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392화 (392/649)

〈 392화 〉 5. 빵과 비수(90)

* * *

어슴푸레 밝아오는 여명이 말간 빛을 흩뿌렸다.

심야를 지나, 시간은 이제 새벽녘.

유르디나 가문의 후원에서 이루어진 결투는 비로소 끝을 맺어가고 있었다.

유르디나 후작은 나이에 걸맞은 노련한 검술을 구사했다.

특히 거리를 재는 감각이 탁월했다.

델핀이 젊음과 체력을 앞세워 거리를 좁혀 가면, 후작은 특유의 발재간과 기교로 응수했다. 병약한 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정교한 전술이었다.

그러나 세월은 모두에게 동등하다.

마스터라는 꿈의 경지를 이룩하지 않는 한, 늙어가는 육체를 어찌할 수단은 없었다. 아무리 마력이 많더라도 한계는 존재하는 법이었다.

유르디나 후작은 놀라울 만큼 잘 버텨 주었다.

무려 수 시간이나 이어진 대결이었다. 도중에 탈진해서 쓰러질 만도 한데, 그는 쉽사리 빈틈을 내어주지 않았다.

결착은 가장 유르디나다운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넌 역시 재능이 있다, 델핀.”

“그럼요, 누구 피를 이었는데요?”

각자의 간격 속에서, 두 부녀의 거친 숨소리가 교차했다. 델핀의 이마에도 어느덧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델핀으로서는 의외였다.

중병으로 앓아누운 지 벌써 몇 년이나 된 아비였다. 간단히 승리를 따낼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설마 이토록 잘 버텨 주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델핀은 초조하면서도 뿌뜻한 기분이었다.

어서 승리를 따내야 한다는 마음에 초조했고, 그러면서도 아직 유르디나의 기둥이 건재하다는 사실에 안심했다.

그래봤자 최후의 승자는 자신이 될 테지만.

델핀의 눈동자에 승부욕이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그 모습을 보며 늙은 사자는 쿨럭이며 웃음을 터트렸다.

“못난 녀석, 그리도 가주의 자리를 가져가고 싶더냐? 내 말대로 기다려도 어차피 몇 년 후에는 네 자리가 되었을 텐데.”

“아버님, 당신께선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죠.”

여인이 숨을 가다듬자, 검극이 파르르 떨리며 시퍼런 검광을 뿜었다.

달빛이 날을 타고 뚝뚝 흐르는 듯했다.

그리고 여인의 숨결이 잔잔해지던 찰나.

화륵, 하고 검에서 황금빛 불길이 치솟았다. 머나먼 거리에서도 그 열기에 살갗이 따끔거릴 정도였다.

“유르디나의 어깨 위에는 모든 북부인들이 올라타고 있다고… 그런데 제가 보고 들은 것은 도대체 뭐죠?”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그 많은 북부인들이 죽고 다쳐야 했나요?”

유르디나 후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검에서도 검푸른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일렁이는 빛이 마치 사자의 갈기와 같았다.

북부를 수호하는 제국의 사자, 유르디나 가문의 주인다운 패기였다.

“마지막이다. 바라건대… 부디 죽진 말거라.”

그와 동시에 툭, 하고 좌하단으로 떨어지는 노인의 검극.

그 의도를 짐작한 델핀이 살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버지야말로.”

두 개의 검이 좌하단으로 떨어진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단지 탐색하듯 한 걸음, 두 걸음.

여인과 노인의 발이 배회하다가, 약속이라도 한 듯 한 순간 땅을 박차고 쏘아졌다.

속도는 델핀이 더욱 빨랐다. 그러나 상대는 수십 년을 전장에서 구른 노회한 검사였다.

그는 살짝 물러나며 두 사람의 사이에 자그마한 틈새를 만들었다. 그러면서 좌하단에서 솟구치는 칼날.

검푸른 발톱 자국이 허공에 죽죽 그어졌다.

총 다섯 줄기.

한때 전성기에는 일곱 줄기에 달하는 금사검(?)을 구사하던 후작이었으나, 세월이 지나며 이제는 다섯 줄을 긋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럼에도 그 예리함만큼은 아직도 녹슬지 않은 채였다.

아니, 도리어 선택과 집중을 통해 더욱 강맹한 위력을 지니게 된 참격이었다. 동일한 다섯 줄기의 금사검이더라도 델핀과 수준차가 명확했다.

심지어 델핀은 선공조차 잡지 못했다.

자연스레 수세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므로 후작은 곧 다가올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의 앞에 일곱 줄기의 발톱 자국이 생겨날 때까지는.

불꽃처럼 타오르는 오러가 강렬한 열기를 흩뿌렸다. 암청색의 오러가 그 사이를 파고들며 저항했으나, 수의 열세는 극복할 수 없었다.

카각, 하고 금이 가는 소리와 함께 암청빛의 발톱 자국이 하나씩 박살나기 시작했다.

캉, 캉, 캉, 캉!

그리고 종래에는 마지막 발톱 자국마저 요격하고, 깃털처럼 호선을 그리는 두 개의 금빛 실선.

후작이 눈을 부릅떴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흉곽에 두 개의 검상이 새겨지고, 후작은 비틀비틀 뒤로 물러나 무릎을 꿇었다.

깊은 상처는 아니었다. 그러나 얕지도 않았다.

어느덧 후작의 목젖에는 델핀의 검극이 겨누어져 있었다.

“끝입니다.”

