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1화 〉 5.5 막간: 금과 은(6)
* * *
세리아가 수상하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나는 피 묻은 편지지를 떠올렸다.
핏물로 써내려간 글귀들은 하나 같이 섬뜩한 빛을 품고 있었다. 그 내용도 마찬가지였다.
제 몸을 토막 내서 땅에 묻어달라니.
그 광기 어린 간청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내 사랑하는 후배가 맞이해야 할 결말이 너무나 잔혹해서.
그래서 나는 몇 번이고 다짐했다. 결코 세리아를 그렇게 두진 않겠다고.
무슨 수를 짜내어도 좋았다.
아직 나에게는 1년이라는 말미가 남아있었다.
그 시간 동안 세리아를 구할 방도를 찾아내기만 하면 됐다. 그러기만 한다면 어떻게든 행복한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으리라.
하지만 내 심중에는 차마 털어내지 못한 불안이 자리하고 있었다.
만일 내 선택이 틀렸다면?
내가 나선 탓에 레오릭이 자극 받았다. 그 결과 악신의 권속이 깨어났고, 나는 사투 끝에 레오릭을 쓰러트렸다.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잘못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피 묻은 편지로 밝혀진 사실이 아니었다면.
레오릭을 타락시킨 힘의 근원은 바로 ‘칠죄성’이라고 했다.
미래에서 편지가 당도하기 시작한 이후, 나는 그 일곱 별에 대한 이야기를 몇 번인가 들어본 적이 있었다.
첫 번째는 엠마로부터였다.
엠마는 시간을 역행하는 마법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다만 묘한 여지도 하나 남겨두었는데, 혹시나 ‘칠죄성’의 힘을 빌린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소리였다.
델피렘이 지은 일곱 개의 죄악을 상징하는 별.
그리고 나는 그 ‘칠죄성’에 대한 이야기를 미래에서 온 ‘나’에게서도 들은 적이 있었다.
오메로스의 군대를 이끄는 일곱 군단장들.
하나하나가 마스터에 필적하는 괴물들이라고 했던가.
레오릭을 제물로 삼은 괴물은 그 씨앗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북부를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갈 뻔했던 것이다.
그리고 피 묻은 편지에는 이러한 글귀도 쓰여 있었다.
‘칠죄성의 힘은 일종의 저주와 같거든요. 절대로 사라지지 않고, 누군가는 그 죄를 감당해야만 하죠.’
칠죄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로지 새로운 제물을 찾아 헤맬 뿐이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내가 받은 편지에서 세리아는 그 죄를 짊어지고 있었다. ‘괴물’이라는 표현이 심심찮게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그녀의 몸에 흐르는 피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듯했다.
‘흡혈귀’의 혈통.
사상 최악이라 불리는 마인의 피를 이었다면, 그럴 만도 했다.
그래서 나는 숨을 헐떡이며 내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설마 벌써 시작된 건가?
편지에는 1년 남짓의 여유가 존재했다고 적혀 있었지만, 세리아가 그렇게 될 때까지의 자세한 과정은 쓰여 있지 않았다. 다시 말해, 당장 지금 세리아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다는 뜻이었다.
조급한 마음에 내 행동이 거칠어졌다.
황녀가 지목한 세리아의 방 앞에 서자마자, 나는 노크조차 하지 않고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그 안에서 보았다.
붉은 음료를 빨대로 쪽쪽 빨아먹다가,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뜬 세리아를.
“……아.”
나와 세리아 사이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우리는 한날한시에 얼어붙기라도 한 듯 미동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당혹스러운 마음에 낯빛을 굳히고 있을 따름이었다.
사실 세리아가 무얼 마시든 간에 관계는 없었다.
침실에서 휴식을 취하며 음료를 마시는 것이 죄는 아니었으니까.
정작 나와 세리아가 굳어버린 까닭은 따로 있었다.
다름 아닌 세리아의 방 곳곳을 장식하고 있는 물건들 때문이었다.
그 세세한 품목만 따져 보자면 놀라울 것은 없었다.
기껏해야 인형이나 초상화, 굳이 특이한 물건을 하나 꼽자면 헤진 옷 정도일까.
그러나 문제는 그것들이 지니고 있는 통일성이었다.
초상화도, 인형도 어느 누군가를 형상화한 물건임이 분명했다.
검은 머리카락과 금빛 눈동자가 인상적인 사내.
바로 나였다.
심지어 침대 머리밭에 비치된 해진 옷조차 내가 입고 있던 옷으로 보였다.
군데군데 묻어있는 핏자국이 내 추억을 자극했다.
아마도 내가 집중치료실에 입원하기 직전에 입었던 제복이 아닐까.
내 망막에 실내의 풍경이 멋대로 새겨지는 사이, 정적은 더욱더 깊어졌다.
