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4화 〉 5. 빵과 비수(82)
* * *
차디찬 밤바람이 창문을 두드렸다.
노인이 깊이 가라앉은 핏빛 눈동자로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거센 눈발이 흩날리며 시야를 방해했지만, 그의 시선이 거두어지는 일은 없었다.
중병을 앓고 있는 노인이었다.
발병은 대개의 병이 그렇듯 스리슬쩍 이루어졌다. 어느 날부터 전조가 느껴지기 시작하더니, 수년에 걸친 투병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지난한 과정 끝에 사내는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가 일종의 불치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누구나 피해 갈 수 없는 그 질병의 이름은, 바로 ‘노화’였다.
한때 건장했던 사내의 몸 곳곳을 한기가 파고들고 있었다.
노인은 그 지당한 사실이 유독 서글펐다.
먼 옛날에는 이따위 추위쯤은 웃으며 떨쳐냈더랬지.
사실,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그럴 수 있었다. 아무리 몸이 노쇠하더라도 왕년에 이룬 경지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오늘따라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체념이라고 해도 좋았다.
어차피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었다. 추하게 발버둥 쳐봐야 임박한 현실이 달라질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순응하는 수밖에.
그리고 제 신세를 받아들인 노인의 일과는 하나뿐이었다.
과거의 늪에 스스로 빠져들어, 찬란했던 과거를 반추하는 것.
그마저도 최근에는 싫증을 느끼던 참이었다.
사내의 젊은 시절은 남들이 아는 만큼 빛나지 않았다. 도리어 그림자에 질질 끌려다니던 시절이라면 몰라.
언젠가 죗값을 치러야 하리라.
하지만 그날이 이토록 갑작스레 찾아올 줄은 몰랐다.
노인의 주름진 눈꺼풀이 망막을 덮었다.
호흡이 점점 더 가빠지고 있었다. 폐 기능이 망가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최후가 머지않았다.
노인은 그 사실을 내심 직감하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최근 들어 간지러운 소문이 들려오더구나. 네가 내 젊은 시절을 캐고 다닌다고… 내가 너를 그렇게 가르쳤더냐.”
“승리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마라.”
딸이 던진 화두에, 노인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말이었다.
먼 옛날에, 딸에게 어렴풋이 전한 적이 있었다. 유르디나의 숙명은 오직 승리뿐이라고.
허나 영원한 승리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승리를 위해서는 반드시 손에 피를 묻혀야 했다. 더러운 짓도 망설이지 않아야 했고, 그럼에도 패배를 피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었다.
그러므로 더더욱 수단과 방법을 가려서는 안 됐다.
‘패배’라는 오점은 타인에게 덮어씌우면 그만이었다. 유르디나의 발자국은 반드시 승리의 궤적이어야 했다.
유르디나의 운명이 곧 북부의 운명이었기에.
이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줄 알아야 했다.
남의 뒤를 캐고 다니는 일?
좀스러운 일조차 아니었다. 델핀의 목소리가 아직까지 당돌한 까닭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부터 마음에 품고 지냈던 말이에요, 아버님… 정확히 말하자면, 아버지께서 핸슨 영감을 제 눈앞에서 죽였을 때부터.”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구나. ‘핸슨’이라… 마굿간지기였던가?”
쓴웃음을 지으며 내뱉은 기억이었다.
델핀의 핏빛 눈동자가 더욱 깊어졌다. 옅은 적의마저 어린 낯빛이었다.
그날 이후, 델핀의 인생은 일변했다.
모두에게 사랑받던 활달한 소녀는 핸슨 영감과 함께 죽어버렸다. 승리에 집착하는 광인이 그 자리를 대신할 따름이었다.
그래, 적어도 이안을 만나기 전까지는.
아무리 혈육이라도 원망이 생기지 않을 리 없었다. 그만큼 그날의 풍경이 델핀의 뇌리에 남긴 상처는 컸다.
“내게도 안타까운 사건이었지. 그는 훌륭한 마굿간지기였으니까.”
“망설임이 없으시던데요… 굳이 핸슨 영감을 죽여야 했나요? 그것도 어린 딸이 보고 있는 앞에서.”
