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8화 〉 5. 빵과 비수(86)
* * *
검과 피가 춤을 춘다.
어느덧 석양이 내려앉은 설원에는 살벌한 연무가 벌어지고 있었다. 비록 사내 둘이 서로의 목숨을 취하려 애쓰는 추레한 몸짓이었으나, 무용이라면 무용이었다.
이보다 찰나에 맞물리는 춤이 있을까?
몇 개의 촉수 다발이 살점에서 솟구쳤다. 송곳처럼 날카로운 끝이 나를 겨누었다.
그리고 단박에 쏘아지는 촉수들.
나라고 얌전히 당해줄 생각은 아니었다.
내 검에서 은빛 검광이 폭사되자, 조각난 촉수 다발 사이로 핏물이 터져 나왔다. 그 틈새를 노리고 중년의 사내 하나가 내 품을 파고들었다.
레오릭이었다.
본체인지, 의체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마도 의체일 터였다. 본체를 앞장 세우는 멍청한 짓을 굳이 할 리는 없었으니까.
내달리던 힘을 그대로 실은 발길질이 내 허리춤에 작렬했다.
쿵, 하고 살과 뼈가 떨린다.
검면을 세워 막아냈지만, 그 충격량마저 완전히 상쇄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중얼거리며 살점 위를 주르륵 미끌어졌다.
끓어오르는 살점은 마치 엉겨붙듯 내 발목을 잡아채려 하고 있었다.
재빨리 살점을 박차고, 두어 걸음 뛰듯이 후방으로.
그러자 레오릭의 수많은 의체들이 곧장 두개골을 떨며 입을 벌렸다.
마치 내가 그러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아아아아아아아아!
전구처럼 하나둘씩 새하얀 빛을 토해내기 시작하는 머리들.
나는 다급히 검에 오러를 응집시켰다.
결(?).
검면이 거울처럼 내질러진 광선을 반사시켰다. 각도를 조절하며 주욱, 하고 주위를 광선으로 훑어내자 몇몇 레오릭의 의체가 불에 타며 지글거리는 소리를 냈다.
끔찍한 탄내였다. 시체가 익으며 내는 냄새는 언제 맡아도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나는 헐떡이며 숨을 골랐다.
슬슬 지치고 힘들었다. 반면 레오릭은 아직도 쌩쌩하다는 듯, 몇 개나 되는 의체의 입을 벌려 고함을 내질렀다.
“무, 용, 하, 다!”
“그것도 이제 슬슬 질리니까… 닥쳐!”
다시금 내 발이 땅을 박찼다.
그러나 나는 온전히 레오릭에게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 내가 기다리고 있던 연락이 오지 않은 탓이었다.
이제 슬슬 도착할 때가 됐는데.
그러한 내 기대에 보답하듯, 곧장 내 귀에 걸치고 있던 마도구에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은밀하고 작은 소리였다.
[이, 이안 경! 무사하세요?! 이제 도착했어요!]
“세리아는?”
[옆에 함께 있어요!]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좀 전황이 풀릴 기미가 보였다.
물론 그러는 와중에도 레오릭은 얌전히 있지 않았다. 두 체의 의체가 내게 달려들며 주먹과 발을 각각 내질렀다.
단순한 박투술처럼 보이지만, 그 위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악신의 힘을 받아들인 레오릭의 신체는 강했다.
단순한 주먹질과 발길질만으로도 포탄에 비견되는 위력을 낼 정도였다. 나는 이를 악물고 유지하고 있던 ‘결’로 두 의체의 공격을 쳐냈다.
캉, 하고 맑은 소리와 함께 검과 충돌한 손가락과 발가락이 으스러진다.
그리고 이어지는 해(?).
칵, 하고 틀어박힌 칼날이 빛의 수평선을 그었다.
전력을 다한 탓에 두 팔의 근육이 뻣뻣이 수축했다.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저항감조차 느끼지 못했을 정도였다.
레오릭의 두 의체가 반토막이 나 흩어졌다.
그제야 여유를 되찾은 나는 헐떡이면서 요구사항을 전달했다.
“세리아는 최대한 빨리 지원하고, 황녀 전하께서는 그 ‘눈’을 좀 떠주십시오.”
[‘눈’이요?]
“네, 그거 있잖습니까… ‘용의 눈’인지 어쩌고 하던 그거! 어서요!”
내 재촉에 마도구 너머로 허둥지둥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 성과는 얼마 지나지 않아 드러났다.
세리아가 날 듯이 달려 내 뒤로 착지한 것이다. 철퍽이는 살점 위였으나 자그마한 소음조차 일지 않았다.
그 깔끔한 착지 직후, 세리아는 초조한 낯빛으로 내 손을 붙잡았다.
“이, 이안 선배… 괜찮으세요? 숨소리가 심상치 않은데, 그리고 온통 피투성이……!”
“내 피 아니야.”
사실 내 피도 조금 섞여 있긴 했지만, 일부러 이를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세리아의 손은 여전히 덜덜 떨리고 있었던 탓이었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이안 선배의 피는 깨끗한 냄새가 난단 말이에요… 이 역겨운 괴물의 것과는 달리.”
무슨 헛소리야, 라고 말하려다가.
나는 세리아의 비밀을 떠올리곤 쓴웃음을 지었다.
내 눈이 흘깃 저 뒤에 내려놓았던 베티를 향했다.
회색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
왜 진작에 깨닫지 못했을까.
