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9화 〉 5.5 막간: 금과 은(4)
* * *
대기가 찢어질 때마다 금속이 비명을 내질렀다.
단말마처럼 터져 나온 불꽃들이 시야를 어지럽힌다. 금과 청의 궤적이 맞부딪히며 광풍이 몰아닥쳤다.
찰나에 빗발치는 검격의 수는 범인의 상상을 초월했다.
직선과 곡선, 사선을 넘나드는 기기묘묘한 실선들.
그 모든 것이 폭발적인 살의를 담고 있었다.
눈 깜짝할 새 수십 개의 공방이 지나가고, 전세는 곧 명확해졌다.
캉, 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퍼진 직후 누군가가 두어 걸음 뒷걸음질을 쳤다.
회색 머리카락을 지닌 소녀, 세리아였다.
그 푸르르던 눈동자에는 어느덧 핏발이 서 있었다. 흘러넘치는 감정을 제어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이를 악문 그녀의 낯빛에서는 진득한 살기만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반면 세리아를 상대하는 금발의 여인은 태연자약하기 그지 없었다.
델핀 유르디나, 북부를 수호하는 금빛 사자.
세리아의 검이 필사적이라면, 그녀의 검은 우아했다. 전장이 아니라 무도회에 서더라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그만큼 실력의 격차는 명확했다.
애초에 세리아는 단 한 번을 제외하고 델핀은 이겨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그 유일한 승리마저 대부분은 이안의 공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후계자로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온 델핀과, 첩의 딸로 홀대를 받아온 세리아의 사이에는 넘기 힘든 강이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세리아 또한 이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고작 스무 해 남짓에 불과한 인생이었으나, 일평생 뼈에 사무치도록 느껴오지 않았던가.
델핀은 강하다.
세리아의 빛나는 재능조차 이 여인의 앞에 서면 빛이 바래곤 했다.
그래서 평생을 질투했다.
열등감은 늪과 같았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질식하는 쪽은 언제나 세리아였다.
그 더러운 진창에서 빠져나오려고 갖은 애를 쓰기도 했다.
하지만 홀로 몸부림을 쳐봐야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세리아는 점점 더 지쳐 가고만 있었다.
그때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이 하나 있었다.
‘이안 선배.’
어느 사내의 얼굴이 스치자, 균형을 잃은 세리아의 몸에 벼락이 쳤다.
입술의 연한 살갗을 파고드는 이, 그리고 입 안에 감돌기 시작하는 달콤한 혈향.
콱, 하고 뒷발을 강하게 딛은 소녀의 몸이 탄력을 받아 쏘아졌다.
수세에서, 곧바로 공세로.
찰나를 가르고 날아든 찌르기였다.
검술 교본을 그대로 재현하더라도 이보다 날카로운 찌르기는 나오지 않으리라.
대개의 검사들은 반응조차 불가능한 속도였다.
그래, ‘대개의 검사들’이라면.
불행하게도, 세리아의 상대는 그렇게 뭉뚱그려 표현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화륵, 하고 금빛의 오러가 타오른다.
날과 날이 미끄러지며 기이한 소음을 일으켰다. 세리아의 찌르기를 간단히 흘려낸 델핀의 몸이 지척에 닿았다.
그 이후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세리아는 헐떡이며 정신을 차렸다. 손이 화끈거렸고, 숨이 막혀 근육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아주 잠깐이지만 정신을 잃었다.
마지막에 어떻게 당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통각의 잔향으로 팔꿈치나 발에 명치를 가격당했거니, 하는 추측을 했을 뿐.
몸뚱아리는 이미 구석에 처박혀 진열대 위의 가재도구들을 뒤집어 쓴 뒤였다.
그 모습을 보며, 델핀은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예전보다는 나아졌지만, 아직도 너무 솔직해. 눈만 봐도 의도가 훤히 보이잖니.”
“……닥쳐.”
으득, 하고 이를 갈면서 세리아는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검을 잡은 손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어느덧 붉게 달아오른 손등에서 열감이 느껴졌다.
화상이다.
내지른 칼날을 흘려내면서, 델핀은 도리어 거리를 좁혔다. 그 과정에서 황금빛 오러에 당하고 만 것이다.
오러에 직접 당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마력을 두른 살갗에 화상을 입힐 정도의 열기였다. 반쯤 익어버린 근육은 뇌의 지시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낭패였다.
그러지 않아도 완력에서 밀리는데, 화상까지 입다니.
세리아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아직도 그 눈동자에서는 새파란 살기가 줄기줄기 뻗치고 있었다. 첫사랑을 빼앗긴 소녀의 질투란 이토록 무시무시했다.
하지만 그 분노는 델핀에게 닿지 않는다.
그 잔인한 현실이 세리아는 지독히도 미웠다.
