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391화 (391/649)

〈 391화 〉 5. 빵과 비수(89)

* * *

새하얀 도화지 위에 물감을 튀겨 본 적이 있는가?

주먹과 주먹, 뼈와 뼈, 근육과 근육.

그 모든 것이 마주칠 때마다 새하얀 설원에 색이 칠해졌다. 목숨을 걸고 펼치는 핏빛의 윤무는 거칠면서도 정밀했다.

팍, 하고 레오릭의 주먹이 이안의 뺨을 강타했다. 휘청이며 그가 물러서자, 레오릭은 틈을 놓지지 않고 내달렸다.

그 전에 이안의 발길질이 그의 명치에 작렬했을 뿐.

울컥, 하고 레오릭의 입에서 묽은 진흙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안은 내달려 주먹을 휘둘렀다. 레오릭도 이를 악물고 버텨 또 다시 주먹을 내질렀다.

무기조차 없는 두 사내의 혈투였다.

필사적이다 못해 처량하다는 느낌마저 드는 전투였다. 이미 한계에 다다른 레오릭의 정신이 몽롱해졌다.

나는, 틀리지 않았을 텐데.

레오릭은 자꾸만 속으로 그러한 말을 중얼거렸다.

이미 그의 이빨은 모조리 뽑혀나가 땅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턱뼈도 아작나서 혀를 움직여봐야 바람 빠지는 소리만 날 뿐이었다.

그러니 그는 그저 속으로만 읊조렸다.

나는, 틀리지 않아.

흐릿해지는 뇌리 속으로 과거의 풍경이 침투했다. 어느 날의 풍경이었다.

그는 홀로 떨어져 북부의 추위에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버티려고 했지만 며칠이나 이어진 허기는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가고 있었다.

그때 발목을 다친 엘프 소녀를 만났다.

그녀 또한 죽을 운명이었다. 침엽수림에서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는 추위와 굶주림뿐만이 아니었다.

피 냄새를 맡은 마수들이 찾아오겠지.

그래서일까, 엘프 소녀는 애써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빵을 내밀었다.

“나는 몰라도, 아저씨는 살 수 있잖아?”

거칠고 투박한 빵이었다.

레오릭은 종군사제였다. 군영에서 지급하는 가장 싸구려 식사조차 그보다는 나은 품질을 지니고 있었다.

그럼에도 왜, 그는 그토록 허겁지겁 빵을 먹었는가.

레오릭은 그것을 운명이라 생각했다.

늘 마음 한 켠에 품고 있던 신을 향한 의문을 해소할 멋진 기회라고 여겼다.

신이시여, 당신은 평화와 용서를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왜 인류와 엘프는 이토록 잔혹한 싸움을 반복해야 하는 것인지.

성직자인 그는 알 수가 없었고, 대개의 학자가 그렇듯 진리를 찾기 위해 그 문제에 깊숙이 뛰어들었다.

엘프 소녀를 치료한 뒤, 마수들 앞에서 그녀를 감싸다 피투성이가 되면서까지.

그렇게 레오릭은 엘프들한테 인정을 받았다.

그때 무슨 말을 들었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만 상념을 깨우는 것은, 그의 코뼈를 함몰시키는 주먹질.

“레오릭!”

레오릭은 이를 악물며 몸을 비틀었다. 코뼈가 무너지며 핏물이 가득 차 가뜩이나 가쁘던 호흡이 더욱 거칠어졌다.

그럼에도 그는 특유의 몸집을 이용해 부닥쳤고, 이안은 쓰러지지 않기 위해 두 발을 굳건히 땅에 박아야 했다.

레오릭은 왼발로 그 발 중 하나를 짓밟았다.

짓밟은 쪽이 왼발인지 오른발인지, 너무나 정신이 없었던 탓에 분간이 가질 않았다.

단지 이안이 이를 악무는 모습이 보였을 뿐.

그리고 박치기.

이안이 비틀비틀 몰러나고, 두개골을 파고드는 충격에 레오릭도 두어 걸음 뒷걸음질을 쳤다.

더욱 희미해지는 정신 사이로 흐릿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아저씨! 괜찮아? 부, 불! 식량 창고에 불에……!”

“저, 저헌… 이미 틀렸습니다.”

녹아내린 혀로 중얼거린 말이었다.

그러나 소녀는 눈물을 흘릴지언정 그를 포기하지 않았다.

내 탓이다.

레오릭의 머리가 엉망진창으로 헝클어졌다. 얼굴이 녹아내리고 전신에 흉측한 흉터가 새겨진 그날 이후, 레오릭은 얼마일지 모를 시간이 지나 눈을 떴다.

그리고 보았다.

뺨이 움푹 패어 죽어버린 엘프 소녀의 모습을.

