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4화 〉 5. 빵과 비수(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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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상대의 정체를 깨닫자마자 황급히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아무리 병자라 해도 예의를 차려야 할 상대였다. 대륙에 단 셋밖에 없는 마스터이자, 제국의 오롯한 권력자인 황제의 숙부가 바로 내 앞에 앉아 있었으니까.
제국의 검공.
본명은 딱히 의미가 없었다. 어차피 모두가 ‘검공’이라 부르며, 그 자신 또한 이전과 같은 삶을 보낼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마스터’는 이처럼 위대한 경지였다.
수십 년을 살아왔든 수백 년을 살아왔든 상관 없었다. 마스터에 오르는 순간, 그들은 이전의 모든 삶이 뿌리 뽑히는 진화를 경험한다.
농담이나 비유 따위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온몸이 재구성된다. 그렇게 탄생한 마스터의 육체는 보편적인 상식이 통하지 않았다.
노화조차 제멋대로 조절하는 족속들이었다. 이들을 정녕 ‘인간’이라 부를 수 있을지부터 의문이었다.
그래서 마스터들은 하나같이 제 옛 이름을 버린다.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이 바로 ‘호칭’이었다. 대륙의 만민들이 우러러 명명하는 영광스러운 새 이름.
검공 또한 과거의 이름을 버린 지 오래였다.
아직도 그 핏줄에 구애받고 있으나, 그까짓 혈통이 아니더라도 그는 나의 존중을 받기 충분했다.
대륙에서 가장 높은 경지에 오른 검사였으니까.
내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자 검공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너무 짓궃었나? 농담이네, 그렇게 당황할 것 없어. 그리고 사실 진짜로 그립기도 했거든. 반말을 들어본 적이 얼마만인지… 내 조카가 하도 싸가지 없던 시절에 들어본 게 마지막이었군.”
“못해도 수십 년은 되셨겠군요.”
“그래, 날을 잡고 흠씬 두들겨 패주니 조카 녀석도 얌전해졌거든. 쯧쯧, 그때 기개를 보였다면 내 뒤를 이을 훌륭한 검사가 되었을 텐데…….”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였다. 정작 그 내용은 미친 소리에 가까웠지만.
황제의 혈통은 고귀하다.
아무리 검공이 숙부라고는 하나 방계는 방계였다. 그런데 차기 황제가 될지도 모르는 적통을 두들겨 패다니.
사형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은 짓이었다.
그럼에도 검공이 아직 멀쩡히 살아숨쉬고 있다는 건, 두 가지 중 하나를 떠올려 보는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 선황 폐하의 우애가 돈독하여 일부러 봐주었을 가능성.
그리고 두 번째, 당시의 검공이 선황 폐하조차 건들기를 꺼릴 만큼 막무가내였을 가능성.
불경한 생각이 아닐 수 없었다. 제국의 창과 방패가 되어야 할 귀족이 황가의 사정을 가늠하고 있다니.
허나 누군가 내게 반드시 둘 중 하나에 전재산을 걸라고 한다면, 나는 후자의 가능성에 걸고 싶었다.
젊은 시절의 검공에 대한 풍문은 실로 무시무시했으니까.
지금은 그 성질머리가 한풀 유순해져서 다행이었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짧은 유흥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다만 여쭙고 싶은 점이, 검공께서 어째서 이곳에……?”
“그대들이 불렀으니까.”
난데없는 소리에 내 미간이 좁아졌다.
뭐지? 내가 검공을 부른 적이 있었던가.
흐릿해지던 정신이 맑아지며 수많은 기억들이 물밀듯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해일처럼 뇌리를 덮친 화상 속에서, 나는 몇 가지 정보를 추려낼 수 있었다.
그제야 나는 화들짝 놀라 반문했다.
“혹시 못 들으셨습니까? 제가 그 괴물을 토벌하기로 했다고…….”
“들었지. 그런데 자네가 실패하면? 누군가는 그 뒤처리를 해야 하지 않겠나.”
그렇게 말하는 검공의 입가는 희미한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흡족한 미소였다.
“물론 쓸데없는 걱정이었지. 잘해 주었네, 이안 페르쿠스.”
“과찬의 말씀입니다. 오히려 제가 벌집을 쑤신 면도 있어서…….”
“중요한 것은 결과일세.”
나지막하지만 강한 힘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과연 황실의 큰어른다운 위엄이었다. 내 입이 곧장 다물어졌다.
“엘프 사이에 퍼진 사교는 언제든 터질 수 있는 폭탄이었네. 설령 나와 성자가 왔더라도 그 괴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많은 희생이 따랐겠지. 그래서 내가 자네의 활약을 높이 치는 걸세.”
낯이 간지러울 정도의 칭찬이었다.
나는 무어라 말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이내 살짝 고개를 숙여 솔직한 감사를 표했다.
나를 높이 평가해 주겠다는데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기왕 이렇게 된 김에 나는 궁금했던 점을 모두 물어보기로 했다.
