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390화 (390/649)

〈 390화 〉 5.빵과 비수(88)

* * *

눈동자는 마음을 들여다보는 창이다.

유심히 살펴볼 수만 있다면, 상대가 어떤 심정인지는 대략적으로나마 짐작이 가능했다. 특히 그 상대가 평정을 잃은 상태라면 더할 나위 없었다.

내 앞에 선 여인이 그랬다.

처음에는 의문, 그리고 기대, 곧이어 절망과 체념.

종래에 그 푸른 눈동자에 남은 감정은 강한 불신뿐이었다.

그녀가 씹어뱉듯 질문을 던졌다.

“그게 무슨 헛소리죠?”

“말 그대로야. 저주를 풀 방법이 있다고.”

“불가능해요.”

베이기라도 할 듯 날카로운 단언이었다.

여인의 반응은 늘 한결같았다.

극단적인 거부, 그렇지 않으면 술을 마시거나.

그나마 후자일 때는 대화가 통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술에 취하지 않았을 때, 여인은 금이 간 유리처럼 위태로운 모습을 보이곤 했다.

당장 이를 악물며 나를 노려보는 꼴만 해도 그랬다.

조금만 더 도발하면 나를 베기라도 할 기세였다.

“그간 제가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았는 줄 알아요?! 아마 당신은 모르겠죠! 태어나는 순간부터 저주 받은 삶을… 그동안 온갖 가능성을 검토했어요. 하지만 남는 것은 늘 절망뿐이었죠! 그런데 절 본 지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마스터가 되면 되잖아.”

내가 내놓은 대답을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던 탓일까.

여인의 달구어진 목소리가 우뚝 멎었다. 그리고 옅은 경련을 일으키는 속눈썹.

무슨 반응을 보여주어야 할지 헷갈린다는 얼굴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말을 꺼낸 당사자인 나조차도 꽤나 터무니없다 느끼는 제안이었으니까.

“마스터가 되면 육체를 재구성하는 것을 넘어 현실을 왜곡할 수 있어. 당연히 네 핏줄에 자리잡은 저주도 해결되겠지.”

“그걸 말이라고 해요?”

하도 어이가 없었던 탓인지 다소 누그러진 목소리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날카로운 음색이라는 사실에 변함이 없었다. 나를 째려보는 그 눈빛이 칼날처럼 예리했다.

“물론 제가 마스터를 목전에 두고 있는 것은 맞아요. 하지만 이 경지에 오른 검사들은 지난 수백 년간 수백 명이나 있었죠… 그리고 그중에서 몇 명이나 마스터에 올랐는지 아나요?”

“그건 네가 혼자일 때의 이야기지.”

나는 일부러 어깨를 으쓱이며 젠 체를 했다.

무슨 소리냐는 듯 여인의 낯빛이 더욱 깊은 의혹으로 물들었다.

굳이 뜸을 들일 필요는 없었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꺼냈다.

“알고 있지? 내가 황제 폐하의 특명을 받아 온갖 조직의 비전 무술을 수집하고 있다는 거.”

“설마, 소드 서클의 비기를 넘겨달라는 건가요?”

“어차피 너 하나밖에 안 남았잖아.”

‘절대 불가’.

당장이라도 그렇게 덧붙이고 싶은 얼굴이었으나, 나는 여인에게 틈을 만들어 줄 의사가 없었다.

내 설득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또 너는 소드 서클 대사범 자격까지 있고. 나를 소드 서클의 제자로 거둬들인다고 생각하면 돼.”

“아무리 그래도…….”

“세상이 멸망할지도 몰라.”

내 묵직한 경고에 여인의 입이 절로 다물어졌다.

왜 모르겠는가.

그것이 산속에 틀어박혀 있던 그녀가 이 황량한 북부까지 온 이유였는데.

사문도, 가문도 전부 잃었다.

도처에 도사리고 있던 암흑교단의 음모에 의해.