끝내 살얼음판 같은 침묵을 깨부순 쪽은 세리아였다.
소녀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잔 하나가 마룻바닥 위를 형편없이 굴렀다.
쏟아진 음료가 세리아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바닥을 붉게 물들이는 저 액체처럼, 세리아는 토혈이라도 하고 싶다는 얼굴이었다.
질끈 감긴 세리아의 눈가에 파르르 잔경련이 일었다.
나는 어떻게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야, 세리아… 너무 갑작스레 방문했나? 그동안 잘 지냈…….”
“……주, 죽.”
물기를 억지로 물러담은 음색이었다.
고개를 떨군 세리아의 귓가가 발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 수치심이 어떨지는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말없이 내 후배가 하는 양을 지켜봐야만 했다.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누가 피해자지?
나인지, 세리아인지.
그조차도 알 수 없어 내 사고가 엉망진창으로 헝클어졌다.
세리아는 어느덧 제 허리춤에 매여 있던 검을 풀었다.
그리고 두 손으로 공손히 검을 받들어, 내게로.
“죽여주세요…….”
히끅이며 던져진 부탁에, 나는 손으로 낯가죽을 훑어내렸다.
아무래도 내 잘못인 듯했다.
**
나는 세리아의 맞은편에 앉았다.
필사적인 대화 끝에 서로 간의 오해를 해소한 뒤였다. 그럼에도 아직 세리아는 쭈뼛거리며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세리아의 침실에는 나와 관련된 온갖 제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자그마한 인형부터 시작해서, 내 초상화와 옷가지까지.
나로서는 다소 난감한 심정이었다.
세리아가 나를 흠모하고 있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 존경심으로 반짝이는 눈을 한 번이라도 마주한다면, 세리아의 마음을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 설마 이렇게까지 날 좋아하고 있었을 줄이야.
세리아는 더듬더듬 변명을 주워섬겼다.
“기, 기성품들이에요.”
무슨 소리일까.
내가 멀뚱히 세리아를 바라보자, 그녀는 황급히 설명을 덧붙였다.
“제가 일부러 찾아다닌 것이 아니라, 시장이 있거든요! 그, 이안 선배를 흠모하는 학생들이 많아서… 그러니까 제가 아무것도 사지 않고 지나칠 수가 없잖아요?! 이안 선배를 존경하는 마음만큼은 질 수 없으니까!”
“그, 그래.”
솔직히 말해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아무리 최근 많은 활약을 보이고 있다지만, 나는 아카데미의 일개 학생이 아닌가.
심지어 아카데미에서 내 인식은 딱히 좋지 않았다.
워낙 미친 짓을 많이 저지르고 다녔던 탓이었다.
그런데 그새 나를 추종하는 무리가 생기고, 또 나를 형상화한 물건들이 팔리고 있다니.
금시초문일 뿐더러 얼떨떨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세리아가 워낙 열변을 토하고 있었던 터라, 나는 감히 의문을 제기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경쟁 심리가 생겨서… 아, 아시다시피 제가 좀 욱하는 면모가 있잖아요.”
우물쭈물하며 내뱉은 변명은 그것이 끝이었다.
세리아의 푸른 눈동자가 흘깃흘깃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 모습이 애잔하기도 하고, 또 귀엽기도 해서.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뭐… 너는 원래 그런 면이 있었으니까. 요즘엔 좀 나아졌지만.”
“네, 네… 그, 그렇죠!”
세리아는 내 평탄한 어조에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해맑은 미소를 보니 마음이 놓였다.
아무래도 황녀가 착각을 한 모양이었다.
이처럼 착하고 순수한 후배가 이상해질 리가 없지 않은가.
나는 곧장 세리아에게 사죄의 말을 건네기로 했다.
“미안, 세리아. 내가 갑자기 찾아와서 놀랐지?”
“아, 아니에요! 솔직히 놀라긴 했지만, 저도 마침 이안 선배를 뵙고 싶었고…….”
“황녀 전하께서 나한테 도움을 요청하셨거든.”
세리아는 내 말에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무슨 소리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나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오해가 있었나 봐. 그, 황녀 전하께서는 살짝 특이한 면이 있으셔서…….”
“아아!”
세리아가 묘한 탄성을 터트린 것은 그때였다.
마침 무언가 짚이는 부분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푸른 눈동자가 깜박이며 과거의 어디쯤을 헤집고 있었다.
“오늘 복도에서 마주친 기억이 있어요. 그때는 머리가 복잡해서, 잠깐 스치듯 인사만 드렸는데… 절 보자마자 깜짝 놀라서 몸을 바들바들 떠시더라고요.”
“……몸을 떨었다고?”
“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당시 제 몰골이 말이 아니라서 그랬던 걸까요.”
그러면서 세리아는 다소 침울한 기색을 보였다.
자조 어린 미소가 유독 눈에 밟혔다.
