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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398화 (398/649)

〈 398화 〉 5.5 막간: 금과 은(3)

* * *

'그렇다면?'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델핀이 던진 화두는 지극히 단순했으나, 그렇기에 더욱 날카로웠다.

이안과 델핀이 밤을 함께 보냈다.

지난밤의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세리아는 뇌리가 새하얘졌다.

그리고 백지처럼 창백해진 사고 위를 내리긁는 것은, 달뜬 신음과 열락에 젖은 숨소리.

빼앗겼다.

오직 그 생각만이 외롭게 메아리칠 뿐이었다.

세리아는 분하고 슬퍼서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저 덜덜 떨며 입술과 손가락을 깨무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미 논리는 파탄 난 지 오래였다.

첫사랑을 빼앗긴 소녀에게 이성은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기적처럼 지금 이 순간, 세리아의 헝클어진 사고회로 위로 일순 광명이 비추었다.

마치 안개를 파고들고 내리쬐는 햇살을 마주한 듯했다.

델핀의 목소리는 세리아에게 그 정도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평생 동안 열패감을 안겨 주었고, 또 앞으로도 영원히 우러렀을 여인.

소녀의 몸이 비틀, 하고 기울었다. 헐떡이는 숨소리와 함께 소녀는 잠깐의 말미를 허락받을 수 있었다.

제정신으로 사고할 수 있는 기회였다.

물론 그 ‘제정신’마저 온전하지는 못했다. 다만 자꾸만 극단으로 치닫는 결론에 제동이 걸렸을 뿐이었다.

우선은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세리아의 태도가 한결 누그러진다.

대신 잦아들었던 떨림이 되살아났고, 아쿠아마린을 닮은 푸른 눈동자도 공진을 시작했다.

소녀는 속으로 델핀의 질문을 되뇌었다.

‘그렇다면?’

솔직히 말해서, 세리아가 무어라 간섭할 여지는 없었다.

이안과 델핀은 성인이었다.

각자의 정조와 순결을 스스로 책임질 나이라는 뜻이었다. 마음이 맞는 두 남녀가 하룻밤을 치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라, 세리아가 이를 파고들 틈은 없었다.

세리아는 ‘후배’에 불과했으니까.

홀로 짝사랑을 품다 상처 받은 음습한 계집애.

두렵도록 마주하기 싫었던 진실에, 세리아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그러는 와중에도 델핀은 입술을 떼지 않았다. 핏빛 눈동자로 말없이 연적을 응시했을 뿐.

결국 세리아의 선택은 하나였다.

“……포, 포기.”

에처롭도록 떨리는 그 한 마디에, 델핀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포기’라니.

유르디나가 꺼낸 해결책치고는 터무니없었다. 델핀은 실망을 담아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비로소 한 마디를 꺼내기 직전.

털썩, 하고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델핀은 의외라는 듯 다시금 정면을 바라보았다.

세리아였다.

무릎을 꿇은 소녀의 어깨가 잘게 경련하고 있었다. 물기를 꾹꾹 눌러담은 애원이 이어졌다.

“포기해 주시면 안 될까요, 언니… 너무나 뻔뻔한 소리란 건 알지만, 그래도 선배는 제 모든 것이나 다름없어요.”

난생 처음으로 털어놓는 진심이었다.

세리아와 가장 친하다고 할 수 있는 셀린조차 육성으로 이러한 진술을 듣지는 못했다. 하물며 델핀은 언니이자 가주라는 미묘한 위치에 있었다.

지금껏 이러한 고백을 들었을 리는 만무했다.

그래서 델핀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럼에도 세리아의 간원은 이어진다.

“제, 제발 부탁드려요. 아시잖아요, 언니… 저한테는 아무것도 없어요. 어머니도, 아버지도, ‘유르디나’라는 껍데기 같은 성을 하나 내려받았을 뿐이죠. 그야말로 검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던 인생이었어요… 아니, 제가 곧 검이었어요! 그랬던 제 인생에 처음으로 마음을 선물해 준 분이세요.”

이제는 델핀이 고민에 빠질 차례였다.

여인의 고운 미간이 좁혀졌다. 델핀은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다가, 이내 한숨 섞인 맞장구를 내뱉었다.

“……그렇구나.”

델핀 또한 한결 누그러진 기색이었다.

