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3화 〉 5. 빵과 비수(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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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이 무슨 대답을 했을지는 잠작이 갔다.
그래서 델핀은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만 같았다.흉중에는 후작을 탓하고 싶은 말이 몇 개씩이나 떠오르고 있었으나, 그녀는 끝끝내 그 비난의 말을 뱉어내지는 않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델핀으로서는 단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절망이었으니까.
누가 후작의 절망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오로지 후작 자신만이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으리라.
이전에는 단 한 번도 고려해 본 적 없는 사정이었으나, 첫사랑은 여인을 변하게 한다.
보다 자비롭고 유연하게.
더불어 사랑하는 사내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무심코 가슴에 새기곤 했다.
이 또한 그 변화의 일부였다.
그리고 이는 너무나 많은 이들의 운명을 가를 분기점이었다.
“그렇게 나는 악마와 손을 잡았다. 그들의 도움에 힘입어 내 실력은 날이면 날마다 발전하기 시작했지. 그리고 몇 년 후, 나는 결국 바라던 대로 유르디나의 권좌 위에 올랐어.”
“그래서 행복하셨나요? 악마와 손을 잡아서?”
“아니.”
씹어뱉듯 던진 델핀의 물음에, 후작은 허탈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암흑교단에게 나는 유용한 협력자였다. 가주에 오르는 동안 내 실수를 뒤집어 쓰고 죽은 신하들이 몇 명인지, 그리고 어느 날 깨달았지. 암흑교단의 지시에 따라 인류와 엘프 사이를 이간질하며, 북부인들을 희생시키는 내가 형이나 누나와 무어가 다르단 말인가?”
“그래서 세리아의 어머니를 쫓아냈나요?”
“흐, 제법이구나… 아니, 사실 아직까지 들키지 않은 것이 기적이었지.”
유르디나 후작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체념의 기색이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세리아… 그 불쌍한 아이의 어머니는 흡혈귀의 혈족이지. 대수림에 봉인된 그 마물의 피를 잇고 있는 거야.”
예상하던 대로의 말이었지만, 델핀은 그 고백을 듣는 순간 파르르 떨리는 어깨를 제어할 수가 없었다.
세리아 유르디나.
그녀의 이복동생이었다. 한때는 경쟁상대로 여기기도 했고, 또 괴롭히기도 했지만 세리아는 델핀의 동생이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괴물의 피를 잇고 있다니.
이 사실이 알려지면 어떤 폭풍이 불어닥칠지도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델핀의 그 참혹한 표정을 보고 후작은 더욱 힘이 빠진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 아이에겐 말하지 말아다오.”
“세리아한테만 숨긴다고 해결될 문제인가요? 제국의 5대 귀족 가문 중 하나가 암흑교단과 결탁했어요! 세상 사람들이 전부 알게 될 텐데!”
“내가 모두 짊어지고 가면 된다.”
그러면서 후작은 델핀의 겨눈 칼날을 쥐었다.
델핀이 기함해서 뒤로 물러나려 했으나, 후작의 악력이 만만치가 않았다. 살갗이 찢어지고 피가 주르륵 흐르는데도 후작은 칼날을 쥔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평생 동안 아무것도 책임지지 못했던 삶이다. 나와 같은 고통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자식도 너 하나만을 두려 했지. 헌데 운명의 장난처럼 세리아가 태어나 버린 거야… 그 아이에겐 죄가 없지 않느냐.”
칼날을 빼내려던 여인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 말대로였다.
만일 유르디나 가문이 암흑교단과 협력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그 후폭풍이 어디까지 미칠지는 짐작조차 불가능했다. 제국 황실이 유르디나 가문을 멸문시키려 들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빠져나갈 구멍은 남아있다.
“나를 베거라.”
이 자리에서, 유르디나 후작의 목을 친다.
인류의 배신자를 유르디나의 손으로 도려내는 것이다. 그것도 유르디나의 미래가, 유르디나의 과거를.
물론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다.
부녀지간은 천륜이었다. 아무리 델핀이라도 이를 어기고 싶을 턱이 없었다.
자식이 부모를 벤다.
이보다 잔혹한 운명이 존재할까.
검을 쥔 델핀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감겨진 눈꺼풀의 떨림을 타고 속눈썹이 경련했다.
그 와중에도 유르디나 후작의 설득은 이어졌다.
“그러니 세리아에 대한 이야기는 부디 비밀로 해다오. 델핀… 내 딸아. 아비로서 하는 마지막 부탁이다.”
델핀이 해야 할 일은 간단했다.
이대로 검을 치켜들고 유르디나 후작의 목을 벤다. 그러면 델핀의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을 흉터가 남겠지만, 유르디나 가문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저울에 잴 필요도 없다.
개인과 가문의 영달 중 어느 쪽이 우선인지는, 델핀 그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델핀은 입술을 깨물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녀는 델핀 유르디나였으니까.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칼날이 높이 치켜들어졌고, 이후 노인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억!”
노인의 몸뚱아리가 볼품없이 땅 위를 굴렀다. 델핀이 치켜든 검은 어느덧 텅 빈 지반에 박혀 있을 뿐이었다.
