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0화 〉 5.5 막간: 금과 은(5)
* * *
델핀은 한숨을 푹 내쉬며 몸의 긴장을 풀었다.
푹신한 등받이의 감촉이 느껴졌지만, 그녀의 심기는 여전히 불편하기만 했다.
여인의 핏빛 망막에는 반파된 집무실의 풍경이 비치고 있었다.
고작 몇 분에 걸친 공방이 만들어 낸 참상이었다.
한때 고풍스러운 가구가 가득하던 곳이었으나, 이제는 어디 하나 성한 곳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델핀도, 세리아도 진심이었으니까.
어중이떠중이도 아니고 익스퍼트에 이른 검사 둘의 격돌이었다. 이러한 결과가 나오는 것은 당연했다.
그럼에도 델핀은 못내 씁쓸한 마음을 지우지 못했다.
별다른 이유는 아니었다.
단지 ‘진심’을 내고 말았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처음에는 그럴 생각이 아니었다.
일전에 공언한 바 있듯 델핀은 딱히 이안을 구속할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길들일 수도 없는 사내였을 뿐더러, 델핀과 이안이 맺어진 계기가 떳떳하지 못한 탓도 있었다.
하룻밤의 연민, 혹은 한때의 충동.
이안이 그날 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지는 몰랐다. 다만 델핀은 그렇게 사내와의 관계를 정의하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망설이던 그를 덮친 쪽은 자신이었다.
이를 두고 순결에 대한 값을 요구할 만큼 델핀은 뻔뻔하지 못했다.
따라서 이안과 세리아가 어떤 관계가 되든 상관없었다.
아니, 도리어 세리아를 도와줄 마음까지도 있었다.
그래, 그랬는데 왜.
델핀은 후우, 하고 기나긴 숨을 내뱉으며 기억을 되짚었다.
뇌리를 스치는 건 방금 전에 나누었던 대화였다.
가신들의 앞에서, 델핀은 상체를 숙여 세리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웃어, 세리아.”
상처 받은 짐승의 표독스러운 눈빛이 델핀을 향했다.
하지만 델핀은 가소롭다는 듯 입꼬리를 말아 올릴 뿐이었다.
“참고로 서방님께서는 황명을 받으셨거든. 우리 유르디나 가문에 대한 처분을 결정하시기로… 그래서 나와의 관계가 밝혀지면 많이 곤란해지실 거야. 너도 그걸 원하는 건 아니겠지?”
으득, 하고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방님’이라는 낱말을 듣자마자 세리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핏발이 선 눈으로 델핀을 노려보는 그 낯빛에서 절절한 살의가 묻어나왔다.
당장이라도 손에 쥔 칼로 델핀을 찌르고 싶겠지.
그러나 불가능했다.
사건이 커질수록 그에 수반하는 사후처리도 복잡해진다.
그리고 그 과정 중에는 전후사정을 살피기 위한 면밀한 조사도 포함되겠지.
이안과 델핀의 관계가 들통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분하고 치가 떨렸으나, 세리아는 차마 사랑하는 선배를 곤경에 빠트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또 미소만큼은 결코 나오지가 않아서.
세리아는 묵비권을 지키기로 했다.
내밀어진 델핀의 손을 억지로 붙잡으며, 소녀의 몸이 비틀비틀 일으켜졌다.
누가 보아도 살가운 분위기는 아니었다.
차라리 설원에 몰아치던 눈보라가 연상될 만큼 실내의 온도는 싸늘했다.
깜짝 놀라 집무실에 들이닥친 가신들조차 단 한 마디를 꺼내지 못할 정도였다.
오직 델핀만이 옅은 미소를 머금었을 뿐.
“미안해요, 경들. 오랜만에 여동생과 대련을 하다 조금 흥분했네요.”
저 말이 사실이냐는 듯, 가신들의 시선이 세리아를 향했다.
그럼에도 소녀는 부정의 말도, 긍정의 말도 내뱉지 않았다.
단지 얼어붙은 표정으로 내딛는 걸음이 한 걸음.
