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0화 〉 5. 빵과 비수(78)
* * *
사고가 부유한다. 맞물리지 못한 기억들이 미끄러지며 소음을 일으키고 있었다.
몇 가지 화상이 몽롱한 정신 속에 부상했다.
본래라면 끊임없이 이어져야 할 장면들이었다. 토막 난 회상의 고리들이 우둘투둘한 사슬처럼 뇌리를 지나갔다.
내달리는 몸뚱어리가 파공성을 가르고 쏘아졌다. 수십에 달하는 뱀 대가리들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것이 첫 번째 장면.
이후의 기억들은 드문드문 남아있을 뿐이었다.
검과 도끼가 피보라를 터트렸다. 육편과 골편이 비명과 함께 퍼져나갔다.
그래, 이때까지는 괜찮았는데.
금빛의 궤적이 다가서는 촉수들은 모조리 태워버렸다. 델핀 선배의 가세로 내게 걸리적거리는 적은 남아있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무시무시한 괴물이라도 이제 막 태어난 존재에 불과했다.
오러로만 따지자면 나보다 강한 델핀 선배의 상대가 될 턱이 없었다. 그리고 늘 그랬던 것처럼, 델핀 선배는 내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그 다음으로 떠오르는 풍경은, 사위를 에워싸는 광선의 폭풍.
이 또한 힘겹지만 넘어설 수 있었다. 결(?)과 해(?)를 사용하여, 어떤 광선은 튕겨내고 어떤 광선은 흩어버렸다. 굴절된 광선들이 서로 부닥치며 폭발을 일으킨 적도 부지기수였다.
무엇보다 엘시 선배가 시전한 ‘질풍신뢰’의 공이 컸다.
마구잡이로 내리꽂힌 벼락은 피아를 구분하지 않았다. 그 사이를 헤쳐 나가는 것은 고난이었으나, 애초에 움직일 수조차 없는 살점덩어리는 더욱 괴로울 수밖에 없었다.
수십에 달하는 뱀 대가리가 한꺼번에 감전되는 광경은 가히 장관이었다.
전류가 근육을 수축시키자 뱀들은 하나같이 대가리를 치켜들었다. 마치 비를 기다리는 바다뱀 같은 몰골이었다.
혹은 이교의 신을 기념하기 위한 기괴한 상징물이라든가.
어느 쪽이든 뱀 대가리가 무력화되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나는 마지막까지 남은 단 하나의 머리만을 남기고 있었다.
레오릭이었다.
그 다음으로 떠오르는 장면들은 더욱 파편적이었다.
어린아이가 빚어놓은 찰흑처럼 변이하는 얼굴.
알렉스와 베티.
검은 차마 그 둘을 베지 못했다. 찰나의 망설임이 불러온 대가는 무시무시했다.
푹, 하고 복부가 관통되는 감각이 전해져 왔다.
하도 관통상을 많이 당하다 보니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최소 중상이라고.
그리고 의식을 잃어, 내가 깨어난 장소는 이곳.
메마른 목소리가 파문을 일으켰다.
“……한심한 몰골이군.”
익숙한 음색이었다.
그 고저 없는 비난에, 나는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몇 번 마주하니 이제는 알 만했다.
저 건조한 한 마디에는 책망의 기색이 어려 있었다.
말라비틀어진 걸레에서 물을 짜내듯, 자그맣게 새어 나오는 감정이었다. 그를 오래 마주한 이가 아니라면 눈치조차 챌 수 없을 테지.
그럼에도 내가 그의 속내를 읽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저 사내는 나였으니까.
피로에 젖은 금빛 눈동자, 비 맞은 늑대처럼 고독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검은 머리카락.
나를 내려다보는 그 눈빛에는 조롱과 오만이 담겨 있었다. 절대적인 강자의 위치에 있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풍모였다.
나지막한 말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모두를 지키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그 결과가 이 꼴… 웃기지도 않아.”
“밑바닥을 보고 오라 한 쪽은 당신이잖아?”
“그래, 그랬지.”
순순히 내 지적을 수용하는 듯 보였으나,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애초에 내 주장을 받아들일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지나온 삶의 궤적은 흉터와 같았다. 지우려고 해도 지울 수 있을 턱이 없었다. 더불어 지우고 싶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겠지.