“그렇다면 이후 엘프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황제 폐하께서 따로 의중이 있으십니까?”
“그 문제야말로 차차 논의해 나가야겠지.”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은 대답이었다.
검공은 나와 달리 진짜배기 ‘용혈 문자’ 소유자였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지고 있는 무게를 생각해 보면, 이토록 신중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당연했다.
다만 안심하라는 듯 검공은 몇 마디의 말을 덧붙여 주었다.
“엘프들이 어떻게 나올지 봐야겠지만, 당장 엘프가 우리를 공격하지 않는다면 제국 측에서도 엘프와 전쟁을 지속해야 할 유인은 없네. 침엽수림처럼 척박한 땅을 빼앗아 봐야 무얼 하겠는가? 더불어 제국 측에서는 협상 결과에 따라 북부의 일부 토지를 엘프들에게 내어줄 용의도 있네.”
“토지를 내어주다니요? 진심이십니까?”
“내가 어찌 허언을 하겠는가?”
불신을 담은 내 물음에 검공은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토록 엘프를 몰아붙여 인류의 땅에서 추방한 것이 제국이었다. 또 어느 나라든 간에 국토의 경계에 예민하지 않은 곳은 존재하지 않았다.
당연히 제국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토지를 떼어주겠다니.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제국의 영토가 한 뼘이라도 작아지는 것을 반길 황실이 아니었다.
내 아리송한 반응에 검공은 큭큭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게. 북부에는 아직 드넓은 미개척지가 존재하지. 그중 일부에 불쌍한 엘프를 이주시킨다 한들, 제국에게 어떤 손해가 있겠는가?”
“하지만 애초에 엘프에게 제국의 영토를 할양한다는 것 자체가… 아.”
조용히 반론을 제기하려던 나는 곧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제국이 패잔병에 불과한 엘프에게 영토를 순순히 내어줄 리가 없었다.
제국이 자비를 베푸는 대상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엘프를 제국의 신민으로 편입시킬 생각입니까?”
“그 또한 차차 검토해 볼 문제일세. 사실 인류와 엘프 사이의 갈등은 너무 오랜 시간 고착화되었거든. 상호간에 남은 앙금도 해결해야 하고 말이지…….”
얼핏 듣기엔 부정적으로 보이는 답변이었으나, 정작 명료한 의사 표현은 부재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다소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말하려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당장 암흑교단이 활동을 시작한 뒤였다.
인류의 편은 조금이라도 많을수록 좋았다. 더욱이 살점 괴물의 습격 이후 엘프의 세력은 더욱 약화되어 있었다.
제국에게 칼날을 들이밀 수 있을 턱이 없었다.
그렇다고 엘프의 번식력이 엄청난 것도 아니고, 그들이 본격적으로 인류에게 칼날을 들이댈 무렵이면 벌써 수백 년이 지나 있으리라.
수백 년의 시간은 상상 이상으로 길다.
원수에 불과하던 내가 엘프 마을에서 인정받기까지 몇 주가 채 걸리지 않았다. 엘프 또한 인류에게 그렇게 인정받는 날이 빨리 찾아오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침엽수림은 생존하기 너무 힘겨운 환경이었으니까.
내가 복잡한 눈빛을 하자 검공은 내게 잠깐의 여유를 허락해 주었다.
그가 침묵하기를 몇 분.
내 입에서는 기나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폐하의 은덕에 감사드립니다. 사실 저 또한 엘프들이 마음에 걸렸던지라…….”
“알고 있네.”
검공은 여유롭게 내 말을 받으면서,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만약 결과가 좋지 않았다면 자네는 배신자로 몰렸을 걸세. 그럼 내 칼에 자네의 피가 묻었을 수도 있겠군, 하하!”
농처럼 던지는 말이었으나, 나는 그 말 속에 칼날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모를 만큼 멍청이가 아니었다.
경고라기보다 조언이었다.
앞으로 행동을 조심하지 않으면, 언제든 꺾일지도 모른다는 우려 섞인 주의.
그럼에도 나는 항변을 하고 싶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아직 정신이 몽롱했던 탓일까.
그 한 마디를 내뱉자마자 내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지금 내가 누구에게 반론을 펼친 거지?
얌전히 고개만 주억거려도 모자란 상대한테 말이다.
그러나 검공은 의외로 불쾌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라 말해보라는 듯 흘깃 내게 눈짓을 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나는 최대한 검공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더듬더듬 이유를 덧붙여 가야 했다.
“인류와 엘프의 갈등에는 특정한 세력이 개입하고 있었고, 그 세력의 정체가 암흑교단일 가능성이 높이 점쳐지던 상황이었습니다. 제 몸을 던져서라도 진실을 규명하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역으로 그 선택을 후회하게 됐을지도 모르지.”
“후회하지 않습니다.”
또 다시 흘러나온 강한 어조.
