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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397화 (397/649)

〈 397화 〉 5.5 막간: 금과 은(2)

* * *

아직도 땅에는 새하얀 눈이 쌓여 있었다.

오랜 시간 눈보라가 몰아친 흔적이었다.

마계는 영원한 겨울을 나는 곳이다.

그곳에서 불어온 바람은 북부 전역에 눈발을 흩날렸다. 본래부터 북부는 느닷없이 내리는 폭설에 익숙하기는 했으나, 지저에서 올라온 눈구름은 이야기가 달랐다.

그 적설량이 어마어마했던 탓이다.

북부는 추운 만큼 건조했다. 종종 폭설이 내리긴 해도 그 빈도는 높지 않았다.

그런데 몇 주 동안이나 눈보라가 끝없이 몰아치다니.

내가 레오릭을 쓰러트리지 않았다면, 북부는 괴물이 아니라 눈으로 멸망했을 터였다.

여전히 남아있는 잣눈이 그 증거였다.

발목 깊이까지 쌓인 적설은 보행에 심대한 지장을 주었다.

동일한 거리라도 눈밭을 걸어가기 위해서는 몇 배나 되는 힘이 필요했던 까닭이었다.

욕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지만, 나는 불평을 내뱉을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앞장서 걷고 있는 일련의 무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늘씬한 몸과 뾰족한 귀, 그리고 수려한 외모까지.

한때 신의 축복을 받았다고 여겨졌던 이들의 정체는 바로 ‘엘프’였다.

인류의 적이자, 북부로 쫓겨난 야만인들.

나는 그들의 뒤를 따라 걷고 있었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인간… 아니, 이안이라고 했나?”

침묵의 행진 속에서 처음으로 던져진 말이었다.

그 시선은 나를 향하고 있지 않았으나, 은은한 온기가 담긴 목소리에는 나를 걱정하는 마음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이 오지랖 넓은 엘프 사내의 이름은 ‘루게트’였다.

엘프 마을에서도 나와 특히 친하게 지냈던 엘프 중 하나였던지라, 나는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말을 받을 수 있었다.

“편한 대로 불러.”

“아무리 그래도 ‘인간’은 조금 정 없지 않아? 마을에서야 인간이 너 하나밖에 없었지만.”

“애칭이라고 생각하면 되지, 뭐. 인간 대표 같은 느낌도 들고 좋네.”

나와 루게트가 한담을 나누자, 주위에서 흘깃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오랜만에 만난 마을의 엘프들은 나를 어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새 또 인류의 사회에 적응을 끝마쳐 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예전에는 몰랐을 터다.

‘이안 페르쿠스’라는 이름이 얼마나 막중한 무게감을 지니고 있는지.

나는 인류의 떠오르는 영웅이자, 제국을 대표하는 신진 검사 중 하나였다. 더불어 내 인맥의 면면 또한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제국의 5대 귀족 가문 중 하나인 유르디나가 내 편이다.

그리고 내 배후에는 황녀와 황실이 존재하고 있었고, 성국의 성녀 또한 나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

내 출신이 자작가의 차남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이미 제국 권력의 핵심에 위치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아무리 말해봐야 실감하지 못했지만, 유르디나 성에서 인류와 섞여 지내며 엘프들은 자연스레 깨달았으리라.

내 등에 얹어진 인류의 기대가 보통이 아니라는 사실을.

정작 나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는데.

내 입술에 드리운 쓰디쓴 호선이 짙어졌다.

루게트도 나를 따라 쓴웃음을 깨물었다.

“나는 말이야, 아직도 잘 모르겠어.”

“뭘?”

“널 마을에 받아들인 거.”

느닷없이 소환된 과거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면 그랬던가.

당시 아비앙과 단 둘이 마을에 떨어진 나를 받아들인 이도 루게트였다.

나는 괜히 서운한 기색을 보이며 되물었다.

“후회되냐?”

“어느 면에서는.”

걸음을 옮길수록 새하얀 입김이 풀풀 나린다.

어딜 보나 세상은 온통 새하얗기만 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넌 우리 마을이 품기에 너무 큰 존재였던 것 같아. 우리는 근근이 나무 죽이나 끓여먹고 살던 엘프들이었잖아. 그런데 네가 오고 나서, 너무 많은 것이 달라졌어. 죽을 뻔한 적도 있고.”

“그건 미안하게 됐…….”

“널 탓하려는 게 아니야.”

가장 앞장 서 걷고 있던 이샤의 걸음이 서서히 느려졌다.

목적지가 가까워졌다는 뜻이었다.

늘 까칠하면서도 생명력이 넘치던 이샤는 오늘따라 조용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 사정을 캐묻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듣지 않아도 들렸으니까.

무릇 오랜 이웃이란 그러한 존재다.