제 혈육이 무릎 꿇고 눈물까지 흘리는데 동정심이 일지 않을 이는 없었다. 게다가 델핀은 모든 유르디나를 보살펴야 할 의무가 있는 가주였다.

혹시 그 마음의 빈틈을 눈치라도 챈 것일까.

세리아의 이마가 서서히 땅바닥에 닿고 있었다.

“부, 부탁… 흐윽, 부탁드립니다… 어린 시절부터 언니는 전부 다 가져 오셨잖아요. 제가 가지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든… 검부터 시작해서, 가문의 인정과 사랑까지! 하지만, 하지만 제겐 아무것도 없어요. 이안 선배가 유일하다고요… 언니, 그러니 제발…….”

델핀은 후우, 하고 기나긴 한숨을 내쉬며 이마에 손을 얹었다.

이내 여인의 몸이 등받이에 무게를 더했다. 어느새 팔짱을 낀 그녀의 눈동자에는 난감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흐느낌을 배경으로 델핀의 고심은 깊어져만 갔다.

그러기를 얼마쯤.

드디어 마음을 정했는지, 델핀은 묵묵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저벅저벅 걸음을 옮겨 세리아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 핏빛 눈동자에는 드물게도 ‘연민’의 감정이 비치고 있었다.

“알고 있어, 세리아. 네가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는지… 그리고 내가 네게 너무 무심했다는 사실까지도.”

드물게도 부드러운 말투였다.

델핀에게 이처럼 따스한 위로를 들은 지가 언제인지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그 마음이 서럽고 고마워 세리아는 눈물을 삼켰다.

“그동안 못해줘서 미안해, 세리아. 그리고 서방님한테는 네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해도 돼.”

움찔, 하고 세리아의 몸이 떨리더니 울음이 잦아들었다.

부릅떠진 푸른 눈동자가 델핀을 비추었다.

조명을 받은 금빛 머리카락이 태양처럼 빛났다. 세리아는 그 미모에 홀리기라도 한 듯한 기분이었다.

진심인가?

진심으로 양보를 해주겠다는 말인가.

그 간절한 의문에 답하는 델핀의 표정은 따스하기 그지없었다.

“알다시피 내 위치는 불안정해. 가문 내 입지는 탄탄하지만, 아버님께서 구금되시면서 대내외적인 시선이 곱지 않거든. 당장 약혼이나 결혼을 발표할 상황은 되지 못해. 그러니까, 네 마음대로 해.”

“저, 정말…….”

비참하고 초라한 몰골이었다.

사랑을 이루지 못해서, 연적에게 구걸을 하는 꼴이라니.

세리아도 그 사실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듬거리는 소녀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희망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선배를 되찾을 수 있다.

그것이 하잘것없는 존재에게 던지는 동정이나 연민이라도 좋았다.

적선을 받더라도, 자존심을 구기더라도.

선배의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세리아는 무슨 짓이든 할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 소원은 이루어졌다.

다름 아닌 세리아가 사랑해 마지않는 언니에 의해서.

맑은 눈물과 함께 소녀의 희망이 내뱉어졌다.

“정말, 그래도 될까요… 언니?”

“그럼.”

허무할 정도로 시원스러운 대답이었다.

델핀의 낯빛에는 한 톨의 아쉬움이나 미련조차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고혹적인 미소만이 걸려 있을 뿐이었다.

세리아는 넘치는 희열과 감사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됐다.

소중한 두 사람을 누구도 잃지 않고 끝냈다.

지독히도 이기적인 부탁에 의한 결과였지만, 세리아는 이보다 좋은 결말은 없으리라고 확신했다.

또 언니에게 너무나 많은 빚을 져서 죄스럽기도 했다.

어떻게 그 은혜를 갚을 수 있을까.

일평생을 바쳐 이 여인을 섬겨야겠다고, 세리아는 마음속 깊이 납득하고 결심했다.

델핀의 위로가 이어졌다.

“네 마음이 그토록 간절할 줄 몰랐어. 아마 서방님께도 네 마음을 털어놓으면 이해해 줄 거야. 그래, 그러다 보면…….”

어깨를 쓰다듬으며, 여인의 입술이 소녀의 귓가에 다가갔다.

세리아는 달콤한 환상에 취해 델핀을 바라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래서 보지 못했다.

그 요사스러울 만큼 휘어진 눈꼬리를.