“힘을 모아야 해. 성국도, 제국, 심지어 열왕국도 동의한 사안이야… 또, 너한테도 도움이 되는 이야기고.”

“각 조직의 비기를 전해줄 생각이군요. 그러면 새로운 길이 보일 수도 있으니까.”

이미 이해하고 있다면 굳이 설명을 늘어놓을 필요는 없었다.

나는 대답 대신 말없이 여인을 응시했다.

어쩌겠냐는 의미였다.

여인은 잠시 망설였으나, 그 고민의 끝은 뻔했다.

어차피 멸망할지도 모르는 세상이다.

사문의 맥이라도 잇기 위해서는 별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인의 입에서 한숨을 푹 새어나왔다. 항복의 표시였다.

“좋아요. 받아들이죠.”

“잘 생각했어, 내가 폐하께 잘 말씀드릴 테니…….”

그 다음 순간.

팍, 하고 여인의 팔꿈치가 명치에 내리꽂혔다. 내게 반항할 틈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애초에 여인이 움직이는지조차 모르고 있던 차였으니까.

숨이 턱 막히고 답답한 통증이 전신에 번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어느덧 땅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가슴을 팍팍 두드리며 통증을 호소하기를 잠시.

내 멍한 시선을 받으며, 여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기색으로 말했다.

“소드 서클의 수련은 입문하는 즉시 시작됩니다. 앞으로는 늘 ‘정중동’을 유념해 두세요.”

“그게 도대체 무엇…….”

훅, 하고 다시금 여인의 신형이 내 바로 앞에 섰다.

그 속도가 빠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워낙 전조가 없다 보니, 신속하다 못해 신출귀몰하다는 느낌조차 줄 정도였다.

나는 속으로 식은땀을 흐르며 직감했다.

이것이 바로 소드 서클의 비전이다.

여인은 내게 선언했다.

“모든 것.”

앞으로 내 수련이 평탄하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검술뿐만이 아니에요. 보법, 박투, 혹은 일상생활의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무표정한 얼굴, 한기가 풀풀 풍기는 냉막한 목소리.

진정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소녀는 내게 말도 안 되는 요구를 건넸다.

“정중동을 익힐 때까지는 항상 제 곁에 붙어있으세요.”

나는 어이가 없어서 흐, 하고 웃음을 터트렸고.

그날부터 지독한 수련이 시작됐다.

그럼에도 이 기억이 따스한 감상을 주는 까닭은, 글쎄.

이때는 아직 희망이 있었으니까.

어느 사내가 감정을 토막 내기 전의 일이었다.

**

쿨럭거리면서, 나는 눈을 떴다.

시야가 흐릿하다. 짧은 시간 내에 모든 힘을 다한 근육은 마치 족쇄 같았다.

그것도 묵직한 철구가 달린 족쇄.

사위가 새하얗다. 거센 눈보라가 엎어진 내 몸을 세차게 후려쳤다.

당장 일어나라고.

그러지 않으면 죽는다고.

나는 대자연의 경고를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는 동안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다.

미끄러지고, 쓰러지고.

그럼에도 나는 차디찬 지반을 딛고 섰다. 내 앞에서 아직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지고 있었다.

온몸에서 새까만 진흙을 뚝뚝 떨구고 있는 사내였다.

화상으로 일그러진 그 흉측한 얼굴과, 허우적거리며 더러운 진흙을 주워담으려는 그 황망한 몸짓.

나는 큭큭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아, 안 돼! 주의 축복이, 우리들의 희망이!”

“그까짓 게 희망인가?”

하아, 하고 숨을 들이마시며 던진 내 질문에 사내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툭 불거진 그 눈동자에 강한 집념이 느껴졌다.

그는 휘청이며 몸을 일으켰다. 나와 마찬가지로 몸 상태는 최악으로 보였다.

“……당신은 몰라.”

