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7화 〉 5. 빵과 비수(85)
* * *
엠마가 내게 건네준 시약의 효과는 단순했다.
특정한 마력을 감지하면, 해당 마력의 소유자가 이동한 궤적을 표시해 준다.
단순하지만 유용한 효능이었다.
물론 이를 만들기 위해서 온갖 재료와 시행착오를 지나쳤을 터다. 그럼에도 엠마는 날밤을 지새우면서까지 이 물약을 완성해 냈다.
나를 구해야 했으니까.
엠마에게는 언제나 고마운 마음뿐이었다.
그 덕에 오늘, 나는 이 물약으로 북부를 구하려 들 수 있었으니까.
참 절묘한 우연이었다.
지반에 흩뿌린 물약이 흐릿한 잔흔을 남기며 궤적을 그리기 시작했다. 나는 설원 위로 서서히 번져 가는 색조를 따라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내 뒤편에서 군대가 움직이고 있었다.
포프 영감이 무슨 수단을 동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호언장담했던 대로 살점 덩어리의 세력은 급격히 약화되고 있었다. 한때는 침엽수림을 전부 집어삼켰던 그 흔적조차 찾기가 힘들었다.
만일 엠마의 시약이 없었다면 나 또한 다소 고생을 겪었으리라.
그럼에도 살점 덩어리가 휩쓸고 지나간 참상은 아직 여실했다.
그 넓디넓었던 침엽수림에 남아있는 나무가 많지 않았다. 드문드문 자라난 나무들은 숲이라기보다 황량한 벌판을 연상케 했다.
마냥 나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 덕에 군대가 움직이기는 편해졌으니까.
물론 무지막지한 이점까지는 아니었다.
살점 덩어리는 마구잡이로 주위의 생명을 먹어치운다.
그러면서 점차 제 몸집을 불려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타고난 힘도 더욱 강해지는 듯했다.
즉, 어중이떠중이를 데려가 봐야 소용이 없다는 뜻이었다.
살점 괴물의 먹잇감만 늘려주는 꼴이 될 테니까.
그러니 군대는 최후의 수단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마지막에 기댈 수 있는 존재는 오직 나 자신밖에 없었다.
그래, ‘나’.
나는 걸음을 옮기며 생각에 잠겼다.
여태껏 지나온 날카로운 삶의 궤적들이 자갈처럼 내리깔렸다.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뭉툭한 통증이 꾹꾹거리며 일었다.
어느 날의 기억들이 먼지처럼 부유한다.
개중에는 나를 힐난하는 말도 있었다.
예를 들어, 한 톨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냉막한 목소리.
“밑바닥을 보고 와라.”
내 모습을 한 사내가 던진 조언이었다.
늘 그랬듯이, 사내는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어설픈 동정심과 편협한 사고로는 알지 못하는 세상이 존재했다.
엘프 마을에서 머물렀던 며칠, 나는 그 사실을 깊이 깨우쳤다.
아직 나는 한참이나 모자라다는 사실을.
내가 모르는 삶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돌이켜 보면, 레오릭도 내게 일갈했던가.
“이안 페르쿠스, 그대가 진정으로 약자인 적이 있었나? 단지 적선하듯 선의를 베풀었을 뿐! 당신은 기득권의 앞잡이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는 제국의 귀족이자 인류의 영웅이었다.
단 한 번도 끼니를 걱정해 본 적이 없었고, 나름 풍족한 배경에서 자라왔다.
따라서 레오릭의 비난은 정당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헐떡이는 숨소리가 거칠다. 전력질주를 반복한 몸뚱어리가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산소가 부족해질수록 시야는 흐릿해진다.
이명이 들려오고, 멍한 정신 사이로 부상하는 피 묻은 편지지가 하나.
그곳에 적혀 있던 글귀들이 토막 나 뇌리를 파고들었다.
‘눈과 얼음의 땅을 아시나요?’