그 몸짓 하나하나에서 한기가 풀풀 배어나오고 있었다.
워낙 살벌한 기세였던 터라, 가신들은 감히 세리아를 막아설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하지만 세리아는 얼마 지나지 않아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등 뒤에서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려왔던 탓이었다.
“애원해 봐야, 달라지는 건 없단다. 세리아.”
세리아의 푸른 눈동자가 흘깃 뒤를 향했다.
그곳에는 싸늘한 낯빛을 한 델핀이 자리하고 있었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행동으로 옮기렴. 그리고 싸워 이겨.”
“언니.”
검을 맞대듯, 말과 말이 교차한다.
세리아는 지극히 무표정한 얼굴로 고언을 올렸다.
“저를 죽이셨어야죠.”
그리고 습기 어린 속삭임이 이어진다.
“곧, 후회하게 만들어 드릴게요.”
마지막 충언을 올린 신하는 그렇게 떠나갔다.
다음에 만났을 때, 델핀과 세리아는 더는 군신관계가 아닐지도 몰랐다.
어쩌면 자매지간조차 아닐지도.
델핀은 그렇게 지나간 일들을 반추하다가, 세리아가 최후에 던진 시선을 떠올렸다.
적의조차 얼어붙은 검푸른 눈동자.
존경이나 우애 따위는 한 톨조차 찾아볼 수 없는 눈빛이었다.
델핀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픽,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딸 키워봐야 쓸데도 없다더니…….”
남자 하나한테 홀리더니 이 모양 이 꼴이다.
이후에도 탄식과도 같은 넋두리가 이어졌다. 지하에 구금된 유르디나 후작이 들었다면, 거칠게 동감을 표했을 내용이었다.
정작 델핀 그 자신도 세리아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처지였지만.
여인의 한숨은 계속해서 깊이를 더해갔다.
델핀이 세리아를 굳이 도발한 까닭은 몇 가지가 있었다.
우선 약한 모습을 보이는 세리아를 자극하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또 델핀과 세리아 사이의 갈등을 표면화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이안이 유르디나 가문과 깊이 얽혀 있었던 탓이었다.
그가 비단 가주인 델핀뿐만 아니라, 세리아와도 절친한 사이라는 사실은 아카데미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러니까 유르디나 가문을 반으로 쪼갠다.
실제로 갈라질 필요는 없었다. 단지 가문 내에 갈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만 해도, 이안의 운신은 한결 간편해진다.
델핀이 없더라도 세리아를 통해 유르디나의 힘을 빌릴 수 있으니까.
어차피 황실은 유르디나 가문을 지울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만일 그럴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이안에게 판단을 미루지도 않았을 테지.
유르디나의 이름을 지운다는 건 그만큼 지난한 과정이었다.
황실조차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대작업.
만에 하나라도 정보를 사전에 유출시키는 우를 범할 리는 없었다.
결국 황실이 원하는 것은 체면치레였다.
암흑교단과 완전히 결별하고, 제국에 변함없는 충성을 바치며, 앞으로 다가올 전쟁에서 최선두에 서는 것.
이를 약속 받으면 손을 떼리라.
그러니 유르디나를 향한 처벌은 적절한 선에서 그칠 수밖에 없었다.
아직 제국의 5대 귀족 가문으로서 유르디나는 쓸모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델핀이 그 타협점 중 하나로 고려하고 있던 인물이 바로 세리아였다.
천출이라지만 유르디나의 피를 타고났으며, 그 재능 또한 의심할 여지 없이 진짜였다.
가주를 견제할 수 있는 세력으로는 실로 적절한 인선이 아닌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야 할 가주를 향한 경고로는 충분했다.
더불어 유르디나 가문에 대한 황실의 영향력을 강화할 기회이기도 했고.
더욱이 마음에 드는 점은, 정작 세리아가 가주의 권위를 결정적으로 위협할 수는 없다는 점이었다.
사실 그녀는 흡혈귀의 혈통을 잇고 있었으니까.
이 약점이 존재하는 한, 세리아가 가주의 자리를 가져갈 걱정은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인내뿐이었다.