“이안 선배한테도 이랬나요? 몸으로 억지로 밀어붙여서, 이안 선배의 상냥한 마음을 농락했겠죠. 애정의 찌꺼기? 후후… 그렇다면 언니께서 받아먹은 건 정욕의 찌꺼기라도 되나요?”
“그럴지도.”
흥미 없다는 듯, 무심하게 뱉어진 한 마디였다.
델핀은 조명을 반사하는 제 검신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비친 풍경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단 몇 분에 불과한 공방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집무실은 엉망진창이 된 지 오래였다.
벽면에 진열되어 있던 검들은 마룻바닥에 흩어져 있었고, 각종 서류와 책자들은 불타거나 찢겨져 흩날렸다.
그 참상을 지켜보던 델핀의 입가가 즐거운 호선을 그렸다.
“하지만 세리아, 중요한 건 결과야. 내가 늘 말하지 않았니? 마지막에 승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 결과가 지금 내 앞에 있구나. 무릎을 꿇고 애걸해야 하는 패자와, 떳떳이 선 승자.”
“떳떳해?”
킥킥, 하고 세리아는 사나운 웃음소리를 흘렸다.
다시금 치켜든 그 눈동자엔 차가운 살의가 맺혀 있었다.
도를 넘은 분노에 실핏줄이 터져 불그스름한 색이었다.
“그렇게 떳떳하면 가신 회의라도 소집해서 공표하지 그래요? 몸뚱아리를 굴려 남자를 유혹한 걸레년이라고… 모두가 당신을 믿고 따랐는데, 이젠 당신 따위를 가주로 섬겨야 하는 우리들이 불쌍해. 역겨워, 구역질이 나… 당신은 인간도 아니야. 발정 난 암캐일 뿐이지.”
“마음대로 떠들렴.”
픽, 하고 델핀은 조소를 머금으며 세리아를 내려다보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세리아는 그 눈높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척이나.
“그래봐야 달라지는 것은 없으니까… 후후, 언니로서 넋두리 정도는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어.”
“닥쳐.”
오늘만 두 번째, 세리아는 간절한 소망을 담아 거친 언어를 토해냈다.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무례였다.
존경하는 언니한테 감히 비속어를 사용하다니.
그러나 이제 세리아에게 언니를 향한 존경심은 남아있지 못했다.
아니, 델핀이 언니라는 사실조차 인지할 수 없었다.
지금 세리아의 망막에 비치는 것은, 소중한 선배를 빼앗아 간 한 마리의 암캐뿐이었다.
“인간의 언어로 말하지 마… 암캐 주제에, 차라리 개처럼 짖어요. 그게 언니한테 더 어울리니까.”
“너무 그러지 마렴, 세리아.”
비틀비틀 소녀가 몸을 일으키자, 델핀은 검극을 다시금 세리아에게 겨누며 말했다.
싱긋, 여인의 낯에 상냥한 미소가 떠올랐다.
“암캐한테 무릎 꿇고 애원하는 여동생이라니, 언니로서 가슴이 아프잖니.”
세리아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검 손잡이를 고쳐쥐었다.
기회는 단 한 번뿐이었다.
어차피 이대로 가다간 필패였다.
어찌저찌 치명상을 피하더라도, 저 황금빛 오러가 문제였다.
그 존재만으로도 실내의 온도를 몇 도나 올리고 있는 열원이었다.
스치기만 해도 피해가 누적될 수밖에 없었다. 종래에는 검조차 제대로 들지 못하리라.
승부를 보려면 지금밖에 없었다.
세리아의 기세가 단숨에 가라앉는다.
이글거리던 살기가 차갑게 버려졌다. 달아오른 철이 담금질을 통해 더욱 단단해지듯이.
그리고 이어지는 기수식.
두 팔이 툭 떨어진다. 완전히 이완된 팔 근육에서는 어떠한 반격의 낌새도 엿보이지 않았다.
오직 검극만이 낭창거리며 델핀을 겨눌 뿐.
얼핏 보기에는 승부를 포기라도 한 듯한 자세였다.
그럼에도 델핀은 방심하지 않았다.
도리어 마주 기수식을 취하며 경계의 시선을 보내올 정도였다.
왜냐하면, 새파란 눈동자가 요사스러운 빛으로 타고 있었으니까.
하나, 둘.
호흡이 이어질수록 숨소리가 잦아든다.
그에 따라 시간의 흐름은 점점 더 느려지고, 심장의 고동 소리조차 멈추었을 찰나.
검광이 폭사된다.
전조조차 없었다.
처음부터 그래야 한다는 듯, 검푸른 섬광이 세계를 횡단했다.
그것은 시작과 끝이 존재하는 검격이 아니었다.
차라리 불현듯 ‘나타났다’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그야말로 최속의 일격.
막히지 않는다.
반격할 수 없다.
이러한 검술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상상하지 못하는 이들이 수두룩했다.
사전에 인지하지 않는 한, 이 비검(??)을 받아낼 자는 없었다.