그것은 일종의 범죄 행위였다.
세상을 지키겠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수없이 버려 왔던 소중한 존재들에 대한 모욕.
사내는 언제나 제 길이 옳다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엘프 몇 명 지키겠다고 소란을 피우라는 말은 하지 않았어. 보지 못했나? 내가 포기하라고 써놨잖나, 그 편지 뒤편에.”
“그럼 그 괴물을 그대로 방치하란 말이야? 인류와 엘프는 오해 속에서 서로를 죽여가고?”
“여태껏 늘 벌어졌던 일이지… 무려 수백 년 동안이나.”
그 담담한 어조에는 어떠한 동정과 연민도 담겨 있지 않았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갖춰야 할 감정조차 소실된 인간이었다. 그가 내 심정에 공감해 줄 리가 없었다.
“몇 년 더 그런다고 덧나나? 나는 네가 엘프를 보며 밑바닥을 보길 원했어. 그곳에 사는 이들이 암흑교단의 주목표거든… 열등감, 열패감, 좌절과 분노. 그 모든 감정이 델피렘의 먹잇감이 되지. 더욱이 엘프 사이에 네 사람을 두면 정보를 얻기도 간단하고.”
내게 인내의 한계가 찾아온 것은 그 무렵이었다.
낮게 내리깔린 목소리가 내 성대를 훑고 지나갔다. 악물어진 잇새 사이로 열기가 전해졌다.
“마을의 엘프들은 내 도구 따위가 아니야… 제대로 싸울 줄도 모르는데 간자 노릇을 시켜?”
“인류를 위해서라면 해야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내 어깨 위에 얹어지는 짐.
나는 순간적으로 숨이 턱, 하고 막혀 왔다. 사내의 금빛 동공이 더욱 깊어졌다.
“몇 번이나 말하지만, 버릴 것은 버려야 해… 넌 아직 어리광을 피우고 있는 거야. 무언가를 버릴 용기가 없어서 징징거리고 있는 거지.”
“이미 많이 버렸어.”
처음으로 사내의 입이 다물어졌다.
나는 벌컥 차오르는 감정을 가까스로 내리눌렀다.
단지 짓씹듯이 덧붙였을 뿐이다.
“그 편지를 받기 전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만큼 많이…….”
나는 손에 피를 묻혔다.
길포드, 알렉스, 그리고 그 외에도 수도 없이 많은 목숨들을 내 손으로 취해야 했다.
종래에는 내 몸까지 내던지기도 했다.
이조차도 충분하지 않단 말인가?
사내는 내 의문에 답해주지 않았다. 그저 시선을 피하는 내 낯빛을 유심히 살피다가, 한 마디를 던졌을 따름이었다.
“앞으로 더 많이 버려야 할 거다.”
인정사정없는 조언이었다.
나는 쓴웃음을 머금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면, 그는 늘 이랬다.
이상한 짓을 하는 것 같아도 의도가 숨어 있었다. 적어도 내게 해가 되는 방향은 아니었다.
그래, 그랬는데.
이어지던 내 사고가 돌부리에 걸린 듯 덜컥 멈춰 섰다. 내 뇌리에 연기처럼 새로운 의문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진짜로 포기해야 하나?”
단순한 물음이었다.
마치 재심을 기다리는 죄인처럼, 어쩌다 희망의 포로가 되어 하소연을 하는 듯한 모양새.
사내가 이를 들어줄 리가 없었다.
그는 드물게도 코웃음을 쳤다.
“그래, 네게는 아직 이르니까… 심지어 마지막 기회까지 눈앞에서 놓쳤지.”
“그럼 왜 황녀를 데려오라고 한 거지?”
우뚝, 하고 사내의 숨소리가 멎는다.
또 다시 메마른 금빛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나는 그 눈빛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물었다.
“그리고 왜 세리아한테는 그 기술을 가르쳐 준 거야? 또 하나의 편지는 왜 버린 거지?”
“편지라니, 무슨 소리인지…….”
“동화율.”
시치미를 떼려던 사내의 입이 꾹 닫혔다.
그렇다. 미래에서 온 편지는 아무도 만질 수 없다.