그저 이안이 이를 눈치 채고 올바른 결단을 내려 주기를 바랄 뿐.
이제 델핀이 해야 할 일은 끝났다.
세리아는 델핀에게 반감을 품었다.
가신들은 델핀과 세리아 사이를 의심하고 있다.
이처럼 목표를 이루었는데, 어째서 가슴이 이토록 답답한지.
델핀은 무심코 제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래, 사실은 세리아를 필요 이상으로 도발했다.
소심한 여동생이 한심해서?
혹은, 어느샌가 커져 버린 제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바보 같은 년…….”
세리아인지, 혹은 제 자신인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른 채로, 델핀은 그렇게 한참이나 한숨을 곱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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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살아 있냐?”
진심이 잔뜩 묻어나오는 물음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친구를 앞에 두고 할 말은 아니었다. 아무리 우리가 통신 마법에 의존해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내 낯빛이 대번에 떨떠름해졌다.
“그럼 죽었겠냐?”
“죽어도 이상하지 않지… 솔직히 말해서, 누가 칼 들고 전재산은 걸라고 하잖아? 그럼 난 네가 죽었다는 쪽에 걸 거야.”
“다행이네.”
나는 픽, 하고 웃음을 터트리며 덧붙였다.
“넌 판돈이 클수록 많이 잃잖아.”
“어허.”
곱슬거리는 갈색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미남자, 내 친구 레토는 짐짓 엄숙한 목소리를 흉내 냈다.
“난 최후의 승리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야. 알다시피,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그만큼 잃어야 하는 법이거든.”
“전형적인 도박사의 논리잖아.”
“내가 도박을 좀 좋아하긴 하지.”
나는 그렇게 레토와 한동안 낄낄거리며 대화를 나누었다.
물론 내가 본론을 꺼낼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통신 마법은 상상 이상으로 많은 마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었다.
그 탓에 나는 최대한 간략히 내 사정을 설명해야 했다. 앞서 쓸데없는 소리를 나누던 시간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만큼.
레토는 내 짧은 이야기를 들으며 침음을 삼켰다.
연녹빛 눈동자가 슬쩍 측면을 향한 지 얼마쯤.
내가 가장 신뢰하는 친구는 늘 그렇듯 재수 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쁘지 않은데? 네 오지랖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어.”
“……오지랖이라니?”
내 멍청한 반문에 레토는 쯧쯧, 하고 혀를 찼다.
그 한심하다는 눈빛에서 숨길 수 없는 속내가 묻어나오고 있었다.
‘하여간 검술학부란…….’
나는 남몰래 주먹을 꽉 쥔 채 부르르 떨었다.
이 모욕은 아카데미에 돌아가는 대로 이자를 쳐서 갚으리라.
그러나 레토는 과연 레토였다.
그의 묘수가 이어질 때마다 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이었다. 내 주먹에 친구의 피가 묻을 미래가 사라져서.
나는 그와 상담한 내용을 필기까지 한 뒤에야, 비로소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통신실을 나설 수 있었다.
아직 온전한 계획은 아니었다.
다만 한동안은 이대로 처신하면 커다란 문제는 없을 터였다.
나는 한결 홀가분한 마음으로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적어도 누군가 헐레벌떡 내게 달려올 때까지는.
암청빛 머리카락과 은회색 눈동자, 낯이 익은 소녀였다.
제국의 제5황녀, 시엔.
그녀는 고귀한 신분에 어울리지 않게 두 팔을 파닥거리며 외쳤다.
“크, 큰일났어요. 이안 경!”
나는 곧장 그 자리에 멈춰 서는 수밖에 없었다.
눈을 질끈 감고 목소리를 높이는 꼴이 꽤 다급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힘써 달려온 황녀가 전한 급보는 다음과 같았다.
“유르디나… 그, 그러니까 세리아선배가 이상해졌어요!”
내 착한 후배에게 무언가 이상이 생겼다는 소식.
잠시 넋을 놓던 내 몸이 곧장 땅을 박차고 쏘아졌다.
제발, 세리아.
내가 늦지는 않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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