라, 이내 실수했다는 듯 헛기침을 하긴 했지만.
그만큼 델핀 선배도 마음을 졸였다는 뜻이겠지.
솔직히 기분은 좋았다.
언제나 도도하고 여유롭던 델핀 선배였다. 그러던 여인이 나를 보자마자 난생 처음 보는 환한 미소를 짓다니.
우리가 특별한 관계를 맺었던 덕일까.
나도 델핀 선배를 보자 묘하게 가슴이 간질거렸다.
내가 그렇게 감상에 잠긴 사이, 헐떡이며 내 앞까지 다가온 엠마는 눈물을 글썽였다.
믿지 못하겠다는 듯 소녀의 손이 얼굴을 몇 번 더듬었다.
종래에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기까지 할 정도였다.
“이, 이안… 흐윽, 미안해…….”
무엇이 미안하다는 건지.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엠마를 다독여야 했다.
“괜찮아, 엠마. 나는 괜찮아… 오히려 네가 무사해서 다행이야. 많이 힘들었지?”
무심코 엠마를 품에 안으려던 나는, 멈칫한 채 주위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주로 엘시 선배가 신경 쓰였다.
가히 질투의 화신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여인이었다. 내게 진심을 털어놓은 이후, 엘시 선배는 내게 다가오는 여성에게 무차별적인 적의를 표출하곤 했다.
하지만 엘시 선배가 보인 반응은 의외였다.
그녀는 코웃음을 치면서, 새초롬하게 살짝 눈을 돌렸다. 내키지는 않아도 용인해 주겠다는 태도였다.
“흥, 난 라이넬라야… 고작해야 평민 계집애 하나 가지고 이래라저래라하지는 않는다고.”
엘시 선배다운 우쭐한 어조였다.
그럼에도 초조한지 흘깃흘깃 나를 바라보는 눈길마저 숨길 수는 없었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그 배려를 감사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도리어 내게 제동을 건 쪽은 델핀 선배였다.
“주인님,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지만… 시간이 없어. 어서 도망치자.”
“그럼 저 괴물은요?”
“방치하는 수밖에.”
훌쩍이는 엠마의 등을 토닥이며, 나는 침음과 함께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도 살점덩어리는 나와 일행을 주시하고 있었다. 막무가내로 엘프들을 섭취하던 이전의 모습과는 정반대였다.
유심히 우리를 살피는 듯한 느낌.
적의 전력을 가늠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어쩐지 그 까닭이 짐작이 갔다.
“저 괴물… 엘프를 흡수하면서 크기를 키워가고 있어요. 이제 막 증식을 시작한 지금이 가장 약할 때입니다.”
델핀 선배의 미간이 찌푸려졌고, 엘시 선배는 그 푸른 눈동자를 살점덩어리에게로 향했다.
상반되는 반응이었다.
델핀 선배는 망설이는 듯하면서도 퇴각에 무게를 두고 있는 듯했다. 반면 살점덩어리를 바라보는 엘시 선배의 눈동자에는 적의가 엿보이고 있었다.
그 원인이야 뻔했다.
엘시 선배의 눈동자가 흘깃 내 옆구리를 훑고 지나갔다.
결심했다는 듯, 고깔모자를 쓴 소녀는 이를 악물었다.
“그래? 그럼 당장 본때를 보여줘야지! 야 뱀대가리, 네가 지금 누굴 건드린 줄 알고 그렇게 고개를 뻣뻣이……!”
“다쳤잖아.”
나지막한 한 마디였다.
델핀 선배의 그 진중한 말소리에, 곧장 엘시 선배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여인의 핏빛 눈동자에는 내 모습만이 비치고 있었다.
“옆구리를 당했으면 내장까지 다쳤을 가능성이 커. 심지어 화상이라면… 당장 사제한테 가서 적절한 처리를 받아야 해.”
“전 괜찮습니다. 그보다 저놈 안 보입니까? 저 집채만한 놈이 겁을 먹고 우리 눈치만 살피고 있잖아요! 지금 같은 기회는 다신 없… 끄아아악!”
그러나 내 반항은 엠마의 손짓에 무력화되었다.
얌전히 내 반박을 듣고 있던 엠마의 손가락이 꾸욱, 하고 지져진 내 옆구리를 누른 탓이었다. 불의의 일격에 나는 비명을 내지르는 수밖에 없었다.
눈물이 찔끔 났다.
그러지 않아도 겨우 참고 있던 통증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상대에게 기습을 당하기까지 했으니, 꼴사나운 비명을 내지르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엠마는 결연한 눈빛을 했다.
“돌아가요, 유르디나 아가씨.”
