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5화 〉 5. 빵과 비수(93)
* * *
오랜만에 마주한 델핀 선배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 미모를 표현하기 위해 더 많은 묘사를 동원해야 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였다. 늘 그렇듯 고혹적이고 뇌쇄적인 여인의 향기는 사내의 후각을 마비시킨다.
마치 술에 취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성과 욕망의 구분이 옅어졌다. 더불어 상대는 여태껏 두 번이나 품에 안았던 암컷이 아닌가.
수컷으로서의 본능이 맹렬히 뇌리를 뒤흔들고 있었다.
허나 오늘은 보다 중요한 용무가 있던 참이었다.
나는 일부러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정신줄을 붙잡았다. 그러든 말든 델핀 선배는 슬쩍 눈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 눈빛이 애틋했다.
애정이 묻어나오는 시선이었다. 나는 그 마음이 고마우면서도 부끄러워 슬쩍 눈을 돌렸다.
물론 델핀 선배의 몸에 달라붙은 내의가 자극적이었던 탓도 있었다.
흐트러진 앞섬 사이로 은밀한 계곡이 보였다. 나는 무심코 그 얇은 천 너머의 광경을 상상하다가, 이내 애써 내 머릿속에 떠오른 화상을 지워내야 했다.
그래,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여흥을 즐기는 것은 대화를 나눈 이후에 하더라도 충분했다.
“델핀 선배,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아니.”
델핀 선배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팔짱을 끼고 의자 등받이에 상반신을 기대는 폼이 꽤 무방비했다. 팔 위에 유방이 얹어져 더욱 강조되는 모양새라 그런가.
예전이라면 모르겠지만, 이제는 나도 알 수밖에 없었다.
지금 델핀 선배가 나를 유혹하고 있다는 사실을.
하여간 장난을 참 좋아하는 여자였다.
“서방님께서 쓰러지셨는데, 어찌 아녀자가 잘 지낼 수 있겠어? 하루하루 우리 서방님 걱정만 하고 살았지.”
“딱히 야위어 보이진 않습니다만.”
“초췌한 몰골을 하면 곤란하잖아. 나도 여자인데, 당신한테 예쁘게 보이고 싶지 않겠어?”
나는 흐, 하고 헛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델핀 선배의 말에는 아마 반쯤 진실이 섞여 있을 터였다. 아무래도 우리 사이가 사이다 보니, 걱정이 되긴 했겠지.
하지만 종일 내 걱정만 하고 지냈다는 고백에는 어폐가 있었다.
내 상처는 그다지 중하지 않다.
사실 중상에 속하긴 했지만, 오장육부가 박살나고 전신에 관통상을 입었던 과거에 비하자면 얕은 상처였다. 고작해야 레오릭과 싸우며 얻은 골절상과 타박상이 전부였다.
그래서 나는 비교적 빠른 시일 내에 몸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이다.
당장 지난 시체 거인과의 전투와 비교해 봐도 그랬다.
당시 나는 꼬박 몇 주를 누워 있어야 했다. 이러한 전례를 고려해 보면, 내가 레오릭과 싸우며 얻은 상처는 우스운 수준이었다.
중상이긴 해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정도.
델핀 선배가 걱정할 만큼의 치명상은 아니었다.
그 증거로 나는 성녀에게 잔소리를 두 시간만 듣고 탈출하지 않았는가. 이는 실제로 내 부상이 예전에 비해 크지 않다는 뜻이었다.
성녀는 내가 중상을 입을수록 엄한 태도를 취하곤 했으니까.
사실 이는 비단 성녀에 한정된 이야기는 아니었다. 내 주위를 둘러싼 여인들 대부분이 그랬고, 그 탓에 나는 몇 분 전까지 끝없이 이어지는 잔소리에 시달려야 했다.
그나마 세리아가 없어 다행이었다.
듣기로 최전선에서 남은 문제를 정리 중이라고 했던가.
오늘이나 내일 중에 온다는데, 아마도 오는 대로 기별을 할 듯했다. 그러면 또 바가지의 시작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붙잡혀 사는 신세가 되었는지.