혹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파고든다면 금세 알 수 있겠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그 문제를 캐묻고 싶지 않았다.
덮고 넘어가는 것이 최선이다.
까닭은 알 수 없었으나, 내 직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어차피 보다 자세한 사정은 황녀에게 물어도 충분했다.
나는 일부러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세리아를 놀려먹기로 했다.
“그래, 그랬구나… 그런데 세리아, 도대체 이 인형들은 뭐 이리 종류가 많은 거야? 어차피 다 비슷비슷해 보이는데.”
“네? 아, 아니에요!”
세리아는 내 지적에 곧장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꽤 격한 감정 표현이었다. 예전에 얼음장 같던 그 모습은 떠오르지조차 않을 정도였다.
벌써 다 컸구나, 세리아.
나는 속으로 흐뭇한 마음을 감추며, 억울하다는 듯 해설에 들어간 세리아를 바라보았다.
“잘 보세요, 선배. 이 인형은 검뿐이고, 이 인형은 손도끼까지 갖추고 있죠? 시기별로 이안 선배의 무장을 다르게 한 거예요. 그리고 또 전투 직후에는 이렇게 제복에 상처가 난 경우도 있는데, 이렇게 세세한 묘사가 또 희소가치가 있어서…….”
물론 들으면 들을수록 낯뜨거운 이야기긴 했지만 말이다.
도대체 무슨 소리야.
나는 중간에 몇 번이고 목젖을 치고 올라오려는 말소리를 삼켰다.
대신 궁금했던 점은 실컷 물어볼 수 있었다.
“이 초상화는 뭐야? 왜 꽃에 파묻혀… 세피아 꽃이구나.”
“그, 그러는 편이 더 예뻐 보여서…….”
예쁘다기보다 영정 같아 보이는데.
그렇게 세리아와 떠든 지가 한참.
어느덧 기운을 되찾은 세리아를 보며, 나는 내 역할을 훌륭히 완수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용무를 보러 가야 할 시간이었다.
유르디나 가문부터 시작해서, 엘프와 전투의 뒤처리까지 내가 해야 할 일은 잔뜩 남아 있었다.
그나마 네리스 선배가 있어 다행이었다.
내 비밀스러운 업무를 대신해 줄 사람은 그녀밖에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내가 짜낼 수 있는 여유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내 눈이 슬쩍 방 한켠에 걸린 시계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자 내 상냥한 후배는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물어왔다.
“많이 바쁘세요?”
“응, 그렇지 뭐… 여러모로 할 일이 많아서.”
세리아는 이해한다는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대화를 나눠 아쉬운 마음도 들긴 했으나, 이 또한 유르디나를 위한 일이었다.
더불어 델핀 선배를 위한 일이기도 했고.
나는 작별인사 대신 당부의 말을 남기기로 했다.
“세리아.”
그렇게 운을 뗀 뒤에도 나는 망설였다.
사실 이곳에 오기 전에 들은 소문이 있었다.
델핀 선배와 세리아가 대판 싸웠다던가.
자세한 연유는 알 수 없으나, 지금 유르디나는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닥뜨리고 있었다.
자매간의 우애가 상해 봐야 하등 좋을 것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진심을 담아 세리아에게 조언했다.
“그, 요즘 가문이 뒤숭숭하다는 건 알고 있어. 충격적인 소식이 연달아 들려왔으니 당연하겠지. 그래도 너무 네 언니를 미워하지는 마. 델핀 선배도 나름 너와 가문을 위해서…….”
“그 년이 그렇게 말하던가요?”
이어지던 내 말이 우뚝 멎었다.
나는 잠시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단지 직전에 들은 세리아의 말소리를 해석하기 위해 침묵을 지켰을 뿐.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세리아의 말을 도무지 믿기가 힘들어서, 다시금 되묻는 수밖에 없었다.
“뭐라고?”
“그 년이 그렇게 말했냐고, 여쭈었어요.”
그 지극히 평온한 어조에 파고들 틈새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싱긋 미소를 머금은 세리아의 낯은 언제나와 같았다.
귀엽고, 사랑스러우며, 순진하다.
그래서 더욱 소름이 돋았다.
언어만이 칼날로 벼려진 것만 같아서.
솜털 속에 숨은 비수를 마주한 기분이 이럴까.
내가 당황해서 넋을 놓은 사이, 얼어붙은 대기에 쐐기를 박는 대사가 이어졌다.
“그 암캐… 아니, 델핀 언니께서.”
단숨에 주위의 온도가 내려앉는다.
맺히던 땀방울이 섬찟하게 식어버릴 정도였다.
그 숨 막히는 감정의 파도 속에서, 나는 생각했다.
황녀가 옳았다.
오랜만에 마주한 내 후배는, 어딘가가 망가져 있었다.
그것도 무척이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