그 차가운 한 마디에, 후작은 큭큭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 숨이 가빠졌는지 쿨럭이며 제 가슴을 두드리기를 한참.

유르디나 후작은 달관한 눈빛이 되어 델핀을 올려다보았다.

“언제 금사검을 그 정도까지 익혔느냐?”

“훌륭한 교재가 하나 있어서, 연습을 좀 했죠.”

훌륭한 교재라니.

이 세상에 일곱 줄에 달하는 금사검을 구사할 수 있는 자가 존재한단 말인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유르디나 후작은 델핀의 말은 별개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묻지 말아달라는 뜻.

패자, 그리고 자식에게 거짓말을 한 부모가 무슨 염치로 캐묻겠는가.

그는 흐려진 동공으로 말했다.

“많이 컸구나. 그래, 유르디나의 후계자라면 마땅히 그래야지… 네 뜻대로 하거라. 이제 유르디나는 네 것이다.”

“아버님, 전 유르디나의 모든 것을 원해요.”

델핀은 아버지의 인정에도 여전히 냉막한 표정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도리어 검을 쥔 손에 살짝 힘을 더하기까지 했다. 검극이 살짝 전진하며 후작의 목젖에 자그마한 핏방울이 맺혔다.

그럼에도 후작은 태연했다.

그는 시치미를 떼듯 말했다.

“도대체 무얼 말이냐? 내가 가주의 자리를 물려준다면, 어련히 모든 것을 짊어지게 될 텐데.”

“가문의 진실.”

후작이 무어라 변명을 늘어놓기도 전에, 델핀은 으르렁거리며 더욱 가열차게 제 아비를 추궁했다.

“세리아의 어머니는 도대체 누구죠? 왜 신분을 그렇게까지 필사적으로 숨긴 거고… 알렉스는 어째서 인류와 엘프 사이를 이간질하고 있던 거냐고요.”

“세리아의 어머니는 천출이다. 우리 가문에 어울리지 않아 비밀로 했을 뿐이야. 그리고 알렉스는 단독행동…….”

“유르디나의 주인으로서 내리는 명령입니다.”

조금의 흔들림조차 없는 냉엄한 목소리였다.

델핀은 싸늘한 낯빛을 유지한 채 재차 경고했다. 마치 혈육의 정 따위는 고려 사항조차 아니라는 듯.

“모두 말하세요, 어서. 웃기지도 않은 변명 늘어놓지 마시고.”

후작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이내 기나긴 한숨을 내뱉었다.

“흐, 말하는 것이 네 어미를 똑 닮았구나. 참 성깔 있던 여인이었지…….”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 아닌가요?”

델핀의 입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온 질문이었다.

조금 더 많은 이야기를 캐내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그 물음의 내용 자체는 진심이었다.

델핀은 외동딸로 자라왔다.

여타의 고위 귀족들이 몇 명이나 되는 자식을 낳는 것과는 대비되는 행보였다. 그러니 가솔들은 당연히 유르디나 후작과 후작 부인의 사이가 좋지 않다고 생각했고, 이는 후작이 세리아의 어머니를 첩으로 들였을 때 더욱 공고한 사실이 되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단 한 번도 가족애를 보이지 않던 사내가 이러다니.

어이가 없다기보다는 당황스러웠다.

허나 유르디나 후작은 쉽사리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추억 속을 헤매는 듯 깊어진 눈빛으로, 그는 중얼거리며 과거를 토해냈다.

“난 그다지 재능 있는 검사가 아니었다. 오히려 말하자면, 검술에 한해서는 내 형님이나 누님이 더 뛰어났지. 그나마 인망은 있어 나를 따르는 가솔들이 있긴 했지만, 알지 않느냐? 유르디나의 법칙은 오직 하나라는 걸.”

델핀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이는 북부에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답할 수 있을 만큼 뻔한 문제였으니까.

강자존.

그것이 유르디나의 유일무이한 법칙이다.

“폭급한 형님과 신경질적인 누님 아래서 고생하는 가솔들을 보며 나는 수없이 자책했다. 어째서 내겐 재능이 없냐고, 저 둘보다 더 나은 유르디나를 만들어 갈 자신이 있는데… 더 나아가 더 나은 북부를 만들어 갈 수 있는데!”

“결국 유르디나의 가주 자리에 오르셨잖아요.”

“그래, 허나 정당한 방법은 아니었다. 그날 밤, 흑단처럼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이 찾아왔지…….”

흑단처럼 검은 머리카락.

일순 뇌리 속을 스치는 사내가 하나 있었지만, 델핀은 이내 쓴웃음을 머금으며 도리질을 쳤다.

검은 머리카락이 귀하긴 해도 유일무이한 유전적 특징은 아니었다.

델핀이 무심코 그를 떠올린 까닭은, 단순히 그녀가 요즘 그 생각에 푹 빠졌기 때문이겠지.

어이 없게도.

델핀은 살짝 달아오르려는 볼을 헛기침을 하며 식혔다. 그리고 잠자코 이어지는 후작의 말소리를 들었다.

“열등감과 자괴감으로 괴로워하던 내게 그녀가 말했다. 어째서 슬퍼하고 있냐고… 손바닥이 찢어져라 검을 휘둘러도 뒤엎을 수 없는 격차가 그리도 원망스럽냐고 말이다.”

이내 여인은 쓴웃음을 깨물었다.

긍정하느냐, 부정하느냐.

사실 이는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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