“애정의 찌꺼기라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단 한 토막의 말이었다.

안온하던 분위기를 단숨에 반전된다.

시간이 얼어붙고, 숨소리마저 멎은 찰나의 틈새.

그 말뜻을 일순 받아들이지 못한 세리아가 얼빠진 목소리를 내뱉었다.

“……네?”

“말 그대로야.”

너무나 평온한 음색이었다.

잔잔한 바다와 같이 고저 없는 목소리에, 세리아는 더더욱 넋을 놓는 수밖에 없었다.

델핀은 서서히 몸을 일으키며 말을 덧붙여 갔다.

“애정의 찌꺼기라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서방님한테 가서. 지금 하듯이 구걸해 봐. 사랑해 달라고, 애정을 달라고… 푸흣.”

상상만 해도 웃긴다는 듯, 델핀은 짤막한 웃음을 깨물었다.

아무리 세리아가 순진해도 그 의도를 짐작하지 못할 리는 없었다.

조소였다.

패배자를 향한 비웃음.

세리아의 사고를 다시금 순백이 좀먹는다.

“아아, 세리아. 이 언니가 잘못했구나. 내가 진작에 알려주었어야 했는데, 사랑이란 구걸해서 얻는 것이 아니야. 사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지… 유르디나의 일원으로서 그렇게 교육받지 않았니?”

숨이 막힌다.

그럼에도 폐부를 짜내어, 헐떡이듯 숨을 고르는 세리아의 어깨가 상하운동을 반복했다.

몸은 아직도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직전까지는 환희였다면, 지금은 또 다른 감정에 의해.

근육이 긴장된다.

“오로지 투쟁뿐이야.”

사고가 멈추니 도리어 심장 소리가 잠잠해진다. 시야가 맑아지고 주위의 풍경이 선명해졌다.

정신이 명징하다.

아마도 그럴 터였다.

세리아는 지극히 제정신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사뿐사뿐 걷던 델핀의 몸이 어느 벽면 앞에서 멈추었다.

그곳에는 수많은 검들이 걸려 있었다.

세리아가 단 한 자루라도 갖고 싶었던 명검들이.

델핀은 제 턱을 쓰다듬으며 노래하듯 말을 덧붙였다.

“내가 어떻게 서방님의 마음을 얻었는지 알아? 꽤나 힘들었지, 알다시피 신중한 분이잖아. 내 지아비께서는… 하지만 술이 돌면 사람이 제정신이 아니게 되거든. 그때 아주 살짝만 밀어버리면 돼. 그런데도 마지막까지 망설이시더라니까? 그래서 결국 내가 억지로…….”

“……주, 죽.”

언어조차 되지 못하는, 쪼개어진 음절.

한동안 고개를 떨구고 있던 소녀의 시선이 정면을 향했다.

그것이 신호였다.

푸른 안광이 번뜩이고, 그 직후 세계가 쪼개진다.

새하얀 비수였다.

대기를 찢고, 풍경을 짓이기며, 단 하나의 실선이 울퉁불퉁한 단면을 그리며 쏘아졌다.

검.

그리고 이를 가로막는, 또 하나의 검.

찰나라는 표현조차 부족한 초속의 공방이었다. 빛이 번쩍이는 듯하더니, 어느덧 두 여인은 서로의 검을 맞대고 있었다.

땅을 박차고 쏘아진 세리아가 이를 악물며 외쳤다.

그 어느 때보다도 선명한 감정을 담아서.

“죽여 버릴 거야!!!”

“그래, 그래야지.”

히죽, 하고 델핀은 웃으며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금빛의 오러가 타오른다.

화륵, 하고 점화된 열기에 주위의 풍경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자칫하면 치명상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위력이었다.

그럼에도 델핀은 망설이지 않았다.

이미 세리아의 검에 검푸른 오러가 맺혀 있었으니까.

살의로 타는 눈동자가 증언하고 있었다.

당신을 죽이고 싶어 견딜 수가 없노라고.

그 선정적이기까지 한 살의에, 델핀은 실로 오랜만에 홍소를 터트렸다.

금빛 불길이 낼름거리며 치솟는다.

"이래야… 유르디나답지!"

날카로운 충돌음이 울러퍼졌고, 이내 방 안에서는 때아닌 광풍이 들이닥쳤다.

자매 싸움의 시작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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