“사실 처음에는 너무 놀라고 얼떨떨하기도 했거든. 왜 우리 같이 힘없는 엘프들이 이처럼 커다란 전란 가운데 놓이게 되었을까… 차라리 배를 좀 곯더라도 나무 죽이나 끓여먹으면서 살면 어땠을까, 하고.”

나는 묵묵히 루게트의 말을 되새겼다.

그 심정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나 또한 그러지 않았는가.

어느 날 내게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가 도착했고,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사선을 넘고 살과 뼈를 깎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나는 강박과도 같은 자문을 멈출 수 없었다.

나는 어째서 이러고 있는가.

아니, 왜 하필 나인가.

묻고 물어도 대답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 사실에 넌덜머리가 나서 모든 것을 놓고 싶었던 적도 많았다.

그럼에도 길은 이어진다.

지금 내가 도달한 곳까지.

눈과 나무로 만들어진 무덤은 주변의 풍경과 구분이 가지 않았다. 얼핏 보기에는 눈이 자연적으로 쌓여 만들어진 구릉과도 같은 모양새였다.

그제야 모든 엘프들의 발걸음이 멎었다.

침묵을 지키고 있던 이샤의 잇새로 흐릿한 신음이 새어나왔다. 그리고 풀썩 무릎을 꿇고, 땅에 떨어지는 눈물 몇 방울.

눈과 얼음의 지반은 그 온도를 견디지 못했다.

하나둘씩, 엘프들이 무릎을 굽힌다. 고인을 향한 엘프 최고의 예우였다.

이 자리에 꼿꼿이 서 있는 자는 오직 나와 루게트뿐이었다.

“……원망스럽지 않아?”

가까스로 짜낸 물음이었다.

무덤을 앞에 둔 순간부터, 나는 숨이 턱 막히고 말았다. 나의 욕심으로 또 누군가가 희생을 당한 것만 같아서.

엘프들이 흘리는 눈물이 비가 되어 내린다.

그 온기의 비를 맞는 설원처럼, 내 가슴도 푹푹 패였다.

나는 겁에 질린 아이처럼 넋두리를 이어갔다.

“내가 아니었으면 포프 영감이 죽을 일도 없었잖아. 너희가 그 고생을 겪을 일도 없었고, 괜히 인간과 엘프 사이에 끼어서…….”

“고맙다, 인간.”

그러나 그에 응하는 루게트의 목소리는 상상 이상으로 단단해서, 나는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턱, 하고 엘프의 손이 내 어깨 위로 얹어졌다.

“우리는 언제나 도망치고 살았어. 무려 수백 년 동안이나… 그러다 보니 진실이 무엇이든, 오로지 생존에만 눈이 벌개져 있었지. 레오릭은 우리의 그 연약한 면모를 파고들었던 거야. 오랜 시간 도망만을 반복해 오며, 결국에는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이유마저 잊어버리고 말았던.”

두어 번 내 어깨를 두드린 루게트의 손이 내 옷깃을 잡았다. 그리고 그는 앞장 서 걷기 시작했다.

무덤의 바로 앞까지.

나는 얼떨결에 루게트의 손길에 이끌려 그의 옆에 섰다.

“포프 영감님도 마찬가지였겠지. 끝없이 자책하고, 그러다 견딜 수 없어 책임을 전가하고… 하지만 끝내는 그토록 증오하던 인간을 위해 제 목숨까지 걸었잖아.”

“나는, 그러니까…….”

“어쩔 수 없는 거야.”

한숨처럼 토해진 한 마디에 나는 다시 침묵을 택했다.

루게트는 조용히 무릎을 꿇으며, 내게 말했다.

“어찌할 도리가 없어. 이 세상은 원래 그래. 운명은 때때로 잔인할 만큼 도도하게 흘러서, 우리 같은 이들은 어찌할 수도 없이 그 흐름에 휩쓸리고 말지.”

나는 그 말에 무어라 반박을 해보려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의외로 내 뇌리를 스치는 것은 어느 사내의 기억들이었다.

차근차근 소중한 이들을 잃어가며, 웃음과 감정마저 마모되고 말았던 불행한 남자의 일대기.

그 또한 영웅이 되고 싶지는 않았으리라.

“그럴 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아. 오직 두 가지뿐이지… 맞서 싸울 것이냐, 도망칠 것이냐.”

루게트는 무덤 앞에 놓여있던 나무 막대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내게 넘겼다.

나는 그 의도를 짐작할 수 없어 잠시 머뭇거렸으나, 결국 나무 막대를 받아드는 수밖에 없었다.

루게트의 낯빛이 너무나 진지했던 탓이었다.

“인간, 이제 우리는 도망치지 않아.”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던 이샤가 손을 휘저은 것은 그때였다.

따스한 바람이 나무 막대를 감싸고 도는가 싶더니, 이내 그 끄트머리에서 희미한 불씨가 당겨졌다.

