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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382화 (382/649)

〈 382화 〉 5. 빵과 비수(80)

* * *

오랜만에 보는 델핀 선배는 여전히 매력적이었다.

한여름의 태양을 떠올리게끔 하는 금빛 머리카락과, 홍옥처럼 반짝이는 핏빛 눈동자. 티 없이 맑은 새하얀 피부와 오똑한 이목구비를 가진 여인이었다.

아름답지 않다면 이상했다.

고강한 정신을 가진 종교인조차 이 여인에게 음심을 품지 않을 수는 없으리라.

다만 오늘 마주한 델핀 선배의 안색은 다소 피로해 보였다.

한창 최전선에 있어야 할 시기였다. 그럼에도 델핀 선배가 자리를 비우지 못하는 까닭은 여러 가지가 있을 터였다.

예를 들어, 유르디나 후작의 배신이라든가.

병마에 시달리는 노인이 사실 암흑교단의 첨병이라는 사실을 믿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증인이 너무 확실했고, 이후에 받은 네리스 선배의 보고도 마찬가지였다. 한결같이 유르디나 후작의 수상한 행적을 지목하고 있었다.

유르디나 후작은 그다지 능력 있는 기사가 아니었다.

의지도, 인품도 있었으나 재능이 넘치지는 못했다. 무력을 숭앙하는 북부에서는 치명적인 결점이었다.

델핀 선배와 달리 그의 형제자매는 무려 여섯이나 있었다.

그중에는 유르디나의 탁월한 핏줄을 증명하는 이들도 존재했다. 그럼에도 유르디나 후작이 가문의 전권을 쥘 수 있었던 까닭은, 그의 실력이 어느 시점부터 폭발적으로 발전했던 덕이었다.

지금까지는 뒤늦게 꽃핀 재능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황녀의 증언을 듣고 보니, ‘하필’이라는 소리가 나올 만큼 절묘한 시점이었다. 유르디나 가문의 후계자가 결정되기 직전에 노력이 빛을 발하다니.

델핀 선배도 이 사실을 들어 알고 있을 터였다.

제 아비를 참해야 한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던 세리아는 결국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델핀 선배가 돌아왔으니, 마땅히 그 결정권 또한 델핀 선배에게 주어져야 했다.

지독한 고문이었다.

침엽수림의 기후는 혹독했다. 그 넓디넓은 나무의 바다를 헤치고 귀환한 직후에, 이토록 괴로운 결정을 내려야 하다니.

인간적으로 연민이 들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델핀 선배는 나와 하룻밤을 보낸 여인이 아니던가.

나는 말없이 술잔을 채우는 델핀 선배의 앞에 마주 앉았다.

허락은 필요하지 않았다.

델핀 선배는 쓴웃음을 지으며 나를 슬쩍 바라보았다.

그 와중에도 옅은 호선을 그리는 눈매가 매력적이었다. 그야말로 ‘요물’이라는 표현이 어울렸다.

“……무슨 일이야, 서방님?”

난데없는 호칭에 숨이 일순 턱, 하고 막혔다.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던 것 같은데, 머리가 단번에 새하얘졌다.

나는 헛웃음을 삼키며 델핀 선배에게 되물었다.

“서방님이요?”

“그래, 서방님… 틀린 말도 아니잖아?”

델핀 선배의 가녀린 검지가 쭉 뻗어졌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그리는 입가가 내 심장을 톡, 하고 건드리는 듯했다.

“내 몸은 그렇게 탐했으면서, 짐승.”

“마지막에 그만두려고 했던 기억이 분명…….”

“그게 더 최악이잖아. 즐길 대로 즐겨놓고, 끝은 보지 않겠다고?”

할 말이 없었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언제나 이랬다. 사내의 동정과 여인의 처녀는 동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순결을 잃은 여인에겐 언제나 죄인일 수밖에.

나는 입맛을 다시며 항복이라는 듯 두 손을 들었다.

“좋습니다. 서방님 하죠, 뭐.”

“무슨 선심 쓰듯… 후후, 아무래도 좋지만.”

무기력한 웃음소리였다.

짓궂은 장난으로 숨기고 있었으나, 델핀 선배의 속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통상적이라면 이처럼 내게 속내를 보이는 일은 없었다.

허나 그날 밤 이후 델핀 선배는 변했다.

어쩌면 그 이전부터 진행되던 변화가 그날을 기점으로 폭발했는지도 몰랐다. 다만 어느 쪽이든 간에 델핀 선배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미묘해졌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몸의 관계란 이토록 중요한 것인가.

흐느적거리며 술잔을 기울이는 델핀 선배의 모습이 처량했다. 그녀는 이마에 손을 얹은 채 허탈한 숨소리를 내뱉었다.

“……웃기지?”

“조금도 웃기지 않은데요.”

“나는 지금 내 꼴이 웃겨. 평생 상식이라 알고 지내던 모든 것이 붕괴하는 기분이거든. 그리고 또, 내가 무얼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어졌고…….”

그러면서 델핀 선배는 다시금 술잔을 채우려 들었다. 직전에 내가 그 손을 낚아채지만 않았더라면 말이다.

핏빛 눈동자가 우뚝 나를 응시했다.

나는 내 의도를 보다 직관적으로 이해시키기로 했다. 나는 델핀 선배의 잔에 술을 쪼르륵 따라내고는, 그 잔을 내 앞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단번에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포도주.

주향은 언제나 향긋했다. 갑작스러운 음주에 몸이 놀라긴 했으나, 어차피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이었다.

델핀 선배의 의아한 눈빛을 나는 옛 기억으로 받아쳤다.