단호한 어조였다.
나를 바라보는 엠마의 시선이 묵직했다. 마치 반론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한 태도.
초조한 마음에 내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갔다.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저 괴물은 미래의 ‘나’조차 건드리지 말라고 했던 상대였다. 최대한 약해져 있을 때 노리지 않으면, 사단이 날 것이 분명했다.
무엇보다 저 끓어 넘치는 살점을, 나는 미래에서 온 ‘나’의 기억에서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북부를 덮치던 해일과 같은 재앙.
그 앞에서 홀로 선 회색 머리카락의 여인이 떠올랐다.
결국 나는 고집이라도 부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 먼저 가세요… 이 엘프, 이 엘프만 데리고.”
나는 땅에 내려두었던 아비앙을 눈짓하며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 당연히 일행의 분위기는 단박에 험악해졌다.
알고 있었다. 비겁한 수단이라는 건.
하지만 내 눈에는 자꾸만 아비앙과 그 여동생의 모습이 밟혔다. 그리고 비명을 내지르며 살점덩어리에게 끌려가던 엘프들의 눈빛도.
그들은 왜 비명을 내질렀을까.
삶이 지옥이라고 하지 않았나? 더는 살고 싶지 않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때 내게 보인 눈빛은, 하나 같이 절망에 물든 것뿐이라서.
나는 더욱 단단해진 음색으로 말했다.
“지금밖에 없어요, 델핀 선배.”
결국 항복을 선언한 쪽은 내가 아닌 델핀 선배였다.
애초에 나를 구출하기 위한 원정이었을 터다. 나를 두고 엘프 소녀 하나만 데리고 가는 선택지는 논의였다.
나와 델핀 선배 사이에서 짧은 대화가 오고갔어.
“……이길 수 있어?”
“모르겠어요.”
“그럼 딱 한 번뿐이야.”
대화의 끝이었다.
이샤는 그제야 우리 옆으로 슬금슬금 다가서고 있었다. 살점덩어리의 흉측한 몰골에 겁을 먹은 듯, 다리가 후들거리며 떨렸다.
“이, 인간… 저 괴물은 뭐야? 이곳은 본부인데, 왜 엘프들이 이렇게 적…….”
“이샤, 엠마랑 아비앙을 부탁한다.”
진형은 눈 깜짝할 사이 갖추어졌다.
내가 몸을 일으켜 앞장을 서자마자, 곧장 내 옆으로 델핀 선배가 따라붙었다. 엘시 선배의 손에 마력이 어리기 시작한 것은 물론이었다.
몇 번이고 사선을 넘어온 동료란 이처럼 듬직했다.
대화조차 필요하지 않았다. 무언의 약속이 우리 사이에 맺어져 있었다.
전위는 나와 델핀 선배.
엘시 선배는 뒤에서 강한 한 방을 준비한다.
아마도 ‘질풍신뢰’가 이어질 터였다. 엘시 선배가 시전할 수 있는 5서클의 마법 중 최고의 파괴력을 지닌 범위 마법이었다.
그 전까지는 최대한 변수를 차단해야 했다.
예를 들어, 범위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있는 주변부의 뱀들이라든가.
살점덩어리는 단박에 우리의 의도를 깨달았다. 이처럼 날카로운 기세를 흩뿌리고 있으니, 오히려 눈치채지 못하면 이상할 정도였다.
뱀들이 낯가죽을 바꿔가며 울부짖는다.
“끝, 내, 다, 오… 끝, 내, 다 오!”
그리고 벼락처럼 지반을 두드리는 살점의 촉수.
나는 기다렸다는 듯 검을 휘둘러 촉수를 잘라냈다. 남은 한 손에서 손도끼가 매서운 속도로 쏘아졌다.
손도끼의 궤적이 반월을 그렸다.
핏물이 터져 나오며 철퍽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몇몇 촉수들이 살아남았으나, 그 촉수들은 이내 금빛의 불꽃을 마주해야 했다.
마치 태양과도 같은 황금빛 오러.
델핀 선배의 솜씨였다. 살점덩어리는 불길에 특히 취약한 듯 촉수를 마구잡이로 뒤틀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 고통이 짐작이 갔다.
뒤이어 뱀의 두개골이 백열하기 시작한다.
수십에 이르는 뱀 머리에 차례차례 불이 들어오는 풍경은 가히 장관이라 할 만했다. 밤에 보았다면 더욱 절경이었으리라.
레오릭은 계속해서 울부짖었다.
“이, 저, 주, 받, 은, 삶!”
광선이 죽죽 그어지며 정육방체의 공간에 금이 간다.