“그건 네가 정하는 게 아니다, 내 딸아.”
담담했으나 그 이상의 무게가 담긴 목소리였다.
회한에 젖은 음색이 델핀의 고막에 쓰디쓴 울림을 남겼다.
“내가 말하지 않았더냐? 너에게는 책임을 질 자유조차 없다고… 너는 유르디나야. 북부의 온 민중이 너를 태양이라 생각하지. 네 실수도, 패배도 결국에는 아랫사람이 대신 짊어지는 수밖에…….”
“그러는 아버지께서는?”
이제는 유르디나 후작이 침묵을 지킬 차례였다.
노인을 바라보는 여인의 시선이 날카로웠다. 흐릿한 등불이 일렁이며 불그림자를 곳곳에 드리우고 있었다.
그 어둑한 조명 사이에서도 핏빛 눈동자는 선명했다.
델핀은 씹어뱉듯이 말을 이어갔다.
“아버지도 그러셨나 보죠? 지금까지 가신과 부하들을 하나하나 팔아치우고, 그렇게 질기게 영광을 누려서 기쁘셨나요?”
“……오늘따라 무례가 과하구나.”
“아니요, 무례가 아니에요. 유르디나의 차기 당주는 저니까!”
드물게도 흥분한 기색이었다.
오래 전 파묻어 두었던 감정들이 색을 되찾고 있었다. 열기와 함께 토해지는 고백들은 차라리 호소에 가까웠다.
델핀 또한 피와 살로 빚어진 인간이었다.
제 아비를 의심해야 하는 상황이 달가울 턱이 없었다. 그 혼란스러운 심정이 델핀의 평정을 마구 뒤흔들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아버지는 늘 괴로운 얼굴이었어요. 단 한 번도 행복해 보인 적이 없었죠… 도대체 무슨 짐을 짊어져야 했길래?”
“델핀…….”
“누군가 의도적으로 엘프에 대한 정보를 틀어막고 있어요. 그런데 알렉스는 들어본 적도 없는 곳에서 단독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고 하더군요. 그것도 엘프들의 마을에서……!”
“델핀!”
버럭 터져 나오는 호명에 델핀의 입이 다물어졌다.
노인은 어느덧 등을 돌린 채였다. 아직 생기를 잃지 않은 핏빛 눈동자가 델핀을 노려보고 있었다.
쏟아져 내리는 달빛의 세례가 찬란했다.
한동안 말없이 델핀을 바라보던 유르디나 후작은, 이내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알아봐야 좋을 것 없는 일이다. 최근 들어 그 살점 괴물 탓에 심란한 듯한데… 내게 맡기거라.”
느닷없는 제안이었다.
델핀은 여전히 경계심이 어린 눈빛으로 후작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든 말든 노인의 설득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승리하게 해주마.”
우뚝, 하고 델핀의 몸이 굳은 것은 그때였다.
너무나 달콤한 제안이었다.
그 계기는 불행했을지언정 일평생을 추구해 온 가치였다. 그에 대한 집착을 쉽사리 져버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특히나 더는 돌파구가 보이지 않던 때라면야.
문득 델핀의 머릿속을 어느 사내가 스치고 지나갔다.
이안 페르쿠스.
그는 지금쯤 최전선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을 터였다. 자세한 계획은 듣지 못했지만, 솔직히 말해 가망이 없는 전투였다.
후작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그를 구할 수 있을까?
난생 처음으로 해보는 계산이었다.
우스운 꼴이었다.
그 천하의 델핀 유르디나가 사내 하나를 두고 갈등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북부의 운명을 결정 지을지도 모르는 자리에서.
불과 몇 달 전의 델핀에게 말했으면 코웃음조차 치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이는 엄연한 현실이었다.
“온갖 군대를 끌어모으고 있지만 사정이 좋지 않더구나. 그나마 이안 페르쿠스, 그 친구가 출정을 한다고는 들었지만… 마스터가 아닌 이상 홀로 열세를 뒤집을 수는 없다.”
지극히 온당한 주장이었다.
델핀은 내심 후작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상식을 가진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찬가지의 결론을 내릴 터였다.
이안은 강하다.