“혹시 기억나십니까?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

“당연히 기억나지, 남자한테 처음으로 나체를 보였는데… 설마 그 남자가 처녀까지 가져갈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델핀 선배는 또 다시 은근슬쩍 첫날 밤의 이야기를 꺼냈다.

내 죄책감을 자극하고 싶은 건지, 혹은 자연스럽게 그 주제로 넘어가고 싶은 건지.

물론 나는 그 의도에 따라줄 생각이 없었다.

더욱 단단해진 목소리가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때 델핀 선배가 제게 잔을 권했었죠. 북부에서는, 하나의 잔에 술을 따라 마시면 동지가 된다고.”

델핀 선배는 입을 꾹 다물었다.

복잡한 심경이 담긴 눈빛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의외라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나도 왜 이 기억이 이토록 선명히 떠오르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내가 해야 할 말이 무엇인지는 확실했다.

“이제 우리는 동지네요, 델핀 선배.”

“……그게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알아?”

끝내 뱉어진 한 마디는, 술내음에 다소 달구어져 있었다.

델핀 선배는 이전보다 선명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북부에서는, 동지를 버리고 도망치는 병사 따위는 없어. 죽어도 살아도 한 목숨인 거야… 배신도, 도주도 할 수 없다고.”

현저히 낮아진 음색은 나를 위협이라도 하는 듯 느껴지기도 했다.

더는 발을 뺄 수 없다.

당신은 그럴 자신이 있느냐.

그래서 나는 도리어 쓴웃음을 지어야 했다.

겁 먹은 강아지를 보는 것만 같아서.

고독하고 외로워서 진정한 동지를 탐한다. 그럴수록 '동지'의 기준은 높고 까다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가지고 싶지만, 가질 수 없다.

그 체념이 델핀 선배의 목소리에서 은근히 묻어나오고 있었다.

당신도 마찬가지라는, 세상을 향한 조소.

하지만 그 말은 반대로 델핀 선배의 진심을 가리키고 있었다.

절망하고, 비웃고.

그럴수록 진정한 관계를 바란다. 무시당하고 배신당하는 것이 무서워서, 함부로 마음을 주지 않을 뿐이다.

그 속내는 정반대이리라.

부정을 넘어서는 확신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여인의 마음에는 정통하지 못한 나였다. 그럼에도 어째서인지, 지금은 델핀 선배의 속마음이 뻔히 보였다.

"그래도 괜찮겠어? 배신자의 딸이고, 북부는 그 죄로 궤멸하기 직전에… 그런데도 버리지 못해. 패배가 뻔한 싸움인데도……!"

"지금까지 그래오셨군요."

열변을 토하던 델핀 선배의 입이 단번에 다물어졌다.

무어라 말하고 싶었는지, 입술이 달싹이긴 했으나 그뿐이었다.

나는 내 추론에 더욱 확신을 더했다.

"그렇게 승리를 따내오셨습니까? 버리고, 배신하고, 속이고… 그래서 저한테 동일한 잣대를 적용하는 것 아닙니까? 믿을 수 없어서."

"……그게 나빠?"

델핀 선배의 목소리가 슬슬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닫힌 눈꺼풀 사이로 삐져나온 속눈썹도 마찬가지였다.

술에 취했구나.

고작 그 정도로 제 진심을 토로할 만한 여인은 아니겠으나, 그것이 요인 중 하나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델핀 선배는 묵은 공포를 토해내고 있었다.

스스로에게 던지는 변명이었다.

"평생 패배를 허락받지 못하고 살았어! 난 유일한 후계자고 북부의 태양이었으니까… 내가 무너지면 나 하나로 끝나지 않아. 북부의 모든 민중들이 내 행보를 하나하나……!"

"그리고 믿고 싶어서."

탁, 하고 술을 음미하다 던진 덧붙임이었다.

내 직전의 말에 이어지는 지적에 델핀 선배의 호흡이 잠시 멎었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전 아닙니다."

내 손이 조심스레 델핀 선배의 손을 향했다.

처음에는 망설이던 그녀었으나, 결국 내 손을 거부하지는 못했다.

흔들리는 핏빛 동공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오직 진심뿐.

"아내를 버리는 서방은 없잖습니까."

내 수줍은 고백에 델핀 선배는 아무런 맘도 돌려주지 않았다.

잠시 넋을 놓았다가.

피식 웃었다가.

이내 눈물을 맺은 이후에야, 이상한 미소를 지었다.

난생 처음 보는 웃음이었다.

마치 어린아이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델핀 선배는 활짝 웃었다.

"그래서 우리 서방님, 계획은 있어?"

"엘프들이 있답니다."

헛소리였다.

사실이긴 했으나, 포프 영감과 이샤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심지어 자세한 내용조차 기밀.

델핀 선배가 믿어줄 리가 없었다.

그래, 얼마 전까지였다면.

허나 델핀 선배는 쿡쿡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좋아, 마음대로 해봐."

그리고 주욱, 내 목젖을 훑으려 드는 델핀 선배의 검지.

고혹적인 미소가 시야 위로 떠올랐다.

"이기든 지든, 모르겠지만… 제발 죽지는 마. 나 미망인 만들 생각은 아니지?"

그러면서 은근슬쩍 옷매무새를 흐트러트리는 모양새.

밤은 뜨거웠다.

그리고 며칠 후, 준비를 마친 나는 살점 괴물 위에 섰다.

"세리아에 대해 조사해 주세요."

델핀 선배에게 남긴 마지막 질문을 떠올리며.

피 묻은 편지지.

그것이 유독 마음에 걸렸다.

결전은 이제 시작이었다.

내 몸이 땅을 박차고 쏘아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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