만지기는커녕 볼 수 있는 이조차 내가 유일했다. 이는 미래에서 온 ‘나’ 또한 예외가 아니라, 그는 지금껏 편지의 내용을 보지 못한 듯 행동해 왔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의문이 꽃피기 시작했다.
최근의 그는 마치 편지의 내용을 알고 있다는 듯 조언을 건네고 있었다. 예전에는 대략적인 수준에 그치고 있었으나, 최근에는 아니었다.
특히 엘프 마을에 떨어질 당시에는 마치 내 상황을 전부 읽고 있는 듯했다.
나와 감각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공유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무엇보다 편지를 건드릴 수 있다면 그밖에 없었다. 최소한 내가 술에 취해 어디다 던져둔 것은 아닐 테니까.
“동화율이 높아지니까, 편지를 건드릴 수 있게 된 건가? 그래서 두 번째 편지를 버릴 수 있었던 거야.”
사내는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상의 시인이었다. 그러자 내 목소리가 절로 드높아졌다.
“그 편지에는 무슨 내용이 있었던 거지? 그리고 황녀와 세리아는 왜 북부로 와야 했던 거고? 유르디나의 늙은 사자는 또 누구……!”
“애송아.”
탁, 하고 사내의 손이 허공을 후려쳤다.
어느덧 그의 손에는 피 묻은 편지지 하나가 들려 있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그 원리조차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 눈이 새로 등장한 단서에 고정됐다.
저 편지일 터였다. 뜯어진 빈 봉투에 들어있던 물건이.
그리고 내가 무심코 한 걸음을 내딛은 찰나.
비틀, 하고 세계가 기울어진다.
혼절이라도 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었다. 새가 나무 열매를 쪼듯 날카로운 두통이 연신 두개골을 두드렸다.
이제 정신을 차릴 때가 온 것이다.
울렁이는 시야 사이로 사내의 목소리가 섞여든다.
“때로는 알지 않은 편이 좋은 이야기도 있다. 넌 아직 모든 짐을 짊어지기에 한참이나 부족해.”
헛소리 하지 말라고.
나는 당신이 보호해야 할 어린아이 따위가 아니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으나 몸뚱어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도리어 기우뚱 기울던 몸은 앞으로 풀썩 쓰러져, 나는 사내와 눈을 마주하는 것마저 힘겨웠다.
다만 나는 흐릿한 의식 속에서 몇 토막의 말을 내뱉었다.
언어조차 성립하지 못하는 목소리였다.
“나는, 당신이 아니…….”
그리고 의식이 암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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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니 어둑한 방이었다.
시야는 오직 연약한 등불 하나에 의존하고 있었다. 슬그머니 떠진 눈동자가 실로 오랜만에 빛을 받아들였다.
얼마나 누워있던 걸까.
고급스러운 침실이었다. 델핀 선배는 그 와중에도 끝까지 나를 지키고 유르디나 성까지 퇴각한 모양이었다.
언제 봐도 대단한 여인이었다.
그러한 여인과 첫날밤을 치렀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을 만큼.
오감이 차차 돌아오며, 나는 낯선 감각을 느껴야 했다.
유심히 내 하체를 내려다보는 눈길.
내가 눈을 떴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한 채, 연분홍빛 눈동자가 내 사타구니 부근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근처에서 손을 가져다대려다가, 오므렸다가.
성녀답지 않은 우스운 꼴이었다.
의식을 되찾자마자 나는 삼켜야 했다.
“……뭐하십니까?”
“꺄악!”
성녀는 기절할 듯이 놀라 뒤로 넘어질 뻔했다.
당혹과 번민이 섞인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이후 횡설수설 쏟아지는 변명들.
“이, 이안! 일어났어요? 그러니까, 그게 말이죠… 저, 절대! 절대 성추행을 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아시죠? 저, 저 성녀라고요!”
울상을 지으며 중얼대는 여인을 보며 나는 확신했다.
나, 돌아왔구나.
결국 레오릭을 물리치지 못한 채.
암울한 귀환이었다.
새빨개진 성녀의 낯을 보니 아무래도 좋단 생각도 얼핏 들었지만.
다만 내 귀환을 기다리던 것은 내 일행뿐만이 아니었다.
경악할 만한 소식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머리맡 한켠을 장식하는 피 묻은 편지 봉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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