레오릭은 불타버린 성대로 목놓아 울었다. 흐느낌조차 제대로 토해낼 수 없는 제 신세가 그저 원망스러웠다.

소녀는 그 와중에도 레오릭을 살리려고 최선을 다했다.

제 끼니를 굶어가면서까지, 온힘을 다해 식량을 구하고 그것을 자신에게 넘겨주었던 것이다.

레오릭은 그 사실을 깨닫고 밤새도록 울었다.

또 자신을 저주했다.

어리석은 놈,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세상은 죽고 죽이는 먹이사슬의 확장판이었다.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은 배부른 자들의 헛소리에 불과했다.

스스로 불타면서 깨닫지 않았는가.

이 고통을 준 자들을 용서할 수 없다고.

그래, 나는 틀리지 않았다.

그날 유령처럼 나타난 여인도 그랬다.

맹세코 난생 처음 보는 미인이었다. 설령 미의 극치라 칭해지는 성국의 성녀조차도 그녀의 상대가 될 수 있을까.

한 점의 빛조차 허용하지 않는 고귀한 흑빛 머리카락, 그 속내를 짐작하기 힘든 진홍빛 눈동자.

새하얀 피부는 아무도 밟지 않은 설원을 보는 것만 같았고, 오똑한 콧날과 이목구비는 모든 이들을 홀리기 위해 태어난 것만 같았다.

사내든 여인이든.

마음만 먹는다면 그 여인은 누구라도 유혹할 수 있을 터였다.

그래서 더욱 두려웠다.

그 눈동자를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그 자신이 끌려들어가는 것만 같아서.

여인은 살포시 미소 지었다.

“복수하고 싶나?”

그래, 그 말이 계기였다.

“너는 단지 천신의 가르침에 따랐을 뿐이잖아. 그런데 어째서 이러한 고통을 당해야 하지? 그리고 네게 고통을 준 이들은 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까? 불합리하지 않나?”

“다, 당신은…….”

“쉿.”

밤처럼 매혹적이고, 또 불길한 여인이었다.

그녀의 입가로 고혹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넌 잘못하지 않았어. 단지 힘이 부족했을 뿐이지… 그렇다면 어때, 우리 거래하지 않을래?”

“거, 거래?”

“그래, 네게 힘을 줄게. 이 불합리한 세상을 갈아치울 힘을… 대신 너 또한 대가를 바쳐야 해. 그래야만 성립하는 것이 ‘거래’니까.”

그날, 레오릭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아무리 골몰해도 그 ‘대가’가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는, 무얼 바쳤을까.

그리고 콱, 하고 그의 명치에 내리꽂히는 팔꿈치.

레오릭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지금까지와 달리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격이었던 탓이었다.

전조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박투술에 문외한이라지만, 레오릭의 몸에는 아직 ‘거래’로 얻은 힘이 남아있었다. 그의 동체시력은 범인의 범주로 엮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눈치 채지 못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러한 의문이 채 이어지기도 전에, 연달아 그의 턱과 관자놀이에 주먹이 작렬했다. 레오릭은 울부짖으며 두 손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마지막까지도 이안은 그의 명치를 발로 차며 물러섰다.

이제는 레오릭의 명백한 열세였다.

다시금 울컥 진흙을 토하면서, 레오릭은 흐릿해지는 시야를 두고 생각했다.

그래, 나는 잘못하지 않았어.

“자, 보십시오! 살아가는 것은 고통입니다! 그대들 중 누구라도 삶이 지옥이 아니라 강변할 자가 있습니까? 우리는 이 지옥을 견딜 수 없는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그래, 나는.

“너무 눈에 띄게 약탈하면 안 됩니다. 우리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각인시키는 데 있습니다. 그 와중에 희생이 생기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죠.”

나는.

“오, 불쌍한 베티. 안타깝지만 그 고통을 홀로 이겨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제가 자그마한 도움을 내드리겠습니다. 아프지 않도록… 이 지옥 같은 삶이 조금이나마 평온해질 수 있도록.”

그리고, 비명.

레오릭은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는 가슴의 불길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기도와 성대를 태우고, 종래에는 입으로 토해지는 그 외침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는 단지 달렸고, 주먹과 주먹이 뒤영켰다.

이후 두 사내의 몸뚱어리는 서로 멀어졌다가, 달라붙었다가, 서로 쓰러지다가를 반복했다.

레오릭의 숨이 점점 더 가빠져 왔다.

엘프 소녀, 그가 딸처럼 여기던 그 소중한 아이의 이름이 떠오르지가 않았다.

도대체 왜?

그는 소녀를 가슴 속에 파묻고 지냈다. 기억 한 켠에 추모비를 만들고 매일매일 추모하는 마음으로 살아왔다.

소녀를 기리기 위해 그는 늘 품에 두 개의 물건을 넣어두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하나는 빵, 하나는 비수.