나는 속으로 한숨이 푹푹 나왔으나, 지금은 진정으로 한숨을 쉬어야 할 이유가 따로 있었다.
내 입에서 직설적인 언어가 흘러나왔다.
“유르디나 가문에 대한 처우를 제게 맡기셨더군요.”
여유만만하던 델핀 선배의 태도에 균열이 일어난 것은 그때였다.
교태롭던 장난기가 지워진다.
잠시 흠칫 몸을 굳힌 그녀는 이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곤란하다는 듯, 다시금 상반신을 똑바로 세우며 탁자 위롤 검지로 두드리기를 몇 차례.
델핀 선배는 굳이 내 고백의 주어를 캐묻지 않았다.
유르디나 가문의 운명을 결정 지을 수 있는 존재는 제국에 오직 둘뿐이었으니까.
하나는 델핀 선배.
그렇다면 나머지 하나는 뻔했다.
델핀 선배의 입에서 옅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했는데?”
“모르겠어요.”
솔직한 내 심정이었다.
델핀 선배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하고 웃으며 다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 핏빛 눈동자가 잠시 측면을 향하고 있었다. 고민에 잠겼을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유능한 지도자는 결단을 늦추지 않는다.
델핀 선배 또한 마찬가지였다. 여인의 몸이 벌떡 일으켜지더니, 이내 새하얀 손길이 찬장을 헤맸다. 그렇게 고급스러운 포도주 한 병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자연스레 술잔 두 개가 탁자 위로 오른다.
나야 좋지만, 시기가 적절하지 못했다. 이처럼 중차대한 시점에 음주를 할 수는 없었다.
내 입에서 자그마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델핀 선배, 제 말 못 들으셨어요? 가문의 명운이 달릴 일이라니까요. 당장이라도 우리 둘이 머리를 맞대야…….”
“안 돼.”
담백하면서도 단호한 어조였다.
그 심계를 꿰뚫지 못한 내 입이 꾹 다물어졌다. 델핀 선배는 어느덧 술병을 기울이고 있었다.
쪼르륵, 하고 두 개의 잔에 차례로 차오르는 홍옥빛의 액체.
향긋한 주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언제나와 같은 전개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델핀 선배가 다소 권태로운 표정을 짓고 있다는 사실뿐.
이 또한 델핀 선배다운 모습이었다. 나와 야밤의 결투를 벌이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늘 이러한 태도를 견지해 왔다.
권태롭고 지루하다.
세상 모든 것에 염증이 나 질려버렸다는 낯빛이었다.
“아버님께서 구금되셨으니, 유르디나의 가주는 이제 나야. 침실까지 감시하지는 않더라도 내 모든 일정이 감시대상이겠지. 그러다 혹시 나와 서방님이 의논을 하는 티라도 내면?”
나는 굳이 뒤에 이어질 말을 캐묻지 않았다.
황제의 신임을 잃는다.
나와 유르디나 가문 어느 쪽에도 좋지 않은 결론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일말의 아쉬움을 버리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잃고 싶지 않아.”
털썩 자리에 주저앉으면서, 델핀 선배는 제 다리를 끌어안듯 상반신을 앞으로 기울였다. 평소처럼 절도와 기품 넘치던 모습이 아니었다.
이처럼 무방비한 델핀 선배를 목격할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오직 나뿐이리라.
가녀린 목소리가 이어졌다.
“당신이든, 가문이든… 어느 것도 잃기 싫어.”
그녀답지 않게 유약한 말소리였다.
어린아이의 투정이라고 해도 좋았다. 둘 중 무엇도 잃기 싫다는 것은 개인적인 바람에 불과했으니까.
만일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델핀 선배는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다. 이를 모를 리가 없을 텐데도, 그녀는 내게 떼를 쓰고 있었다.
나와 가문, 그 어느 쪽도 잃기 싫다고.
동시에 델핀 선배의 마음 속에서 나의 중요도가 그만큼 치솟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가문과 저울질을 해야 할 정도로.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더더욱 우리 둘이 머리를 맞대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안 돼, 나는 객관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거든. 그리고 우리 둘이 자주 모이는 모습을 보일수록 악영향이야.”
