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381화 (381/649)

〈 381화 〉 5. 빵과 비수(79)

* * *

먼 옛날, 오메로스는 제 핏방울을 대지에 흩뿌렸다고 전해진다.

그 피를 머금은 흙에서 온갖 생물이 자라났다. 영혼 없는 육신들이 죄를 탐하며 세상을 배회했고, 모든 생명들이 그들을 두려워하며 꺼렸다.

이를 두고 볼 수 없었던 아루스는 제 간을 떼다 하늘에 매달았다.

그것이 바로 태양이었다.

그래서 온갖 삿된 것들은 태양을 마주하면 순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마수조차도 예외는 아니어서, 대부분의 마수는 낮에 활동하기를 꺼렸다.

또한 인류는 태양이 뜬 시간 속을 살아가게 되었다.

이는 태양이 이성과 합리의 축복을 내리기 때문이었다. 밤마다 무절제한 삶을 살던 이들조차 낮에는 지난날의 죄를 참회하고는 했다.

이 유명한 신화를 성녀가 꺼낸 까닭은 하나뿐이었다.

“그야말로 ‘절제 없는 몸뚱어리’라고 할까요.”

먼 옛날 오메로스의 피에서 탄생했다는 죄악의 권속 중 하나.

끝없이 육체를 탐하고 탐해 제 몸집을 불려 나가는 괴물이었다. 성녀는 그 신화 속의 존재가 다시금 이 대륙에 현현했음을 알리고 있었다.

내가 정신을 잃은 그 며칠 사이 상황이 더욱 심각해진 것이다.

나는 아무 말도 없이 이어지는 성녀의 설명을 들었다.

“유르디나 군이 어떻게든 막아내려고 하는데, 살점을 제거하는 속도보다 불어나는 속도가 더 빨라요. 심지어 이제는 엘프가 아닌 인간까지 삼키고 있더군요.”

“군대를 보내봐야 역효과입니다.”

“알아요. 하지만 민중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무언가 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잖아요.”

선전 이론이었다.

한동안 잊고 지냈는데, 성녀는 성국의 정치판에서 구르던 여인이었다. 당연히 전투 그 자체만을 바라보는 나보다는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을 터였다.

성녀는 침묵에 빠진 내 두 손을 조용히 붙잡았다.

나를 응시하는 연분홍빛 눈동자가 애절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안, 이제 그만둬요.”

“무얼 말입니까?”

“아직 싸울 생각이잖아요.”

어물거리던 내 입이 다시금 다물어졌다.

나는 대답 대신 시선을 피했다. 그것이 무슨 뜻으로 받아들여질지 뻔히 알고 있음에도.

성녀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를 믿고 의지하는 여인이었고, 몇 번이나 목숨을 빚졌으니까.

간절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제는 숫제 애원에 가까운 말투였다.

“이미 많이 노력했잖아요. 다치고, 쓰러지고, 그런데도 다시 일어나고… 하지만 이제는 무리에요. 요즘따라 작은 부상에도 의식을 잃을 때가 많죠?”

또 다시 침묵.

다시 말해 긍정이었다.

성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더욱 초조해진 음색으로 말했다.

“몸은 신물로 고칠 수 있어도, 그 근본이 무너지는 것마저 바꿀 수는 없어요. 옷을 아무리 감쪽같이 수선해도 마지막에는 누더기가 되고 말잖아요.”

“하지만 엘프들이…….”

“당신이 머물렀던 마을의 엘프 주민들은 전부 구출했어요.”

바라던 대로의 소식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 한 켠에 남은 이물감이 가시지 않아,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나는 무의식에서 보았던 사내의 말을 떠올렸다.

‘버릴 것은 버려라.’

아무것도 버리지 않겠다고 허세를 부렸으나, 헛소리였다.

아무것도 버리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저 무언가를 대신 버리는 것뿐이었다.

지금까지는 나를 버려 가면 됐다. 사실 운이 좋았고, 어쩌다 정답을 찾은 적도 많았다. 허나 금번의 사건은 양상이 달랐다.

내 눈앞에서 마지막 기회를 놓쳤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나는 마지막까지 인정을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알렉스와 베티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내면의 연약한 부분을 아직 도려내지 못한 탓이었다. 사내의 말처럼, 나는 아직 ‘애송이’일지도 몰랐다.

“이안, 우리가 아니어도 대륙에는 인재가 많아요. 당장 마스터만 해도 셋이나 있잖아요. 아직은 논의 중이지만, 제국의 검공과 성국의 성자께서 오신다면 전황이 반전될 거예요.”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나보다는 마스터 둘이 전력면에서 압도적으로 우월했다. 그 둘이 사이가 좋지 않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으나, 설마 저 괴물을 앞에 두고 반목하지는 않겠지.

내가 체념하는 기색을 보이자 성녀의 설득은 더욱 가열차졌다.

이제는 은근히 내 팔을 끌어안고 가슴까지 맞닿게 할 정도였다. 이러면 내가 기분이라도 좋아질 줄 알았던 듯했다.

솔직히 말해, 기분이 좋긴 했지만.

분하다.

“이안, 제발 돌아가요… 다친 당신을 매번 치료해야 하는 제 마음이 어떤 줄 알아요? 더는 당신이 다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요.”

진심이 담긴 호소였다.