그래, 마지막 기회였다.
**
세리아의 방은 늘 어둠에 잠겨 있었다.
창문으로 새어드는 빛은 고풍스러운 천에 가려진 지 오래였다. 더불어 세리아의 푸른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은은한 광채를 뿌리고 있었다.
빛이 없더라도 생활에 불편함은 없었다.
그러니 세리아는 제 죄를 두려워하는 죄인처럼 스스로를 방 안에 유폐했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제 몸을 학대하기를 며칠.
느닷없이 황녀가 그녀를 찾아왔다.
‘패륜’을 제안하기 위해서.
세리아는 도리질을 치며 부정했으나, 황녀가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는 사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어찌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아버지는 세리아의 유일한 혈육이었다.
피가 이어진 가족은 오직 그뿐이었다. 존경하는 언니인 델핀이 있기는 하지만, 태어난 배가 다른 반쪽짜리 혈육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거짓말을 했다고.
어머니를 내친 인물이었다.
내심은 미워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의 악몽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악당이 바로 그였으니까.
그러나 사실은 버리지 못했던가.
혈육의 정이라는 것을.
그녀를 찾아온 여인들의 말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더듬더듬 토막 나서 뇌리를 파고드는 사실들.
“유르디나 후작이 배신자였어요.”
“이안 님께서는 기억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또 엘프의 편을 든 것도 아니에요. 도리어 알렉스가 델핀 양을 속이고 있었죠.”
“세리아 자매님, 자매님께서 결단하셔야 합니다.”
세리아는 암울한 낯빛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결단해야 한다고? 내가?
이 세상에 남은 마지막 혈육을 참하란 말인가.
천박한 제 어미의 피를 이어 아버지를 배신했다는 소리나 듣겠지. 유르디나 가문의 실권이 델핀에게 넘어가더라도, 영원히 남을 오명이었다.
생각해 볼 것도 없이 거절해야 했다.
언젠가 결단을 내려야겠으나, 그 주체는 세리아가 아니어야 했다. 애초에 세리아는 유르디나 후작을 축출할 능력이 없었다.
그럴 만한 인물이 가문에 있다면, 오직 하나.
예전부터 후계자로서 가문을 장악해 온 델핀뿐.
문제는, 그 건너편에 놓인 선택지였다.
그 무엇보다 소중한 선배가 아버지에게 배신당했다.
그래서 죽을 위기에 처했을지도 모른다.
세리아는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가족이냐, 선배냐.
흐으, 하고 세리아의 숨이 거칠어졌다.
“선배님, 괴롭겠지만 증언이 너무 절묘하게 교차하고 있어요. 의심할 여지는 많지 않…….”
“그래서 제 유일한 혈육을 베라?”
날카로운 반문에 황녀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성녀와 네리스는 이미 침묵을 지킨 지 오래였다. 이제부터 세리아의 시간이 찾아왔음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다만 성녀는 단 한 마디를 덧붙였을 뿐이었다.
“이안을 위해서에요.”
이 세상에 세리아를 지탱하는 것은 둘밖에 없었다.
혈연으로 맺어진 유르디나 가문.
그리고 인연으로 맺어진 이안 선배.
무엇이든 하나는 버려야 했다.
세리아의 손이 덜덜 떨렸다. 어째서 이토록 무거운 선택이 제 손에 쥐어졌는지 이해할 수 없는 눈빛이었다.
이안 선배를 택해야 했다.
가슴과 머리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다만 아직도 세리아가 망설이는 까닭은, 제 손으로 부모를 죽이는 길을 택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이었다.
헐떡이는 숨소리가 더욱 거칠어진다.
“나, 나는… 나는 그러니까…….”
경어조차 생략된 표현.
성녀는 이해한다는 듯 조용히 눈을 감았다. 네리스는 애초에 이곳에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듯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황녀만이 초조한 낯빛으로 두 주먹을 꼭 쥐고 있을 따름이었다.
반짝이는 두 눈빛이 세리아에게 어떠한 대답을 채근하고 있었다.
세리아가 이를 이기지 못하고 한 마디를 내뱉기 직전.
“델핀 아가씨가 돌아오셨다! 이안 경도 함께야!”
난데없이 들려오는 환호성에, 일행의 고개가 급격히 꺾였다.
세리아는 혼란한 와중에도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지난 며칠간 단 한 번도 열지 않았던 창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과연 그 말대로였다.
저 멀리에서, 델핀과 그 일행이 비틀비틀 걸어오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중상을 입은 이안을 업고서.
델핀은 말했다.
“당장 군대를 소집해.”
눈보라가 유독 심하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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