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389화 (389/649)

〈 389화 〉 5. 빵과 비수(87)

* * *

레오릭의 의체는 정신이 부재한다. 오직 본체만이 감정과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여태껏 수없이 많은 레오릭의 의체를 상대해 온 내가 보증할 수 있었다. 더불어 레오릭도 의식을 잃은 베티의 몸을 두고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정신의 부재 상태가 길어지면 육체에도 악영향을 미친다고 했던가.

사실 딱히 도움이 되는 정보는 아니었다.

의체에 감정이 없다고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육체는 완벽히 레오릭의 통제를 듣고 있었다. 감정의 유무는 전투에서 논외였다.

그래, 우리 편에 황녀가 없었다면.

그랬다면 나는 이 무용한 통찰을 활용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으리라.

[본체를 찾으시려는 거군요.]

황녀가 내놓은 대답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차피 멀리 떨어져 보이지도 않겠지만, 나조차도 무심코 보인 반응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레오릭이 의탁하고 있는 의체를 찾으려는 겁니다. 실제로 레오릭의 본체는 이 살점 덩어리 그 자체니까요.”

짧고 단순한 작전이었다.

또 내가 짜낼 수 있는 효율적인 계획이기도 했다.

황녀는 곧장 납득했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아마 저 뒤에서 안력을 돋우며 레오릭을 살피고 있을 터였다.

다만 이 작전의 퍼즐 조각은 아직 하나가 더 남아있었다.

“그럼 전 무얼 하면 되죠?”

세리아의 질문이었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내용이라, 나는 최대한 빨리 계획을 읊었다.

“너, ‘나’한테 배운 기술 있잖아.”

어느덧 레오릭의 의체들이 슬금슬금 위치를 조정하고 있었다. 이제 곧 촉수와 의체들의 공습이 재개된다는 뜻이었다.

시간이 없었다.

“내가 신호하면 써.”

“네?”

나는 대답조차 듣지 않고 땅을 박찼다.

그러자마자 나를 마중하는 촉수와 의체들.

몇 분만의 재회였지만, 조금도 반갑지 않았다.

칼질 한 번, 도끼질 한 번에 살점이 찢겨져 나가며 피가 폭죽처럼 터져 나왔다.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

가라앉았던 숨결이 다시 거칠어졌다. 헐떡이는 숨소리가 가빠질수록 내 검과 도끼도 점차 빨라졌다.

언젠가 한 번 느꼈던 적이 있는 감각이었다.

무한히 재생하던 시체 거인을 마무리 짓던 날.

그날도 이처럼 정신이 뿌옇게 떠올랐고, 불가시의 세계 속에서 오직 나만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레오릭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팍, 하고, 의체 하나의 가슴을 뚫고 튀어나오는 주먹이 하나.

나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일격이었다. 급히 몸을 틀긴 했으나, 옆구리가 찢겨나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내 몸에서 핏물이 튀자 세리아는 비명을 내질렀다.

“이안 선배!”

“아직!”

나는 신음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내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간 팔을 손도끼로 찍었다.

칵, 하고 도끼날이 반쯤 틀어박힌 사이 촉수가 날아들고 있었다.

그때는 이미 내 발이 가슴을 꿰뚫린 의체를 발로 차고 있었지만.

참격과 달리, 충격은 레오릭의 단단한 몸에도 유효했다.

의체가 뒤로 넘어가며 틈이 생기자, 나는 도끼날을 비틀어 의체의 팔에서 빼냈다. 그리고 상체를 굽히며 타넘듯이 의체를 밟고 지나갔다.

촉수의 허공을 가르며 내리꽂히는 소리가 들렸다.

푹, 푹.

제 운동량을 이기지 못한 촉수가 제 본체인 살점을 찌른 모양이었다.

나는 재차 세리아에게 외쳤다.

“아직 휘두르지 마! 조금만… 크윽, 기다려!”

물론 그 기다림은 길지 않으리라.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저항은 격렬해졌으나, 그에 맞추어 내 참격 또한 가속하고 있었다.

그리고 보인다.

저 뒤에서, 미동조차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던 다섯 체의 의체가.

그중 하나가 본체일 터였다.

나는 폭우처럼 빗발치는 촉수와 의체의 파도 속에서 비명을 내질렀다.

“시엔!”

[가장 우측에 있는 의체에요!]

호명과 함께 등 뒤에서 달음박질 치는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그동안 숨기고 있었던 한 수를 공개하기로 했다.

눈을 부릅뜨자 실핏줄이 터져 나갈 듯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시야가 공간을 도해하고, 그 흐릿한 실선을 내 손이 잡아뜯듯이 당겼다.

나를 향하던 모든 촉수들이 기묘한 각도를 그리며 휘어졌다.

파바박, 하고 틀어박힌 촉수에 발이 걸린 의체들이 멈칫했다. 그러나 내가 눈을 부릅뜨고 있어야 할 까닭은 아직 하나가 더 남아있었다.

허공이 피를 흘리기 시작한다.

주르륵, 핏빛의 선들이 흘러내리며 각진 글자를 이루었다. 먼 옛날, 마법의 창시자라 불리던 종족이 사용하던 수수께끼의 문자.

용혈 문자였다.

쾅!

폭음이 울려 퍼지며 자욱한 열기는 퍼트렸다. 진홍의 불꽃이 혀를 낼름거리며 단숨에 주위의 풍경을 삼켜 버렸다. 나는 그 화염 속을 홀로 질주했다.

아주 짧은 틈새.

내 검이 레오릭의 본체에 닿기 직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나머지 네 체의 의체가 도약하며 내게 몸을 날렸다.

벌써부터 시계가 흐렸다. 나로서는 저 의체들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부탁해 두었던 것이다.

“세리아!”