빵은 소녀가 그에게 베풀었던 은혜를 기억하기 위함이었다.

비수는, 그날처럼 망설이지 않기 위함이었고.

그럼에도 왜,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지.

레오릭의 뇌리가 땅 위를 구르는 실타래처럼 마구잡이로 헝클어졌다.

그래, 이 또한 전부 저 사내 탓이었다.

이안 페르쿠스.

그가 나서고 나서부터 계획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종래에는 주께서 내려주신 힘을 잃고, 쓸데없는 번민에 시달리고 있지 않은가.

레오릭이 증오에 가득 찬 함성을 터트렸다.

“이,안... 페르쿠스으으으으!!!”

두 사내의 주먹이 서로의 안면을 강타했다.

그 완벽한 교차에 두 신형이 동시에 휘청이며 떨어져 나갔다. 레오릭의 눈동자에 짙은 핏발이 섰다.

이안도 마찬가지였다.

더는 물러날 곳이 없었다. 두 사람은 죽든 살든 이곳에서 승부를 봐야만 했다.

이미 두 사람의 몰골은 누가 더 낫다고 할 수 없을 만큼 처참해진 뒤였다.

알록달록 피멍이 들고 뼈가 주저앉은 얼굴에, 설원 위로 뚝뚝 제 자취를 남기는 핏방울까지.

둘 중 누구도 입을 열지는 않았다.

다만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무언의 합의에 이르렀다.

다음 일격으로 끝냈다.

여태껏 숨겨왔던 비장의 수를 내보여야 할 때였다.

정신이 몽롱했다. 사실 두 다리로 땅을 딛고 선 것이 용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레오릭은 결코 쓰러질 수 없었다.

그의 패배는, 곧 그가 틀렸다는 사실을 의미했기에.

삶과 삶을 빼앗는 세계는 늘 이랬다. 언제나 승자의 논리 아래에서 역사가 쓰였고, 패자는 추방되어 악인으로 남는다.

레오릭은 그처럼 비참한 끝을 맞이하기 싫었다.

그를 구해주었던 엘프 소녀의 이름을 역사 새기고 싶었다.

누구에게도 잊히지 않도록!

레오릭이 비틀거리는 사이, 이안의 몸이 땅을 박차고 쏘아졌다.

약속이라도 한 듯 두 사람의 손이 각자의 품을 헤집었다.

비수다.

레오릭은 이를 악물고 생각했다. 아마 이안도 마찬가지로 직감했을 터였다.

각자의 품에 숨기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

단 일격만으로도 상대의 생명을 빼앗을 비밀의 정체를.

황망한 정신 사이로, 레오릭은 제 손에 붙잡히는 무언가를 느꼈다.

망설일 틈은 없었다.

두 사내의 팔이 서로 쭉 뻗어졌고.

푸슉, 하고 핏물이 대지를 적셨다.

이전과 달리 치명적인 출혈이었다. 단발성이 아닌, 지속적이고 대량의 출혈.

레오릭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온 세상이 그와 이안을 중심으로 좁아지는 것만 같았다. 분명 그는 땅을 딛고 서있는데, 마치 하늘에서 두 팔의 교차를 내려다보는 것만 같은 느낌.

레오릭의 몸을 비수 하나가 파고들고 있었다. 금빛 손잡이만 보아도 알 수 있듯, 고급품이었다.

애인에게 호신용으로 선물하는 물건이던가.

한때 사제였던 레오릭의 머릿속에 잔지식이 하나 스치고 지나갔다. 어차피 의미는 없었지만.

레오릭은 이안의 심장을 노리고 내뻗어진 제 팔의 끝을 바라보았다.

빵이었다.

비수가 아니라, 엘프 소녀를 기리기 위해 늘 넣고 다니던.

빵과 비수가 교차하고 있었다.

울컥, 하고 레오릭의 입에서 검게 물든 핏물이 쏟아져 내렸다. 그마저도 잠시, 그가 토해내는 핏물은 곧 적색을 되찾았다.

잠시 부르르 몸을 떨던 레오릭이 땅 위로 엎어졌다.

죽음이 다가온다.

그 덕일까, 레오릭의 망가져 버린 턱뼈가 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내, 내가… 내가 진 건가?”

“그래.”

레오릭은 그 나지막한 답변에 큭큭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결국 졌구나.

더는 분하지도 않았다. 온몸을 파고드는 한기조차 그의 몸에 고통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안심이 되기도 했다.

이제 싸우지 않아도 되니까. 아프지 않아도 되니까.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한 가지.

“아, 아리엘라가 슬퍼할까?”

무심코 내뱉은 이름이었다.

레오릭은 그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 느닷없다고 느끼는 것은 이안 또한 마찬가지겠지.

하지만 이안은 침묵을 지켰다.