나는 채찍처럼 날아드는 살점 촉수를 쳐내면서, 세리아에게 힘주어 말했다.
“세리아, 너 나 믿냐?”
“네, 네?”
이제는 세리아가 얼빠진 소리를 낼 차례였다.
한시가 급한 마당에 답답한 노릇이었으나, 나는 일부러 세리아를 채근하지 않았다.
그만큼 중요한 일이었으니까.
“너 나 믿냐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날 의심하지 않을 수 있냐는…….”
“다, 당연하죠!”
세리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 목청을 높였다.
도리어 내가 추궁을 당하는 모양새였다.
흥분으로 달구어진 목소리가 토해졌다.
“제가 어떻게 이안 선배를 의심하겠어요? 맹세컨대 단 한 번도 그런 적 없어요. 당장 죽으라고 해도 죽을 수 있다고요! 도대체 절 뭐라고 생각하셨길래…….”
“너 괴물 아니다.”
단 한 마디.
난데없는 소리에 세리아의 눈빛이 멍청해졌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당연한 반응이겠지.
팍, 하고 날아들던 촉수 하나가 은빛 오러에 쪼개졌다. 떨어진 촉수가 발광을 시작했으나, 나는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이제는 익숙해진 광경이었다.
지금은 더 중요한 이야기가 남아있었다.
“의심하지 않는다고 했지? 그러니까 무조건 내 말 믿어라.”
“그, 그야 그렇죠. 그런데 그게 무슨 소리……?”
“그리고 절대로 너 혼자 짊어지게 두지 않아.”
세리아는 더욱 아리송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장은 사정을 설명해 줄 수 없었다.
이는 전적으로 유르디나 가문의 비밀이었다. 외인인 내가 나서서 진실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설령 이를 밝히더라도 그 주체는 유르디나 가문의 후계자인 델핀 선배가 되어야 했다.
그럼에도 나는 강한 의지를 담아 재차 강조했다.
“그러니까 쓸데없이 너 혼자 희생하려 하지 마. 무슨 일이 있으면 반드시 나나 델핀 선배한테 상담하고, 또 함부로 내 곁에서 떨어질 생각도 하지 말고…….”
“그, 그만!”
세리아는 내 이어지는 잔소리에 울상을 지으며 그렇게 외쳤다.
다소 억울해 보이는 눈치였다.
아무래도 내 당부의 말이 많이 부끄러웠던 듯했다.
“이안 선배, 전 아이가 아니에요. 그렇게 하나하나 당부하실 필요 없다고요. 그리고 또 하나 말씀드리자면, 전 이안 선배의 곁을 떠날 생각이 전혀…….”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야.”
나는 진정하라는 듯 세리아의 회색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렸다.
전투는 여전히 소강 상태였다.
날아드는 족족 촉수가 잘려나가고, 의체까지 터져 나가자 레오릭도 전황을 관망하기로 한 듯했다. 물론 짧은 기다림일 테고, 세리아의 전력을 파악한 뒤에는 다시 습격이 이어지겠지.
그 찰나의 말미 속에서, 나는 세리아에게 말했다.
“절대 멋대로 사라지지 마, 세리아.”
몇 번이나 들어 질릴 만도 한 말이었다.
그럼에도 세리아는 굳이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기분이 좋았던 듯했지만.
오히려 반발은 다른 곳에서 일어났다.
[저, 이안 경? 그래서 우리는 무얼 해야 할까요?]
은근한 불만이 느껴지는 음색이었다.
귀에 걸친 마도구에서 들려오는 황녀의 부루퉁한 목소리에, 나는 일순 침묵을 지켰다. 그러고 보니 내가 자세한 계획을 알려주지 않았던가.
내 손길이 멈칫하자 세리아도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이곳은 전장이었다.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내게는 그만큼 중요한 문제였으나, 세리아로서는 영문 모를 소리에 어울려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일단 전황을 정리하려 드는 편이 정상이었다.
단지 유일한 수수께끼가 하나.
그 소심한 황녀가 어째서 내 말을 가로막았을까, 하는 의문이 남아있었으나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나는 긴장을 풀기 위해 자그마한 농을 던졌다.
“황녀 전하, 세리아만 챙기니까 질투 나십니까?”
그에 뒤따르는 황녀의 반응은 무척 극적이었다.
[지, 질투라뇨! 제, 제가 어찌 이안 경을… 질투는 아니에요, 네. 질투는 아니에요…….]
마도구를 통해 전해지는 황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처음에는 속삭이는 듯하더니, 이제는 천둥이 고막을 때리고 지나가는 듯했다.
그만큼 황녀가 당황했다는 뜻이었다.
아마 조금만 더 캐물으면 보다 재미있는 반응을 볼 수 있을 테지만, 나는 그만두기로 했다.
어느 쪽이든 긴장만 풀리면 상관없었으니까.
“그럼 집중해 주십시오. 기회는 아마도 단 한 번뿐이니까.”
내가 앞발을 내딛자 레오릭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수많은 의체의 시선이 단숨에 나를 겨누는 장면은 괴기스럽다는 느낌마저 주었다.
저 의체 중에서 본체를 찾아내야만 한다.
그리고 내가 알기로 그 과업을 수행할 수 있는 이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황녀 전하, 제가 신호하면 ‘색이 보이는’ 의체를 짚어 주십시오.”
그제야 황녀는 마도구 너머에서 짧은 탄성을 터트렸다.
슬슬 내 계획이 무엇인지 깨달은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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