“나무 죽이나 끓여먹으면서, 굶어죽는 형제자매로부터 눈 돌리지 않을 거야. 살아야 한다는 이유로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이유마저 저버리지 않겠어.”

루게트의 말이 이어질 때마다 나무 끄트머리에 당겨진 불씨가 더더욱 강해졌다.

그리고 이내 화륵, 하고 불길이 되어 타오르는 불꽃.

나는 본능적으로 이것이 장례의 마지막 절차임을 깨달았다.

엘프들은 자연을 사랑하고 중시한다.

그렇기에 죽음조차 자연의 일부로 이해하고자 노력한다. 무덤조차 남기지 않는 그들의 장례 풍습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있었다.

과연 이 역할이 내게 어울리는지,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고민에 잠겼다.

물론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내 눈이 질끈 감기고, 불 붙은 나뭇가지가 무덤 근처로 옮겨졌다. 그러자 눈으로 만들어진 구릉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몇 분이나 이어진 그 의례 도중, 루게트는 제 결심을 내게 털어놓았다.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 동족 모두가.”

단박에 그 의도를 짐작한 내가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답지 않게 원대한 꿈이었다.

아직 침엽수림에는 많은 엘프들이 남아있었다. 살점 덩어리가 그 규모를 줄이며 먹어치웠던 엘프들을 대량으로 뱉어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내고 있겠지.

루게트는 그 구심점이 되어, 엘프의 대표자로 우뚝 서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이전의 갈등과 희생이 반복되지 않을 테니까.

물론 그 과정이 순탄할 리는 없었다.

어쩌다 휩쓸린 운명의 갈림길에서 택하기엔, 지독히도 좁고 가파른 길이었다.

하지만 나는 굳이 그의 결심을 시험하지 않았다.

이미 말하지 않았는가. 더는 도망치지 않겠다고.

그러니 내가 던져야 할 질문은 하나뿐이었다.

“가능하겠어?”

“아니, 솔직히 자신은 없는데… 네가 도와주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그야말로 루게트다운 대답에 나는 무심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새 포프 영감의 봉분은 모두 녹아내리고 말았다. 그의 영혼은 이제 구천을 떠도는 일 없이, 자연의 품에 안겨 또 다른 생명으로 태어나기를 기다리게 되리라.

나는 포프 영감을 떠나보내며, 그와 함께했던 추억들을 차곡차곡 가슴에 정리해 두었다.

그는 결국 엘프의 운명을 바꾸어냈다.

“대신 하나 약속할게. 언제든 네가 우리에게 부탁을 한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반드시 한 번은 들어주기로.”

아니, 어쩌면 인류의 운명까지도.

포프 영감은 떠났지만, 그의 유지는 영원히 기억되리라.

그렇게 나는 분쟁이 사라진 세계를 꿈꾸었다.

**

가주의 집무실에서 이루어진 두 자매간의 회동은 평화로워 보였다.

안부를 나누면서, 보고받아야 할 사항에 대해 듣고, 지시를 내리기도 하는 과정의 반복이었다.

그 일상에 균열을 일으킨 것은 하나의 질문이었다.

“……언니.”

느긋한 태도로 보고를 검토하고 있던 델핀의 눈이 세리아를 향했다.

그 핏빛 눈동자에는 어떠한 적의나 경계심도 엿보이지 않았다. 세리아는 그 사실이 못내 분해서,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때까지.

세리아는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지난밤에, 침실에서 누구랑 계셨어요?”

그러자 델핀의 여유에도 처음으로 금이 갔다.

잠깐 미간을 좁혔다가, 고민에 빠진 듯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더니, 다시금 당당한 미소를 입에 걸치기까지.

찰나에 불과한 동요였으나 세리아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일평생 한 번이라도 이기고 싶다고 작정했던 상대였으니까.

델핀은 옅은 웃음소리마저 섞으며 물었다.

"왜, 벌써부터 유르디나의 후사가 걱정되니? 그렇지만 너무 신경 쓰지 마렴. 아직 나는 젊으니……."

"이안 선배였나요?"

그리고 정적.

세리아는 델핀의 가증스러운 말돌리기를 더는 들어줄 수가 없었다. 악문 잇새로 새어나오는 말소리가 사나워지는 것은 필연이었다.

질문의 형식을 띠고 있었으나, 그 음색에 담긴 확신은 굳건했다. 이를 눈치 채지 못할 델핀이 아니었다.

그래서 금의 여인은 한참이나 입을 열지 못했다.

입술이 열리다가 닫히기를 몇 번.

시선을 피한 채 침묵을 지키던 여인의 선택은 다음과 같았다.

"……그렇다면?"

유르디나는 결코 승부를 피하지 않는다.

델핀의 핏빛 눈동자에 불꽃이 당겨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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