그러나 전쟁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를 뒷받침하는 수많은 병력이 필수적이었다. 그리고 규모의 싸움에서 영웅의 역할은 제한적이었다.
사기를 높인다거나, 기세를 탄다거나.
전력이 엇비슷할 때나 노려볼 법한 요행이었다. 북부가 상대해야 할 괴물은, 수없이 많은 엘프를 잡아먹고 탄생한 신화 속의 존재였다.
델핀의 입술이 절로 짓씹어졌다.
“승리해라, 델핀.”
그 한 마디가 묵직이 델핀의 심장을 짓눌렀다.
승리할 수 있다고?
이야기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명료했다.
“난 어차피 곧 죽을 몸이다. 그러면 넌 유르디나를 이어받게 되겠지… 그 전까지 저 괴물은 내가 억제해 보마. 그때까지 차차 전력을 재정비하면 승리할 수 있어.”
“……어떻게 억제한단 말씀이시죠?”
“네가 알 필요가 있느냐? 중요한 건, 네가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뿐.”
노인은 뒷짐을 지며 다시금 등을 돌렸다.
단지 그 핏빛 눈동자만은 아직도 델핀을 향하고 있었다.
“승리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마라.”
오늘만 두 번째로 내뱉어진 말이었다.
다만 그 화자가 달라졌을 뿐이었다. 델핀에서, 후작으로.
여인은 조금 전의 후작처럼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시선을 돌리고, 이를 악물고.
수십에서 수백이나 되는 번민들이 델핀의 뇌리를 통과하고 있었다. 덜그럭거리는 소음이 들려오는 듯한 환청까지 일 정도였다.
그러기를 한참.
결국 델핀은 결론을 내렸다.
“……싫어요.”
“왜지?”
의외로 후작은 당황하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단지 순수한 의문이 담긴 목소리로 되물었을 뿐이었다. 정말로 그 연유가 짐작이 가지 않는다는 듯.
그 또한 승리에 집착하며 살아왔던 인물이었다.
델핀의 극적인 변화를 이해할 수는 없을 터였다.
그래서 델핀은 일부러 후작을 설득하려 들지 않았다.
“서방을 버리는 아내는 없으니까.”
다만 언젠가 사내에게 들었던 말을 재생했을 뿐.
그 대답에 유르디나 후작은 처음으로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그야말로 얼이 빠진 기색이었다. 한참이나 후작은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얼마 후.
가까스로 정신을 되찾은 후작은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크크큭, 딸 키워봐야 소용없다더니… 좋아,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구나.”
그 말을 신호로 노인은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망설임 없이 나아간 그의 발걸음이 다다른 곳은, 진열대에 수도 없이 장식된 검들의 앞.
후작은 그중 하나를 집어 델핀에게 내던졌다.
그 검이 탁, 하고 묵직한 충돌음을 내며 주르륵 미끄러졌다. 델핀의 발끝을 톡, 하고 건드릴 때까지.
노인은 사나운 미소를 지었다.
“북부의 방식대로 하자.”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진검승부.
델핀은 저도 모르게 긴장한 낯빛을 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 제안을 꺼내는 후작은 실로 오랜만에 기억 속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므로.
패배를 모르던 북부의 사자다운 기세였다.
반면, 후작은 내심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망할 도둑놈.
본래라면 이 검극이 겨누어야 할 대상은 그놈이어야 했다. 애지중지 기른 후계자를 낼름 삼켜버린 원수였으니까.
허나 그 못난 애송이도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닫고 말 것이다. 어차피 전쟁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혼자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그래, 혼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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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안을 마주한 레오릭은 몇 분만에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이, 이안… 이안 페르쿠스으으으! 가진 자들의 선봉이여!”
하늘에서 광탄과 화살이 빗발치고 있었다. 이따금씩 내리꽂히는 벼락이 매캐한 살내음을 풍겼다. 결코 홀로 연출할 수 있는 풍경이 아니었다.
레오릭이 저주를 퍼붓고 있는 당사자는 그 참상에서 몇 걸음 정도 물러나 있었다.
팔짱을 낀 채로, 이안은 생각했다.
인생은 실전이야, 좆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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