‘이곳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아요, 선배. 하지만 누군가는 이곳에 남아있어야만 하죠. 칠죄성의 힘은 일종의 저주와 같거든요. 절대로 사라지지 않고, 누군가는 그 죄를 감당해야만 하죠.’
‘죄 많은 피를 이은 제가 마땅히 짊어져야 할 몫입니다.’
죄 많은 피?
내 후배에게는 어떠한 잘못도 없었다.
단지 부모를 잘못 만났을 뿐이었다. 탄생조차 죄악인 삶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죄인을 자처하고 있었다.
레오릭을 괴물로 만든 저주, 그것을 ‘칠죄성의 힘’이라고 칭하면서.
누군가는 그 지독한 죄업을 감당해야만 한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선배. 아시다시피 제 몸의 반절은 괴물이잖아요. 아직까지 폭주할 기미는 없어요.’
‘다만 때때로 꿈을 꾸곤 해요. 제가 이 땅에 갇히기 1년 전, 선배와 함께 다니던 날의 꿈을…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이지만, 언젠가 꽃이 핀 정원을 선배와 함께 걸을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나는 눈보라를 헤치며 걷고 걸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편지가 가리키는 운명은 너무나 명확했다.
어느 소녀의 암울한 미래였다.
내 후배는 침엽수림보다도 북쪽, 눈과 얼음만이 존재하는 세계에 격리되어야 한다.
그것도 단 1년 남짓의 유예기간 끝에.
피투성이 편지에 새겨진 비극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선배, 부탁이 하나 있어요.’
편지의 활자들은 잉크가 아닌 핏물로 적혀 있었다.
담담한 필체 속에서 유독 거칠게 쓰인 문장들이 눈에 띄었다. 이를 악물고 억지로 쓴 흔적이었다.
‘점점 이상한 소리가 들리고 있어요. 어젯밤에는 검은 그림자를 봤답니다. 점차 제가 아니게 되어가는 것만 같아요. 어제는 왼손의 손가락을 하나 깨물어 먹었거든요. 그 다음에는 둘, 그 다음에는 셋… 더, 더 많이. 더 많은 피가 필요해요.’
광증이 여실히 묻어나오는 글귀였다.
나는 이 무렵에서 왜 미래에서 온 내가 그 편지를 일부러 숨겼는지를 깨달았다.
편지의 미래를 따르면, 나는 북부의 괴물을 물리칠 수 있다.
그러나 그 미래의 이면에는 어느 소녀의 희생이 전제되어야 했다.
그는 애초에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이러한 결말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사실을.
정확히 말하자면, 이해하지 못했는지도 몰랐다.
애초에 죄인으로 태어난 삶을 상상이나 해보았겠는가.
짧은 식견, 여실한 무지.
적선처럼 던져왔던 동정과 연민.
그것이 세간에서 ‘영웅’이라 불리는 나의 실체였다.
‘그러니 언젠가 절 토막 내 주세요.’
오늘도 나는 해답 없이 걸음만 옮기고 있었다.
‘어차피 죽지 않는 몸입니다. 사지를 토막내고 나누어 얼음 속에 파묻어 주세요. 부디 제가 더 많은 죄를 짓지 않게 해주세요.’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아끼고 사랑하는 후배였다.
늘 싸늘한 낯빛만 하고 있다가, 이제야 이따금씩 따스한 미소를 보여주는 소녀를.
내가 어떻게.
편지의 말미에는 선명한 핏빛 글자가 남아 있었다.
내 망막을 찢어버리기라도 할 듯 강렬한 색조의 글귀였다.
‘당신을 사랑하는 후배, 세리아로부터.’
으득, 하는 소리와 함께 피비린내가 풍겼다.
짓씹은 입술에서 핏물이 줄줄 흘렀다. 그 통증을 기점으로 점차 내 시야가 트이기 시작했다.
저 멀리에서 보인다.
살점덩어리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고, 그 주위로 의식을 잃은 엘프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괴물이 부피를 줄이며 지금껏 먹어치웠던 엘프들을 토해낸 모양이었다.