도리어 노인의 명치를 강타한 것은, 여인의 발길질.
델핀은 이를 으득으득 갈면서 말했다.
“……비겁자.”
그 짧은 비난에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하지 않았다.
숨이 턱턱 막히는지 몸을 덜덜 떠는 아비를 앞에 두고, 딸은 말했다.
“책임을 지겠다면서 가장 편한 길을 택하려 하지 마세요. 아버님의 선택으로 희생당한 목숨이 몇이나 되는 줄 알아요?”
“내 희생으로 살아갈 목숨도 많다.”
헐떡이면서, 노인이 내뱉은 말에는 일말의 거짓조차 섞여 있지 않았다.
비록 힘이 빠졌으나 그 눈동자는 생생하기 그지 없었다. 노쇠한 몸뚱어리에 그만한 기력이 어디에 남아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델핀은 말없이 그 이글거리는 핏빛 눈동자를 마주했다.
아마도 그것이 올바른 선택일지도 몰랐다.
언젠가 델핀이 제 손에 아비의 피를 묻히는 날이 올 수도 있었다.
허나 지금은 아니었다.
델핀은 조용히 검을 칼집에 갈무리했다. 그러자 온몸에 진이 빠진 노인이 외치는 소리가 웅웅거리며 전해졌다.
“델핀, 힘들겠지만 결단해야 한다. 유르디나의 주인이라면 마땅히……!”
“닥치세요.”
그러면서 자신을 향하는 그 싸늘한 눈빛에, 후작은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를 싸늘하다 할 수 있을까.
맹렬히 흔들리는 동공과, 숨길 수 없는 습기가 묻어나오는 눈동자였다.
딸의 눈물 앞에 죄인이 되지 않는 아버지 따위는 없었다.
후작의 고개가 툭 떨어졌다.
“그럼 아버님의 선택은 유르디나다웠나요? 그리고 또…….”
델핀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은근슬쩍 미소를 띄웠다.
지금껏 당하고만 살았던 인생이었다.
마지막일지도 모를 장난을 치더라도 무례는 아니리라.
“사위 얼굴은 보고 가셔야죠.”
그러자 유르디나 후작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새어나올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허허허… 진심이냐? 유르디나의 차기 가주가?”
“누가 제 남편이라고 했나요?”
히죽, 하고 여인은 고혹적인 호선을 머금으며 말했다.
“두 자매 모두의 남편일지도 모르죠.”
그 말을 끝으로 델핀은 발걸음을 옮겼다.
한결 가벼워진 걸음으로.
사실 후작의 목을 베지 않은 까닭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아직 암흑교단의 전력에 대한 정보가 현저히 부족했다. 더불어 가문 내에 얼마나 많은 암흑교단의 세작이 심어져 있을지 몰랐고, 더불어 후작만이 암흑교단의 협력자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단도 부족했다.
무엇보다 이안은 좀 더 후작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할 것이다.
델핀이 보고 겪은 세상은 아직 부족했다. 이를 알려준 사내가 바로 곁에 있었다. 그 모자란 지식을 채워줄 사내가 옆에 버젓이 존재하는데, 굳이 거부할 까닭은 없었다.
다만 델핀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무척 충격적이었던 듯해서.
풀썩, 하고 등 뒤에서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혈압을 견디다 못해 쓰러진 후작의 단말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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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을 잃은 동안, 온갖 기억의 파편들이 뇌리를 찌르고 지나갔다.
출혈처럼 지나간 상처에서 감정이 흘러넘쳤다.
후회, 절망, 원망.
그러다 옅은 화상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후회하지 않아요… 선배.”
애틋한 미소, 뺨을 쓰다듬다 말고 땅바닥에 떨어지는 손.
핏자국만이 얼굴에 남는다.
“너무나 행복했어요. 지난 몇 달이, 꿈만 같아서……”
“그만.”
울먹이면서, 사내가 애원했다.
“그만해.”
그리고 나는 헐떡이면서 잠에서 깼다.
헐떡이는 숨소리가 거칠다. 나는 진절머리를 치듯 몸을 부르르 떨다가, 인기척을 느꼈다.
바로 내 옆이었다.
아마도 나를 간병하고 있던 여인 중 하나가 아닐까.
단지 하도 비몽사몽했던 탓인지 상대의 정확한 정체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황망히 낯가죽을 훑고 있다가, 사죄의 말을 내뱉었다.
“미안, 악몽을 꿔서…….”
“허허, 악몽이라.”
“응, 그래서 조금 놀랐…….”
자연스레 문답을 이어가던 내 입술이 굳게 잠겼다.
다름이 아니라, 내 귀에 닿는 목소리가 너무나 이질적이었던 탓에.
내 의문이 담긴 눈빛이 측면을 향했고, 그곳에서 마주쳤다.
깊고 깊어 그 끝을 알 수 없는 노인의 눈동자.
“계속하게. 아주 재미있거든, 반말을 들은 적은 오랜만이라… 하하하.”
제국의 검공이었다.
내 등을 타고 바짝 소름이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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