화들짝 놀란 내 몸이 움찔, 떨렸으나 여전히 검공은 어떠한 불쾌감도 내비치지 않고 있었다.
그 시선을 견디다 못한 내 입이 솔직한 마음을 실토했다.
“이 기회에 깨달았습니다. 제가 알고 있던 세상이 너무나 좁고 모자라다는 사실을… 그날 제가 엘프를 택하지 않았다면, 전 그 협소한 세계에 만족하고 있었겠죠. 더는 까닭도 모르면서 적을 증오하거나 죽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후후, 낯 간지러운 소리를 잘도 하는군. 그리고 세상을 구할 영웅치고는 너무나 유약해.”
나무라는 듯한 검공의 말에 나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괜히 말했다 싶었다. 검공처럼 날 때부터 강한 이는 아마도 내 마음을 모를 터였다.
허나 이어지는 검공의 말은 내 예상과는 정반대였다.
“하지만 검사로서는 좋은 경험이지. ‘세계’를 인식하는 과정… 반드시 그 감각을 기억하게. 검사는 그 세계 속에서 스스로를 검처럼 우뚝 세울 수 있어야 하네. 더 나아가, 그 세계를 깨트릴 수 있으면 더 좋고.”
“……무슨 소리십니까?”
“언젠간 알게 될 거야. 그리고 그때가 되면 비로소 나의 일검을 받을 수 있을 걸세.”
마스터와 단 한 번이라도 공방을 나눌 수 있는 경지라니.
까마득한 길이었다.
내가 그렇게 헛웃음을 터트리자, 검공은 옷을 탁탁 털며 몸을 일으켰다.
슬슬 떠나가겠다는 뜻이었다. 대화를 나눈 지 몇 분 되지도 않았는데, 참 종 잡을 수 없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떠나기 전, 검공은 마침 떠올랐다는 듯 품에서 인장 하나를 꺼내 건넸다.
고풍스러운 원목으로 이루어진 도장에는 용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황제의 권력을 상징하는 물건이었다.
이미 내게는 비슷한 물건이 존재했다. 제국 첩보부의 아카데미 지부를 총괄할 권한을 상징하는 인장이었다.
그렇다면 이 인장의 의미는 무엇일까.
검공은 별 것 아니라는 듯 내게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자네에게 전권을 맡기기로 했네.”
“무슨 전권을…….?”
“유르디나 가문.”
내 입이 단숨에 다물어졌다.
검공이 건넨 인장이 지닌 의미가 상상 이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탓이었다.
“인류의 배신자를 어떻게 처리할지, 지켜보겠네.”
시험이다.
그것도 함정에 가까운.
나는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깨닫고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유르디나 가문쯤 되는 거물을 내 직권으로 처리한다는 건 자충수였다.
그만한 정치적 부담을 짊어져야 하기 때문이었다.
얼핏 보기에 황제가 나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듯 보일지 몰라도, 그 이면에는 보다 섬뜩한 의미가 내재되어 있었다.
시험해 보겠다.
제국 황실을 향한 충심부터 시작해서, 정무 감각이나 공과 사를 얼마나 잘 구분하는지 지켜보겠다는 뜻이었다.
검술학부 출신인 내게 그러한 재능이 있을 리가 없을 텐데도.
최선은 겸양을 가장해 이 제안을 거절하는 것이었다.
단박에 판단을 마친 나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벌써 문 손잡이를 붙잡고 있는 검공을 향한 손을 뻗었다.
“저, 검공 어르신!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제게 과분한…….”
그러나 검공이 문 손잡이를 잡아당긴 순간.
쏟아져 들어오는 사람들을 보고 입을 다물어야겠다. 다들 낯익은 얼굴이었다.
성녀와 엘시 선배, 엠마와 황녀. 그에 더해 다소 귀찮아 보이는 표정의 유렌까지.
여인들은 금세 내게 달라붙기 시작했다. 지금껏 검공 탓에 참고 있었을 뿐이지, 누구보다 속이 바짝바짝 말랐을 터였다.
“이, 이안! 괜찮아요?”
“주인님, 혹시 불편한 곳 없으세요? 혹시 음험한 성국의 모 탕녀가 수작을 부렸다던지…….”
나는 그 파도에 휩쓸리느라 차마 검공을 잡지 못했다.
그는 단지 슬쩍 미소를 지으며 떠나갈 뿐이었다.
“여복에 조심하게나, 후배.”
참으로 암담한 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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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내가 찾아갈 곳은 정해져 있었다.
매혹적인 여인의 냄새가 풀풀 풍기는 방이었다. 어슴푸레한 조명부터 시작해서, 내부가 반쯤 비치는 잠옷까지.
언젠가 그녀가 내게 말한 적이 있었다.
이러한 잠옷은 오직 한 사람한테만 보여준다고. 더불어 나체의 일부조차 보여주었던 사내는 오직 하나뿐이라고.
델핀 선배는 후후, 하고 웃음을 토해내며 내게 물었다.
“왔어?”
내겐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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