정지한 시간 속, 소녀 하나가 땅을 박차고 쏘아졌다.

새파란 수평선이었다.

깔끔한 직선을 그리며 내달린 칼날이 폭풍을 몰고 왔다. 찰나의 찰나를 쪼갠 참격에 찢어발겨진 대지가 마구잡이로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 폭풍 앞에서 무엇이 온전할 수 있으랴.

“꺄악!”

네 체의 의체는 반토막이 난 채, 그 여파에 휩쓸려 흔적조차 남지 않고 스러졌다. 심지어 그 일섬을 날린 세리아마저 상상 이상의 위력에 뒷걸음질을 쳤을 정도였다.

이제 남은 것은 오직 나뿐이었다.

본체의 입이 나를 겨눈다. 당장이라도 비명을 토해낼 듯이.

그래서, 결(?).

빛과 빛이 맞닥뜨리며 일보의 양보조차 용납하지 않는 승부를 시작했다. 내가 신음을 흘리며 걸음을 내딛으면, 광선은 더욱 강인한 광채를 터트렸다.

하지만 그마저도 한계다.

광선이 파편처럼 깨져 나가고, 빛의 입자 사이를 내 칼날이 유영한다.

레오릭이 마지막 발악으로 팔을 교차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해(?).

으득, 하고 칼날이 뼈를 파고드는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조차도 잠시, 내가 이를 악물고 팔에 더욱 힘을 주자, 레오릭의 팔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중년의 사내는 그제야 하나 남은 입으로 이를 갈았다.

“이, 안… 페르쿠스! 날 쓰러트린다고 이 저주가 끝날 것 같습니까?! 이것은 약자의 한입니다! 당신들이 무시해 왔던… 때로는 눈 감아왔던 우리의 비참한 현실이 만든 희망이란 말입니다!”

“개소리, 하지… 마!”

나는 힘겹게 걸음을 내딛으며, 더욱더 이를 악물었다.

눈의 실핏줄이 터진 듯 시야가 붉게 물들고 있었다. 나도 이제 한계에 가까웠다.

“네 손에 묻은 피를 보지 못했나? 사는 것이 지옥이라면, 그 지옥에 일조한 것은 너야!”

“그 지옥을 만든 것은 당신들이고!”

“그랬겠지!”

카각, 하고 칼날이 조금 더 전진했다. 종막이 눈앞에 있었다.

손잡이를 지탱하던 내 손이 허리춤을 훑은 것은 그때였다.

레오릭의 눈이 부릅떠졌다. 내 손도끼가 그대로 허공을 날았기 때문이었다.

그도 기억하고 있을 터다.

이 일격에 어떻게 당했는지.

툭, 하고 정점에 오른 손도끼가 느닷없이 정지했다.

“이젠 아니고!”

그리고 빛살처럼 내리찍히는 손도끼가 칼날을 때렸고.

팽팽하던 힘의 균형은 그 작은 균열을 견뎌내지 못했다.

비명, 피, 그리고 흐려지는 시야.

뒤이어 세상을 뒤흔드는 폭음이 울려 퍼졌고, 내 몸이 부유하는 감각과 함께 시야가 암전했다.

그 몽롱해지는 의식 속에서, 나는 생각했다.

이제야 쉴 수 있나.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

눈을 뜨면, 낯선 사내의 기억이었다.

뺨이 얼얼했다. 시야에 새하얀 불꽃이 튀더니, 통증이 이내 내 의식을 전면으로 부상시켰다.

지금 무슨 짓을 당한 거지?

나를 바라보는 여인의 푸른 눈동자가 날카로운 빛을 품고 있었다.

“……건드리지 말라고 했잖아!”

입술을 짓씹으면서, 여인이 내뱉은 경고는 그랬다.

극단적인 거부의 말이었다. 그 목소리부터 짙은 노기가 배어나오고 있었으나, 나는 어째서인지 여인이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불쌍하기까지 했다.

뺨을 얻어맞고도 내가 헛웃음을 터트린 이유였다.

나를 노려보는 여인의 눈동자가 샐쭉해졌다. 무척이나 불쾌하다는 듯이.

“뭐가 그렇게 웃기죠?”

“여후배한테 뺨 얻어맞은 건 처음이거든.”

하, 하고 여인의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 떨림을 따라 찰랑이는 회색 머리카락.

말을 내뱉은 나조차도 영문 모를 소리였다. 당사자로서는 억울할 만도 하겠지.

사실 내가 웃은 까닭은 따로 있었다.

내 손이 여인의 팔에 닿았을 때, 그녀가 보인 감정은 공포였다.

나를 향한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말하자면, 그 직후에 제 몸을 살피며 파르르 떨던 그 반응.

여인은 딱히 나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스스로를 너무나 미워하기 때문에, 제 몸에 닿는 모든 접촉을 부정적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누군가를 또 다치게 할까 봐.

이를 증명하듯 여인의 이죽임이 이어졌다.

“하, 끔찍한 첫 경험이네요. 하필 얻어맞아도 괴물한테 뺨을 얻어맞다니?”

“네가 왜 괴물이야?”

“그럼 아니겠어요?”

울컥, 하고 나를 향해 한 발자국을 내딛는 후배.

나는 일부러 물러서지 않고 담담히 그녀를 마주했다.

“이 몸뚱어리에 흐르는 피가, 피를 원하고 있는데… 점점 제어하기가 힘들어요. 나는 괴물이니까! 사랑하는 언니와, 가신들을 죽인 괴물의 피가 제 혈관에 흐르고 있다고요!”

“저주를 이겨낼 수 있다면?”

나지막한 반문이었다. 고저조차 느껴지지 않는 평탄한 질문.

그러나 그 한 마디의 효과는 확실했다.

여인의 몸이 뻣뻣이 얼어붙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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