나는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단지 소매로 눈가를 한 번 닦아냈을 뿐이었다. 말라붙은 핏물이 찬바람을 맞아 얼음처럼 부서져 내렸다.

“난 어린 시절부터 모두를 용서해야 한다고 주장했지. 그것이 천신의 뜻이었으니까! 그런데 북부에 온 이후, 나는 엘프를 보며 늘 절망을 느꼈어. 어째서 우리는 서로를 용서하지 못하는가?”

이제는 경어조차 아니었다.

나는 이죽이듯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래서?”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엘프들의 습격을 받고 침엽수림 깊숙한 곳에 홀로 남고 말았지. 그때 그 아이를 만난 거야.”

“엘프였군.”

“그래! 그 아이는 적인 내게 빵을 건네주었지! 그것이 엘프들에게 얼마나 귀한 것인지, 너는 알고 있겠지?!”

나는 레오릭의 이야기를 들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검과 손도끼는 멀리 튕겨나간 듯했다. 또 그보다 머나먼 곳에서 옅은 숨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낯익은 기척이었다.

아무래도 황녀와 세리아 또한 마지막 폭발에 휘말린 모양이었다. 어째서 나만 튕겨나가지 않았는지는 의문이었지만.

그 와중에도 레오릭의 토로는 이어지고 있었다.

“굶주림에 지쳐 있던 나는 그날 운명을 느낀 거야… 나는 추위에 지쳐 있던 소녀를 보듬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둘은 마치 부녀지간처럼 보일 만큼 가까워졌지. 아니, 적어도 나는 그 아이를 내 딸이라 생각했어!”

결국 이곳에 남은 것은 나와 레오릭뿐이었다.

그 누구도 나를 도울 수 없었다. 레오릭도 사정은 매한가지였다.

엉망진창인 몰골인 견원지간의 사내가 둘.

나는 헛웃음을 머금었다.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때 인간들이 우릴 습격한 거야. 사실, 내가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몰라… 그들이 식량 창고에 불을 지르기 직전, 내가 등뒤에서 그들을 덮치기만 했다면! 하지만 천신교에서 배운 알량한 가르침이 나를 망설이게끔 만들었지.”

“그래서 어떻게 됐나?”

“불타버렸어. 모든 것이…….”

최후의 대화였다.

조금 더 하소연을 들어준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어쩌면 내가 모르던 정보를 알게 될지도 모르고.

그러면서도 나는 은근슬쩍 팔과 다리를 긴장시켰다.

슬슬 몸을 풀어야 할 때였다.

결전이 임박했다.

“나는 그 불구덩이 속에서 생각했다. 이처럼 잔혹한 운명인데, 이토록 고통스러운데 어찌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어리숙한 오만이었어. 그리고 몇날며칠을 혼수 상태에 빠져 있다 깨어나던 날,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굶어죽은 딸의 시체였지.”

“그래서 죄 없는 인간을 습격한 건가? 네 알량한 복수심을 위해서?”

“아니, 지옥을 만든 책임을 지게 하기 위해서!”

악물어진 레오릭의 잇새로 먹빛의 증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힘을 잃었지만, 타다 만 재처럼 약간의 힘은 남아있는 듯했다.

나쁘지 않았다.

너무 일방적인 전투는 마무리에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너희들이 우리의 삶을 지옥으로 만들었어! 너희가 감히 짐작이나 했겠나? 우리가 이토록 비참하게 사는 줄?”

“아니.”

담백한 한 마디였다.

단 두 음절에 장황한 레오릭의 이야기가 멎었다. 그는 일순 당황한 눈빛으로 나를 살폈다.

그래서 나는 그가 원하던 대답을 늘어놓아 주었다.

“아무것도 몰라. 엘프들의 삶이 어땠는지, 심지어는 인류의 빈민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조차…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어.”

레오릭은 내 나지막한 인정에 이를 으득으득 갈았다.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듯 부릅떠진 눈동자가 인상 깊었다. 인자한 종교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 내면에는 깊숙한 증오가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과 의붓딸을 죽인 인류에 대한 증오가.

