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3화 〉 5. 빵과 비수(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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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량한 벌판에는 눈보라가 치고 있었다.
악신의 권속이 강림했다는 증거였다. 마계는 영원한 겨울의 세계라서, 그곳으로 통하는 통로가 열리면 눈과 바람이 빗발치곤 했다.
그러지 않아도 춥고 건조하던 북부였다.
마계의 만년설을 흠뻑 뒤집어쓴 설원은 새하얗다 못해 기괴했다. 모든 것이 표백된 세계란 이토록 낯선 감이 있었다.
그리고 머나먼 지평선을 뒤덮고 있는 살점들.
끓어오르는 살점들은 끝없이 광선을 토해내고 있었다. 뱀 대가리가 지나치게 증식한 탓인지 위력 자체는 약해졌지만, 여전히 누군가의 생명을 빼앗기에는 충분했다.
지금은 아무도 살점 괴물을 자극하지 않았던 덕일까.
뱀이 토해내는 광선들은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빛의 기둥들이 연이어 회색의 세계에 구멍을 내며 쏴졌다.
그러다 보면 하늘이 열리기라도 한다는 듯.
천신에 대한 증오가 반영된 결과일지도 몰랐다.
숨을 내쉴 때마다 새하얀 입김이 흩어졌다. 그렇게 말없이 지평선을 응시하는 내 뒤로, 움츠러든 소녀가 하나 섰다.
암청색 머리카락과 연회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미인이었다.
제국 황실의 꽃, 제5황녀 시엔.
그녀는 내가 돌아온 이후 나와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다. 한동안 보이지 않던 죄의식이 그 연회색 동공에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묘한 열패감까지도.
일부러 자세한 사정을 캐묻지는 않았다.
때가 되면 황녀가 먼저 입을 여리라.
그 전까지는 최대한 황녀의 의지를 존중해 줄 생각이었다.
“이, 이안 경…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저 괴물은 너무 큰데…….”
“연락만 제때 하시면 됩니다.”
꾸욱, 하고 나는 황녀의 손에 자그마한 돌을 쥐여 주었다.
네리스 선배에게 받은 통신수단이었다. 내 귀 뒤편에 새겨진 마법 문자와 반응해서, 원거리에서도 내게 말을 전달할 수 있는 기능을 지닌 물건이었다.
편리한 만큼 비싸고 귀한 장치이긴 했다.
허나 내 등 뒤에는 제국 황실이 있었다. 최소한 제국 내에서는 용혈 문자로 불가능한 일은 많지 않았다.
황녀는 아직 망설이는 기색이었으나,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며 장치를 받아들었다.
내 뒤에 서 있는 이는 황녀뿐만이 아니었다.
“이안, 준비는 끝났어요.”
무척 떨떠름한 목소리였다.
내가 흘깃 시선을 옮기자, 그곳에는 부루퉁한 표정의 성녀가 서 있었다. 며칠 전 맺은 약속을 정면으로 위반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그 분노는 온당했다.
나로서는 할 말이 궁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내게는 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다.
오랜 인류와 엘프의 갈등을 해소하고, 증오 속에 파묻혔던 원혼들을 위로할 수 있는 기회였다.
내가 유일한 적임자는 아닐 터였다. 그럼에도 나는 이 길이 옳다고 확신했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억지에 어울려 주어 감사합니다, 성녀님.”
“흥, 마음에도 없는 소리.”
입술을 삐죽이며 던진 힐난의 말이었다.
나는 더욱 어색한 낯빛을 했으나, 이곳은 전별 장소였다.
끝까지 화난 체를 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결국 성녀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내 손을 두 손으로 꼬옥 쥐었다.
“이 빚은 꼭 받아낼 거에요. 알죠? 저 손해 보는 일 하지 않는 거… 그러니까, 반드시 살아 돌아와요.”
“채권이 부도날 일은 없으니 안심하시길.”
나는 일부러 허세를 부리며 그렇게 답했다.
사실 성녀가 빚을 어떻게 받아낼지는 두렵기는 했다.
그러나 이미 성녀에게는 수없이 많은 빚을 진 판, 어차피 성녀가 도움을 요청하면 거절할 도리는 없었다.
차라리 이렇게 성녀의 마음을 달래주는 편이 나았다.
뒤이어 마지막 순서.
세리아는 초조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이안 선배… 괜찮겠죠? 아니, 괜찮아야 해요. 제가 반드시 이안 선배를 지켜드릴게요.”
그 새파란 동공에 흐릿한 광증이 어려 있었다. 오므라들었다 펴지는 손가락이 그녀의 심정을 대변했다.
나를 잡아 가두기라도 하고 싶어 하는 모양새였다.
나는 피식 웃으며 한 마디를 하려다 그만두었다.
문득 피 묻은 편지지가 떠올랐던 탓이었다.
그리고 세리아의 출생에 얽힌 비밀까지도.
당장이라도 웃음기가 사라질 것만 같았다.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음영 없는 눈으로 나를 응시하는 세리아의 어깨를 토닥였다.
나의 손길에 세리아는 화들짝 제정신을 되찾았다.
아, 하고 터져 나오는 옅은 탄성.
나는 그제야 본론을 꺼냈다.
“군대는?”
“앗, 아아! 주, 준비됐어요! 언니께서 직접 제게 전권을 넘겨주셨으니…….”
“부탁할게.”
그것을 끝으로 내 몸이 땅을 박차고 쏘아졌다.
쭉 뻗어나간 신형이 풍경을 짓이겼다. 실선으로 이어지는 길목들이 하나의 목표를 겨누었다.
저 멀리 있는 살점 덩어리.
절제 없는 몸뚱어리가 이상을 눈치챌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가속, 가속, 그리고 또 가속.