그저 빵의 뭉툭한 끝이 툭 치고 지나간, 제 가슴 어림을 멍하니 매만졌을 뿐.

“그 아이를 기리기 위해 늘 빵을 가지고 다녔어… 그, 그런데 그 탓에, 최후의 승부에서 패배하고 말다니. 쿨럭!”

레오릭의 눈가에 이슬이 맺히고 있었다.

그는 실로 오랜만에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에게도 눈물이 있었던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식량 창고가 불타던 날, 그의 눈물샘도 타버렸다고 생각했으니까.

“아리엘라를, 볼 면목이 없군…….”

“좋아할 겁니다.”

그러나 이안이 내뱉은 말에, 레오릭은 흐릿해지던 정신을 마지막으로 붙잡았다.

“아리엘라가 아버지라 여기던 사제는 그런 사람이었지 않습니까? 인간이든 엘프든, 아픈 자들을 돌보고… 엘프의 습격으로 침엽수림에 홀로 떨어져도, 발목을 다친 소녀를 치료하던 사람.”

그 또한 숨이 찼을 것이다.

털썩 무릎을 꿇으며, 이안은 흐릿한 숨결로 추론을 이어갔다.

“그는 비수를 비수로 갚지 않던 좋은 사람이었을 겁니다. 아니, 비수라는 것은 평생 모르고 살았던… 그래서 평생 마음속에 비수를 품고 살던 엘프들마저 녹일 수 있던 사내.”

레오릭은 입을 다물었다.

진흙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그의 육신은 연약한 사제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을 기회마저 얼마 남지 않았겠지.

그의 뿌연 정신 사이로 몇 가지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야말로 불현듯, 그의 뇌리를 찌르고 들어오는 목소리들.

“아리엘라 자매님, 엘프들은 참 합리적이면서도 무서운 것 같습니다. 빵은 빵으로, 비수는 비수로… 자매님이 아니셨다면 아마 문전박대를 당했겠군요. 하하!”

레오릭의 뺨을 타고 한 줄기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랬구나.

“흥, 전 그따위 시시콜콜한 이야기보다 아저씨가 해주시는 말이 더 재미있어요. 그, 누구더라? 천신님이라는 분이 했다는 말씀이요!”

“그, 그건 좀 지루했을 텐데…….”

이것이 내 ‘대가’였구나.

“그게 더 멋지고 대단해요! 비수를 비수로 갚으면, 그 다음은요? 비수를 받은 사람은 또 비수를 마음에 품고 살겠죠? 그래서는 끝이 없어요! 영원히 싸워야 하잖아요!”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전 그래서 아저씨가 좋아요!”

이 해맑은 미소를, 아이의 행복을.

굶주림 속에서도 눈이 부시도록 피어나던 웃음소리를.

“저도 그 아저씨의 말씀대로 살면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비수를 비수로 갚지 않고, 빵으로 갚는 사람!”

이토록 소중했던 기억들을.

어째서 잊고 있었을까. 점차 닫히는 눈꺼풀을 비집고 뜨거운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내렸다.

레오릭은 울먹이며 말했다.

“아아, 그랬군요. 그랬어요…….”

삶의 가치란 배부르고 부유한 것에 있지 않았다.

지독한 인생이라도 이처럼 반짝이는 순간들이 있었다.

“마지막에는, 이루어져서 다행입니다. 너무나 많은 죄를 지었지만…….”

울음을 가까스로 꿀꺽 삼키며, 레오릭은 최후의 힘을 짜내 말했다.

“죄송하다고 전해주십시오.”

누구에게, 라고 이안은 마땅히 뒤따라야 할 질문마저 던지지 않았다.

대신 침묵을 지켰다.

너무나 오랜 시간 대립해 왔던 숙적의 마지막을 지켜주기 위해서.

“또, 조심하셔야 합니다.”

점차 레오릭의 숨결이 잦아들었다.

한때는 천신교의 사제였고, 사교의 교주였으며, 지금은 한낱 피투성이 인간이 된 사내.

그의 마지막 당부였다.

“아인델 총주교, 그는 위험…….”

최후의 당부조차 전하지 못하고, 레오릭의 심장 박동이 완전히 멎었다.

무릎을 꿇고 있던 이안은 그제야 긴장을 풀고 털썩 주저앉았다.

그 또한 정신이 흐릿했다.

얼마나 얻어맞았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단지 뒤로 풀썩 쓰러지며, 하늘을 보며 한 가지 감상을 품었을 뿐.

맑구나.

눈보라가 몰아치던 북부에 해가 나고 있었다.

혈투의 끝을 알리는 것처럼.

**

팍, 하고 노인의 몸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 목젖을 겨누는 날카로운 검극이 하나.

델핀은, 낮게 으르렁거리며 제 아비에게 말했다.

“끝입니다.”

두 개의 결전이 끝을 맺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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