정작 끓어오르는 살점 위에는 네댓 명의 엘프들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서 멍하니 넋을 놓고 있는 레오릭과 함께.
나는 일부러 힘껏 땅을 딛고 섰다.
새하얀 입김과 함께 이글거리는 목소리가 뱉어졌다.
“……레오릭.”
내 손이 검의 손잡이를 더듬었다.
아직 망설임이 끝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내가 레오릭을 죽이는 것이 옳은가?
그는 용서받지 못할 악행을 저질렀다. 그의 손에 의해 수많은 생명들이 증오를 부추기며 서로를 해쳤다. 당연히 그를 죽여 정죄함이 마땅했다.
그럼에도 내 갈등은 끊이지 않았다.
내가 레오릭을 죽이면 세리아는 어떻게 되는 거지?
인간과 엘프의 전쟁은 끝이 났다. 레오릭이라는 구심점을 잃은 엘프들은 다시금 삶의 희망을 잃고 살아가야 할지도 몰랐다.
제 동족이라도 먹는 삶이 더 나을 수도 있었다.
예전에는 단 한 번도 떠올리지 못한 관점이었으나, 엘프의 식량 사정이 얼마나 열악한지는 이미 경험한 뒤였다.
만일 이대로 레오릭이 얌전히 침엽수림에만 머물러 준다면.
그러면 세리아가 희생하지 않아도 된다. 유르디나 가문을 델핀 선배가 장악한다면 앞으로 인류와 엘프 사이의 다툼도 사라질 터였다.
잘하면 나중에 인류와 엘프가 서로 교류하며 사정이 나아질 수도 있겠지.
그러한 자기합리화가 스물스물 내 심장을 좀먹어 가고 있었다. 이기적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잡념으로 가득찬 사고가 정지한 것은, 어떤 소녀가 내뱉은 소음이었다.
“쿨럭!”
레오릭의 주위에 흩어진 엘프 중 하나였다.
회색의 머리카락에 푸른 눈동자가 돋보이는 어린아이였다.
나는 단박에 그 아이의 정체를 깨달았다.
내가 구하지 못했던 아비앙의 여동생, 베티였다.
아무래도 포프 영감이 동원한 수단이 유효했던 듯했다. 베티처럼 한참 전에 삼킨 엘프마저 괴물이 뱉어내야 했단 점만 봐도 그랬다.
나는 새삼 포프 영감에게 감사를 표했다.
돌아가면 반드시 술 한 잔 대접해야지.
베티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기 직전, 황급히 다가선 내 팔이 소녀를 부축했다. 베티는 힘없이 얕은 호흡을 토해내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요양이 급선무로 보였다.
다행스럽게도 내 뒤를 쫓고 있는 것은 군대뿐만이 아니었다. 세리아를 비롯한 몇몇 동료들이 내게 달려오고 있을 테니, 그중 하나에게 베티를 맡기면 될 터였다.
울음 섞인 애원이 짜내어진 것은 그때였다.
“야, 약…….”
나는 무슨 소리냐는 듯 물끄러미 베티를 내려다보았다.
혹시 치료약을 달라는 걸까?
그러나 베티가 풀린 혀로 중얼거린 내용은, 너무나 상상 이상이라서.
“약, 주세효… 기분 조하지는 약, 레오릭 니이이임…….”
내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뚝, 하고 끊기는 소리가 났다.
메마른 몸은 뼈가 앙상했다. 영양 섭취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이 자그마한 계집아이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한참을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레오릭의 입이 열렸다.
“오오, 불쌍한 베티… 불치병에 시달리느라 매일 밤 잠도 자지 못했지. 안심하십시오, 자매여. 그 고통을 조금이나마 줄여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폭발하듯 하늘 위로 솟구치는 살점의 촉수들.