늘 도도하던 성녀답지 않게 솔직한 모습이기도 했다. 결국 나는 성녀에게 항복을 선언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알겠어요.”

“진짜죠?!”

성녀는 해냈다는 듯 주먹을 불끈 쥐며 내게 되물었다.

지금껏 보였던 모습들이 나를 설득하기 위한 연기라도 되는 양.

하여간 여우 같은 여자였다. 나는 떨떠름한 눈빛으로 성녀를 바라보다가, 이내 가라앉은 목소리로 미련을 털어놓았다.

“어떡하겠습니까. 단지 델핀 선배가 걱정…….”

“그 여자 이야기가 왜 나와요?”

그 서늘한 말소리에 주위가 얼어붙었다.

온기가 도망치듯 떠난 자리에 남은 것은, 나와 성녀뿐이었다.

그 연분홍빛 눈동자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가히 보석과 비견할 만했다.

다만 그 눈빛이 너무나 차가웠을 뿐이었다.

나로서는 당혹스러운 상황이었다.

그야 동료니까, 당연히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보다 더 깊은 관계를 맺긴 했으나, 어찌 됐든 내 말에는 문제의 소지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토록 차가운 반응이라.

나는 의아하다는 듯 성녀에게 반문하는 수밖에 없었다.

“동료를 걱정하는 건 지극히 상식적인 반응 아닙니까?”

“하지만, 뭔가 애틋한 느낌이 났는데요.”

눈치 하나는 귀신이었다.

성녀의 비상한 직감에 다소 식은땀을 흘릴 뻔했으나, 나 또한 대응할 수단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여태껏 여인들의 바가지에 너무나 시달렸던 참이었다.

나는 벼르고 있던 대로 약점을 들이밀기로 했다.

“근거 없는 소리로 몰아가지 마시죠… 그렇게 따지면, 성녀님은 성추행범입니까?”

“네, 네? 뭐라고요……? 서, 성추행?!”

성녀는 찔리는 바가 있었던지, 곧장 펄쩍 뛰며 나와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아르릉거리며 내게 반박하기 시작했다.

“무, 무슨 근거로요! 성추행범은 당신이잖아요! 지금까지 몇 번이나 제 몸을 만지작거렸는지 잊어버렸어요?!”

“하지만 눈을 뜨자마자 본 광경이…….”

“손은 대지 않았다고요!”

나는 어디 들어보겠다는 듯 팔짱을 낀 채 성녀를 응시했다.

어느덧 성녀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나름대로 억울한 사연이 있다는 투였다.

“엘시 그 계집애가 하도 우쭐해서 자랑을 늘어놓길래… 그,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건가 싶어서… 구, 궁금할 수도 있는 거 아니에요?!”

“하기야, 저도 늘 성녀님의 몸이 궁금하긴 했습니다.”

“또, 또 성희롱! 당신, 언젠가 종교재판에 회부할 줄 알아!”

그리운 대화였다.

이러한 평화도 나쁘지는 않았다.

버릴 것은 버리고, 내가 구할 수 있는 이들까지만 손을 뻗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 세상을 구할지도 모르지.

그럼에도 내 속내에는 변함이 없었다.

몰래 빠져나가야겠다.

마스터 둘이 온다고 했지만, 검공과 성자에게는 정보가 없었다. 더불어 내가 보았던 미래의 기억 속에서 살점 괴물은 상상 이상의 강함을 지니고 있었다.

최소한 마스터 하나가 공멸을 시도할 정도였다.

단 셋밖에 없는 마스터 중 하나를 이곳에서 잃을 수는 없었다. 엘프 마을에서 지내며 깨달은 바와 같이, 암흑교단의 계획은 수백 년이나 이어져 오고 있었다.

그 음모가 드러나는 판국에 귀중한 전력을 낭비하는 것은 악수였다.

단지 마음에 걸리는 점은, 성녀와 맺은 약속뿐.

성녀에게는 언제나 미안한 심정이었다.

매 맞는 아내를 바라보는 주정뱅이 남편의 마음이 이럴 터였다.

그렇게 내게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는 성녀를 뒤로 하고, 내 눈이 머리맡에 위치한 책상을 향했다.

내 시선이 움직이자 성녀는 의아하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 거기 뭐 있어요?”

“아니요, 그냥.”

나는 쓴웃음밖에 돌려줄 것이 없었다.

역시나 성녀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 피 묻은 편지지가.

내 눈이 더욱 깊이 가라앉았다.

**

내가 델핀 선배를 찾아가던 날.

여인은 유독 피로한 표정으로 나를 맞이했다. 파리한 안색임에도 불구하고 델핀 선배는 갖은 애를 쓰고 있었다.

주로 내게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해서.

"무슨 일이야?"

값비싼 포도주의 향기가 증기처럼 뇌리를 때렸다. 돌이켜 보면, 나는 언제나 어린애였다.

주로 충동적인 결정을 내린다는 점에서 그랬다.

결국 나는 델핀 선배를 도울 수밖에 없었다.

첫날 밤을 보내고, 처음으로 선배를 만나던 날.

“절 한 번만 믿어주시겠습니까?”

그리고 난 괴물 앞에 섰다.

검과 손도끼를 든 채로.

끓어오르는 살점이 앞에 있었다.

마지막 기회를 놓치고, 두 번째 전투.

이번이야말로 마지막일 것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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