땅을 딛고 박찰 때마다 내달리는 속력이 점점 더 빨라졌다. 그럴수록 끓어오르는 살점 위에서 나를 응시하는 뱀 대가리들이 많아졌다.
흉측한 몰골이었다.
수십, 수백, 어쩌면 수천에 이르는 뱀들이 나를 응시하는 광경이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나는 인사 대신 손도끼를 내던졌다.
팍, 하고 회색의 대기 속에 은빛 직선이 그어졌다.
핏물이 터져 나올 때까지도 뱀 대가리들은 반응이 없었다. 그만큼이나 고속으로 내던져진 도끼날은 매서운 기세를 죽이지 않았다.
하나, 둘, 셋.
아니, 그 이상의 뱀 대가리들이 차례로 터져 나가며 핏물과 살점을 흩뿌렸다. 손도끼의 힘이 약해질 무렵이면, 정중동의 묘리로 정방향의 힘을 더했다.
세상에 그어진 직선을 기준으로 터져 나오는 핏물.
괴물들은 그제야 비명을 터트렸다.
키에에에에에엑!
난데없는 습격에 당황할 만도 한데도, 뱀들의 반응은 신속했다. 아무래도 머리가 많다 보니 반응속도도 좋아진 듯했다.
그 외에는 전력이 열화된 느낌이기도 했지만.
‘축복’을 가진 엘프로 만들어진 뱀들과 비교하면 허약하기 그지없었다.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삼켜봐야, 그 재료로 만들 수 있는 뱀의 수준은 한정되어 있는 듯했다.
내게는 좋은 소식이었다.
검신을 두른 은빛의 오러가 맹렬히 타오르기 시작했다. 점점 더 응집하는 빛무리가 결정을 형성하기 직전이었다.
오러 개화가 가까워졌다는 신호였다.
아주 작은 한 걸음, 우연한 계기만 있다면 될 것 같은데.
나는 점차 조급해지는 속내를 숨기며 검신을 비틀었다.
그에 맞춰 쿵, 하고 옅은 진동과 함께 직선을 긋는 광선들.
뱀의 두개골이 폭발적인 빛을 내뿜었다.
허나 그들의 첫 공습은 그다지 훌륭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이미 일전에 대응법을 숙지해둔 뒤였다.
비전절기 '결'.
이 시대에 단 셋밖에 존재하지 않는 마스터 중 하나의 묘리가, 머나먼 북부에서 선보여지고 있었다.
키에에에엑!
캬아아아아악!
비명 소리와 함께 단숨에 주위의 뱀 대가리들이 지워진다.
개중에는 제 입의 광선으로 대항하는 녀석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광선이 부채꼴의 범위를 쓸어버리자 불타오르고 말았다.
화르륵, 타오르는 불길이 눈보라를 잡아먹었다.
그럼에도 아직은 역부족이었다.
뱀 대가리의 숫자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아무리 미세한 시차가 있더라도, 동시다발적으로 쏘아지는 광선들이 수십이었다.
이를 일일이 쳐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준비한 수가 있었다.
"……성녀님!"
비명처럼 외쳐진 소리가 닿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기가 막힌 시점에 내가 바라던 풍경이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하늘을 새하얗게 메우는 신성력의 광탄들.
엘프와 암흑교단의 연관점이 밝혀진 이후, 북부를 친히 찾아온 성국의 군대였다.
본래라면 최전선에서 싸워야 할 이들이었다. 그러나 내가 성녀를 설득한 끝에, 오늘은 우선 나를 후방에서 지원해 주기로 했다.
아무리 후방지원에 불과하더라도 성국의 군대는 강했다.
하물며 그 상대는 상극이라 할 수 있는 악신의 권속, 살점 괴물은 뱀의 입을 빌어 절규를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설령 몇몇이 살아남더라도 내 상대는 아니었고.
그렇게 베고, 으깨고, 죽이며 전진하기를 몇 시간.
나는 핏물에 젖은 앞머리를 밀어 뒤로 넘겼다.헐떡이는 숨소리와 박동하는 심장 소리가 머리를 웅웅 울렸다.
내 시선의 끝에, 그토록 찾아헤맸던 이가 보이고 있었다.
하반신이 융해되어 살점 덩어리와 결합한 중년의 사내.
그는 내 기척을 느끼자마자 눈을 번쩍 떴다.
"아아, 증오스럽다… 약육강식의 사회와 야만의 풍경! 약자를 착취하는 구조와 기득권층! 그리고 너희 모두가!"
동공을 잃은 눈빛이 금빛으로 타올랐다.
"이안 페르쿠스… 짙은 피 냄새가 나는구나! 얼마나 많은 피를 손에 묻혔지? 세상에 버림받은 자들의 피를!"
레오릭이었다.
나는 그제야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실로 간절히 마주하고 싶던 참이었다.
"오랜만이다, 개자식아."
피투성이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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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가신과 사병들이 출정한 유르디나 성은 고요했다.
정적에 잠긴 고성은 눈보라 속의 폐허처럼 보이기도 했다. 단지 존재만으로도 음산하고 쓸쓸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구조물.
그 안에서, 온기가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장소에 두 남녀가 섰다.
노쇠한 사내는 여인을 등지고 있었다. 창가를 두드리는 눈보라가 매서운데도, 그는 보이지도 않는 창밖의 풍경을 응시하고 있었다.
기나긴 침묵 끝에 노인이 입을 열였다.
"무슨 일이냐."
핏빛 눈동자가 흘깃 뒤를 향했다.
그곳에는, 마찬가지로 핏빛 눈동자를 지닌 여인 하나가 서 있었다.
"……내 딸아."
유르디나 후작과 델핀 유르디나.
야밤의 부녀상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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