나는 그제야 레오릭이 두렵지가 않았다.

그는 내 마음도 모른 체 짓이겨진 언어를 내뱉었다.

“그렇다면, 누가 옳은지는 정해졌군.”

“그럼 당신은 아나?”

반론의 틈조차 주지 않고 쏘아붙인 말이었다.

레오릭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는 마치 불합리한 심문을 맞이한 증인 같은 얼굴이 됐다.

그래서 나는 더욱 거세게 그를 추궁해야 했다.

“살기 위해 가족과 이웃을 바쳐야 했던 엘프들의 심정은? 여동생이 약에 중독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언니의 마음은? 그리고 당신이 파괴한 엘프들의 지조는?”

“궤변 늘어놓지 마라… 그건 전부 살기 위해서 한 일이었어.”

“그렇게 네가 짓밟아 온 거지.”

숨을 몰아쉬면서, 한 걸음 앞으로.

레오릭은 물러나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에 칠흑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을 희생시켜 하루하루를 연명해? 그게 짐승의 삶과 뭐가 다르지? 내가 본 엘프들은 그러지 않았어… 그들은 나무 껍질을 뜯어먹는 한이 있어도 엘프로서의 존엄을 지켜왔거든.”

“헛소리…그조차도 목숨이 이어지지 않는다면 하잘 것 없는 짓!”

“아니, 사실은 당신이 무참히 무시해 왔던 게 아니라?”

중년은 결국 참지 못하고 입술을 짓씹었다.

당장이라도 피눈물을 흘릴 것만 같은 눈빛이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겠지, 그가 믿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으니까.

나는 그가 붙들고 있던 마지막 동앗줄마저 끊어버릴 심산이었다.

“당신의 삶이 지옥이라고, 모두의 삶을 지옥으로 만들어 왔던 거야! 그 알량한 복수심과 동정심에 끼워 맞추기 위해… 허기를 약점 삼아 엘프들을 세뇌하고 당신을 구원자로 만들었지. 그러니까 좋던가? 당신 딸에게 해주지 못했던 일을 해주는 것 같아서?”

“닥쳐…….”

투둑, 툭.

레오릭의 눈에서 검은 자위가 사라졌다. 팔과 목을 넘어 얼굴까지 힘줄이 불거지는 광경은 비현실적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그동안 품어왔던 앙금을 털어내고 싶은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동족을 팔아먹고 배를 채워 행복하다는 엘프가 한 명이라도 있었나? 그까짓 희생이 희망이라며 행복해하던 엘프가 하나라도 있었냐고!”

“너희가 우릴 이렇게 만든 거야!”

“그래, 그리고 당신도…당신도 이 지옥을 만드는 데 일조했지!”

이제 토해낼 감정은 모두 토해졌다.

나는 거칠어진 숨을 헐떡이면서, 자세를 잡았다.

무기는 필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만일을 대비해 델핀 선배가 챙겨준 물건이 아직 내 품 안에 남아있었다.

피가 나도록 두 주먹을 움켜쥔 레오릭의 몸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나는 틀리지 않아…….”

울컥, 하고 레오릭의 입에서 피처럼 검은 진흙이 토해졌다.

그 진흙은 불길한 연기를 풍기며 곧 대기에 녹아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레오릭의 온갖 구멍에서 진흙이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입, 코, 그리고 땀구멍까지도.

마치 전신이 눈물을 흘리는 것만 같았다.

그 오물의 범람 속에서, 레오릭은 발악처럼 비명을 내질렀다.

“나는 틀리지 않아!”

더는 들어줄 필요가 없었다.

내가 땅을 박찼고, 내질러진 주먹이 레오릭의 턱에 작렬했다.

그리고 레오릭의 주먹 또한 내 얼굴에.

핏물이 터져 나가며 두 사내의 신형이 쓰러졌다. 만신창이들의 곡예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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