그렇다면 한동안은 델핀 선배와의 만남을 자제해야 한단 뜻이었다.
적어도 이처럼 비밀스러운 대화는 나누지 못하겠지.
아쉬운 마음에 나는 입맛을 다시면서, 다시금 고민에 잠겼다.
그렇다면 이 난관을 나 홀로 해결해야 한단 말인가?
오늘 안에 짧은 결론을 내릴 수도 있겠지만, 허술한 합의는 도리어 독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컸다.
델핀 선배는 말없이 고민에 빠진 나를 바라보았다.
지루할 만도 한데, 그녀는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옅은 미소마저 맺고 있었다. 빙글빙글 도는 잔 안에서는 포도주가 찰랑이고 있었다.
결국 침묵을 깬 쪽은 델핀 선배였다.
“책사를 두면 되잖아?”
“……?”
의문을 담은 내 눈동자가 델핀 선배를 향했다.
그러자 그녀는 별 것 아니라는 투로 조언을 이어갔다.
“굳이 내가 아니라도 세상에 똑똑한 사람은 많아. 네 주변에도 한 명쯤은 있지 않겠어?”
아, 하고 나는 무심코 탄성을 터트렸다.
그러고 보니 있었다.
내가 가장 신뢰하는 친구이자, 머리도 비상한 인재가.
레토 아인스턴.
나는 곧장 뇌리를 치고 지나가는 이름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델핀 선배라면 몰라, 나와 막역한 사이인 레토와 고민을 나눈다고 제국 첩보부가 제동을 걸 까닭은 없었다. 그리고 레토의 두뇌라면 반드시 내가 만족할 만한 방안을 떠올려 주리라.
내 안색이 밝아지자 델핀 선배는 픽,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내가 걱정됐어?”
“그야 당연… 아니, 뭐. 누구라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나는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평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델핀 선배가 걱정됐냐고?
애초에 답이 정해진 물음이나 다름없었다.
나와 수없이 사선을 넘고, 또 두 번의 잠자리를 함께한 여인을 걱정하지 않을 사내가 존재한단 말인가.
만일 존재하더라도 ‘인간’이라는 표현에 해당할 수 있는지 의심스러운 수준이었다.
델핀 선배는 느긋하게 잔을 치켜들며 말했다.
“후후, 벌써부터 고민이 많아 보이네? 최소한 오늘 밤 정도는 잊어도 될 텐데… 기쁜 날이잖아?”
“아니요, 그럴 수는 없죠. 엘프의 생활을 보장해 주신 점에 대해서도 감사…….”
“그 엘프 중 하나가 북부를 구했으니까.”
말을 이어가던 내 입이 절로 다물어졌다.
나도 들었다.
포프 영감의 희생에 대해서.
그의 삶은 오랜 시간 동안 증오로 점철되어 있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일은 제 심장마저 괴사시킨다.
그럼에도 마지막 순간, 그는 그토록 싫어하던 인류를 위해 제 몸을 내던지기를 택했다.
포프 영감이 내게 말한 적이 있었다.
빵은 빵으로 갚아야 한다고.
그래서 그는 목숨을 던졌을까. 내가 몸을 던져 마을의 엘프들을 구했으니까.
나는 괜히 먹먹해지는 가슴에 침묵을 지키는 수밖에 없었다.
“유르디나는 핏값을 잊지 않아. 그것이 우리가 흘린 피든, 우리를 위해 흘린 피든… 그의 희생은 마땅한 보상을 받을 거야.”
“……감사합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체를 하려고 했는데, 내 목소리에는 옅은 물기가 묻어나오고 있었다.
나는 또 다시 빚을 졌다.
네드를 잃고, 포프 영감을 잃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래야 할 테지.
내 길은 목숨 위에 있었다. 누군가의 희생을 짓밟지 않고 나아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허나 나는 오늘 다시금 각오를 다졌다.
세상이 잊더라도 나만큼은 그들을 기억하겠다고.
델핀 선배는 이해심이 많은 여자였다.