대신 세리아도 그 위력을 조절할 수 없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죽일 마음으로 휘두른 칼이었으니까.
그녀의 이성은 질투와 분노로 불타버린 지 오래였다.
세리아는 이 시점에서 승리를 확신했다.
델핀의 몸이 움찔하며 먼저 반응에 들어가긴 했으나, 너무 늦었다.
고작해야 검 하나로 막아낼 수 있는 기술이 아니었다.
아무리 꼿꼿한 나무라도 태풍 앞에서는 부러지고 말 테니까.
하지만 세리아가 미처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은, 델핀의 검극이 좌하단으로 떨어졌다는 사실이었다.
사자의 발톱이 황금빛 열상을 남기고 지나간다.
허공에 난 상처는 총 일곱, 시차조차 없이 그어진 궤적이었다.
금빛의 발톱이 푸른 수평선을 수직으로 내리찍고 있었다.
캉, 캉, 캉, 캉!
전력을 다한 세리아의 검이 단숨에 네 개의 발톱 자국을 깨부쉈다.
이 무렵에 세리아는 이를 악물었다.
손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화상 탓이었다.
팔의 힘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사실을 직감한 세리아가 허리를 돌렸다.
실패할 시 치명상을 허용해야 할 만큼 큰 동작이었다.
허나 이미 승부수를 던진 세리아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캉, 캉!
그 발악이 통했는지 두 개의 발톱 자국이 추가로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그것이 끝.
세리아는 비명이라도 내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본래라면 그녀의 승리여야 했다.
최소한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델핀의 금사검은 다섯 줄이 최대였으니까.
그런데 어째서.
왜 하필이면 지금.
저 여자의 목을 따기 직전이었는데!
다만 세리아의 원망은 육성으로 토해지지 못했다.
그 전에, 델핀의 발길질이 세리아의 옆구리를 직격했던 탓이었다.
디딤발을 축으로, 회전력을 더한 깔끔한 일격이었다.
이미 허점을 노출한 세리아가 이를 받아낼 도리는 없었다.
내장이 뭉개지고, 높아진 체내 압력에 핏물이 울컥 목을 타고 올라왔다.
세리아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땅바닥을 굴러야 했다.
벽면에 부딪쳐 멈춰 설 때까지.
책장에 충돌한 것인지 후두둑, 하고 책들이 떨어져 세리아의 힘빠진 몸뚱어리를 덮쳤다.
“……놀랐어, 세리아.”
감탄인지, 조롱인지.
델핀은 그렇게 탄성을 터트리며 사뿐사뿐 걸음을 옮겼다.
“자칫하면 당할 뻔했잖아. 가주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될 뻔했는걸?”
쿨럭, 하고 핏물을 뱉으면서.
세리아는 몸을 일으키려 갖은 애를 썼다.
바들바들 경련하는 팔로 땅을 짚자, 몸 위를 덮쳤던 책이 하나둘씩 떨어져 내렸다.
그것이 끝이었다.
종이의 무덤을 탈출한 세리아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델핀의 칼이었으니까.
“하지만 결국 내 승리구나, 세리아.”
세리아는 넋을 놓았다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이내 주먹을 꽉 몰아쥐며 어깨를 들썩였다.
패배는 익숙했다.
일평생을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오늘따라 그 사실이 미치도록 분하고 억울하게 느껴지는 것인지.
방울지는 눈물을 삼키며, 세리아는 말했다.
“……죽이세요.”
그래, 차라리 이러는 편이 나았다.
매일 밤 사랑하는 선배와 존경했던 언니가 몸을 겹치는 광경을 떠올릴 바에야.
심장이 불타고 황량해져서, 목을 매달고 싶어질 바에야.
연적의 손에 목숨을 잃는 편이 나았다.
세리아는 진심이었다.
그 텅 빈 고백에도 델핀의 눈빛에는 어떠한 흔들림도 감지되지 않았다.
단지 침묵하다가.
이내 한숨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을 뿐이었다.
“세리아…….”
그리고 그때.
“아가씨!”
쾅, 하고 집무실의 문이 열리고 일련의 무리가 들어왔다.
유르디나의 가신들이었다.
집무실의 소란이 기어코 외부로 새어나간 것이다.
아차, 싶었는지 델핀과 세리아의 눈동자가 급히 그들을 향했다.
결투에 집중하느라 미처 눈치 채지 못했다.
세리아는 이성을 잃은 지 오래였고, 델핀은 설마 세리아가 이토록 선전할 줄 몰랐던 탓이었다.
그래서 유르디나 가문의 가신들은 황망한 낯빛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온통 어질러진 집무실 안과, 만신창이가 된 세리아.
그리고 그 목젖을 겨누는 델핀의 칼까지.
델핀과 세리아는 침묵을 지키다가, 이내 이성을 되찾고 각자 시선을 떨구었다.
변명하고 싶었지만, 그래.
콩가루 집안의 전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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