끓어오르는 살점에서 솟구친 징그러운 살덩이가 베티를 노리고 꿈틀거렸다. 슬그머니 다가가, 다시 집어삼키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그에 대한 내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팍, 하고 세상에 새하얀 실선이 그어진다.
이를 기점으로 핏물이 터져 나오며 새하얀 설원을 물들였다. 살점의 촉수들은 움츠러들며 맹렬한 통증을 호소했다.
몇 가닥의 촉수가 더 솟구쳐 오른다.
나는 베티를 조심스레 땅 위로 내려놓고, 소녀를 향해 날아드는 촉수들을 모조리 쳐냈다.
팍, 팍, 팍!
핏물이 터져 나올 때마다 철퍽이며 절단된 촉수가 땅 위로 떨어졌다.
본체로부터 분리된 후임에도 꿈틀거리는 촉수의 몰골은 심히 보기 좋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내 앞에 굴러다니던 촉수 하나를 으직, 하고 짓밟았다.
그러자 빳빳히 몸을 굳히며 더욱 발광을 하는 토막 난 촉수.
그제야 멍하니 땅을 향하고 있던 레오릭의 눈이 나를 향했다.
그 틈을 놓칠 내가 아니었다.
땅을 박찬 내 몸이 고속으로 쇄도했다. 대기를 찢어발기며 쏘아진 칼날이 레오릭의 지척까지 파고들었다.
캉!
날붙이와 피륙이 맞부딪혔다고는 믿기지 않는 충돌음이었다.
레오릭은 본능에 따라 팔을 휘둘렀고, 힘의 대치가 시작되었다.
중년의 사내가 흐릿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오, 이안 페르쿠스… 가련한 자여. 아직도 당신이 정의라고 믿습니까?”
“몰라!”
카각, 하고 칼날을 비틀자 그 방향을 따라 레오릭의 팔이 빗겨 나갔다.
그 틈새를 파고들며 다시 한 번 참격.
레오릭의 어깨에 틀어박힌 칼날이 더는 들어가지를 않았다. 레오릭은 그 사이 남은 팔을 휘둘렀고, 나는 검을 그대로 둔 채 물러났다.
무기는 아직 하나가 더 남아있었다.
손도끼.
내가 빛살처럼 도끼를 내던지자, 레오릭은 고민조차 하지 않고 한 걸음을 내딛었다.
검조차 베어내지 못한 몸뚱어리였다.
고작해야 손도끼 따위로 치명상을 입힐 수는 없었다.
그래, 손도끼 하나로는.
다음 순간, 피분수가 솟구치며 레오릭이 비명을 내질렀다.
“이게 무슨… 크아아아아악!”
내던진 손도끼가 노리고 있던 것은 레오릭이 아니었다.
레오릭의 어깨에 틀어박혀 있던 검을 후려쳤던 것이다.
그리고 정중동의 묘리에 따라, 연달아 망치처럼 칼날을 내리치는 도끼날.
캉, 캉, 캉!
3번의 소음이 울린 끝에, 레오릭은 가슴이 반쯤 베어져 무릎을 꿇었다.
잘려나간 가슴에서 핏물이 울컥울컥 쏟아지고, 눈과 입에서도 핏물이 흘러넘쳤다.
그는 발악이라도 하겠다는 듯 내게 팔을 뻗었다.
내 발길질이 레오릭의 머리를 강타하기 직전까지는.
콱, 하고 두부를 강타당한 레오릭의 몸이 옆으로 허물어졌다. 나는 그 사이에 레오릭의 몸에서 검과 도끼를 뽑아냈다.
“나, 검술학부라서 멍청하거든. 그러니까…….”
레오릭의 몸이 녹아내리듯 끓어오르는 살점 아래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다시금 나타난 레오릭은, 수많은 의체를 지니고 있었다.
무엇이 본체인지 모르게 하려는 수작이었다.
그래봐야 소용없는 짓이었지만.
나는 슬쩍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일단 죽자.”
대책은 이미 세워둔 뒤였다.
익숙한 기척들이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