내가 마음을 추스를 수 있도록 기다려 주었고,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밤을 보내기까지 했다.
그 다음에는, 뭐.
어느덧 내 밑에는 델핀 선배가 깔려 있었다. 흐트러진 옷매무새와 달콤한 여체의 향기가 코끝을 농밀하게 휘감았다.
살짝 붉어진 낯으로, 여인은 슬쩍 눈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사내의 심장을 쥐어짜기라도 하려는 듯이.
“결국 오늘도 이렇게 되네, 서방님?”
나는 반사적으로 그 말을 부정하려다가, 이내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 말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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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리아는 기분이 좋았다.
심장이 솜털이 되어 허공에 흩날리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벅찬 마음은 거친 박동이 되어 세리아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북부가 맞이한 절체절명의 위기는 해결되었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한 이가 세리아가 애정해 마지않는 선배였다.
세리아는 그 사실만으로도 눈물을 흘릴 만큼 기뻤다.
북부를 뒤덮을지도 모를 괴물이 사라졌으니, 사랑하는 언니 또한 마음이 평온해졌으리라.
더불어 악신의 권속을 연이어 쓰러트린 이안 선배의 명성도 더욱 높아질 터였다.
가족과 사랑, 두 사람에게 찾아온 호재였다. 세리아가 기뻐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제 남은 걱정은 오직 하나뿐.
바로 이안의 안위뿐이었다.
비록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지만, 불안은 일말의 가능성을 파고들고 심중에 똬리를 튼다. 세리아는 이안이 자랑스러우면서도, 매일 밤 초조한 마음에 손톱을 몇 번이나 물어뜯어야 했다.
하지만 이제 그 번민의 밤과도 안녕이었다.
이안이 의식을 차렸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야기를 접한 즉시 세리아는 귀갓길에 올랐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결정이라 본가에 기별조차 제대로 가지 않았을 터였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세리아는 델핀이 가장 신임하는 동생이었다. 가장 비밀스러운 장소까지 포함해서, 그녀가 가문에서 오고가지 못할 장소는 없었다.
문지기의 경악을 뒤로 하고 세리아는 바삐 층계를 올랐다.
아무리 이안이 보고 싶더라도 체계는 지켜져야 했다.
세리아는 유르디나의 가신이었고, 본가에 도착하면 당연히 가주에게 보고부터 올려야 했다.
시각은 이미 심야였다.
델핀은 집무실이 아니라 침실에 머무르고 있으리라. 어쩌면 피로를 이기지 못해 먼저 잠을 자고 있을지도 몰랐다.
오히려 좋았다.
그럼 언니에게 보고를 올리는 그 짧은 시간마저 생략할 수 있을 테니까.
물론 세리아의 기대가 배신당할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아직 델핀의 침실에서는 은은한 조명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 온기에 세리아는 무심코 한숨을 내쉬었으나,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델핀 또한 세리아가 이안만큼이나 존경하는 상대였으므로.
하지만 또 한 걸음을 내딛은 순간.
“결국 오늘도 이렇게 되네, 서방님?”
난생 처음 들어보는 교태로운 음색에, 세리아의 몸이 감전이라도 당한 듯 굳어버렸다.
델핀의 목소리였다.
어린 시절부터 델핀만을 목표로 살아온 세리아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제 언니의 목소리를 분간해내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세리아는 차마 한 줌의 의혹을 지워버릴 수 없었다.
델핀의 어조가 너무나 낯설었던 탓이었다.
마치 애교라도 부리듯, 상대의 애정을 갈구하는 목소리.
세리아는 무심코 숨을 죽인 채 자세를 낮추었다. 그리고 기어가듯 엉금엉금 걸어, 희미한 빛이 새어나오는 문밖에 주저앉았다.
그제야 방 안의 기척이 느껴졌다.
둘이었다.
그리고 너무나 낯익었다.
푸르른 눈동자가 불신을 가득 담고 부릅떠졌다.
그러자마자 소녀의 고막으로 굴러떨어지는 사내의 옅은 웃음소리.
“……그러게나 말입니다.”
세리아는 두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틀림없었다.
이안의 목소리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