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2화 〉 5.5 막간: 금과 은(7)
* * *
고백컨대, 나는 그다지 눈치가 좋지 못했다.
물론 황녀처럼 지리멸렬한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다만 어린 시절부터 하루의 대부분을 검술 수련에 매진해야 했던 나였다.
인간관계는 한정적이었고, 사회성을 위해 더 많은 사람과 교류할 여유는 남아있지 못했다.
그 시절의 내게 ‘지인’이란 대개 가족이나 이웃을 지칭하는 낱말이었을 정도였다.
진정으로 동등한 관계에서 교분을 나눌 만한 친구는 많지 않았다.
그나마 셀린과 레토 정도가 내 친구가 되어주었을 뿐.
이러한 성장 과정 속에서 사회성이 두드러질 리는 없었다.
그래도 아카데미에 입학한 후에는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으나, 여전히 나는 이성을 대하기가 참 힘들었다.
마음을 읽어 내기가 어려웠던 탓이었다.
애초에 내가 알고 지내던 여자는 셀린이 고작이었다.
이성친구가 전무하다는 뜻은 아니었으나, 셀린이나 레토처럼 깊은 인연으로 묶인 사이는 없었다.
기껏해야 엠마를 비롯한 몇몇 친구들과 오며가며 인사를 나누는 정도였다.
근래 들어 내게 직면한 위기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어느덧 내 주변에는 여인들이 늘어갔고, 또 개중에는 비할 데 없이 소중해진 사람들도 있었다.
몇 번이나 내 목숨을 구해 준 성녀.
내게 연심을 털어놓은 엘시 선배.
그리고 며칠의 밤을 함께 보낸 델핀 선배까지.
그 외에도 세리아나 황녀, 엠마나 네리스 선배 또한 내게 귀중한 동료들이 되었다.
유일한 문제가 있다면, 내가 그들의 마음을 알 수 없을 때가 많다는 점일까.
바로 지금처럼.
가라앉은 대기가 옅은 떨림을 전달하고 있었다. 검푸른 눈동자에서는 어떠한 음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심연이다.
내가 기억하고 있던 푸르른 눈동자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더 질척하고 탁한 색조였다.
그 어둑한 낙차를 마주한 나는 정신이 아뜩해지는 느낌마저 받았다.
직감이 또 다시 경종을 울렸다.
함부로 입을 열어서는 안 된다고.
내 순진하고 귀엽던 후배는, 이제 진득한 감정을 언어로 토해내고 있었다.
“그 년이 그러던가요? 가문을 위해서, 저를 위해서 그랬다고?”
소녀의 낯빛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얼핏 보기에는 내가 이상하다고 느껴질 지경이었다.
평온한 얼굴을 한 후배를 앞에 두고, 식은땀을 흘리고 있다니.
하지만 세리아의 앞에 선다면, 누구나 나와 비슷한 반응을 보일 터였다.
박력이 달랐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살의에 젖어 철퍽거린다.
으스스한 한기에 살갗이 아렸다.
아무리 눈치가 없는 나라도 알 수 있었다.
지금 세리아는 화가 나 있었다.
아주 많이.
“그 암캐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네요. 가문을 위해서라는 핑계는 둘째치고, 나를 위해서……?”
풉, 큭.
우습다는 듯이, 세리아의 입가가 사나운 호선을 그렸다.
찰나의 미소였다.
그리고 이내 그마저도 사라진 여인의 낯빛은 지독히도 살벌했다.
나조차도 움찔할 만큼.
으득, 으득, 이를 갈며 내뱉어지는 증오의 말들이 귓가를 적신다.
“웃기지 마, 전부 빼앗아 갔잖아… 내 소중한 것들이라면 전부! 그런데 날 위해서라고? 암캐 주제에… 당신은 내 언니도 아니야. 차라리 죽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니, 차라리 나를 죽였으면 좋았을 텐데……!”
세리아의 동공에 경련이 일었다.
불안정한 초점은 세리아의 초조한 심정을 대변하는 듯했다. 견디다 못한 세리아는 제 입가에 엄지를 가져다댔다.
그리고 으득, 하고 엄지를 깨물기 직전.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세리아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만!”
내 갑작스러운 제지에 세리아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마치 내가 제지할 줄은 몰랐다는 눈빛이었다.
아니라면, 왜 자신이 제지를 당해야 하는지 깨닫지 못했거나.
나는 조마조마한 심정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말했다.
“세리아, 조금 흥분한 것 같아… 일단 마음부터 가라앉히자.”
“아니요, 이안 선배.”
그렇게 답하는 세리아의 숨소리는 지극히 침착했다.
그 눈빛마저 너무나 진중해서, 무심코 손목을 쥔 손에 힘을 풀 뻔했을 정도였다.
“전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정상적이에요. 자, 보세요?”
탁, 하고 세리아는 남은 손으로 탁자를 짚고 몸을 일으켰다.
사뿐사뿐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소녀와 내 몸이 가까워졌다.
내가 손목을 쥐고 있었던 탓에, 탁자를 빙 돌아 내게 다가오는 모습이 연출되고 있었다.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세리아의 눈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초점이 보이지 않는다.
마치 단색으로 이루어진 그림처럼, 짙고 짙은 감정만이 배어나오는 동공.
나는 그 근원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 얌전히 있잖아요.”
“……?”
그게 무슨 소리냐고, 되묻기도 전에.
“신기하지 않아요? 전부 다 빼앗겼다고요… 전부 다! 마지막으로 단 하나 남겨 달라고 하던 것마저도! 그런데 저, 이곳에 얌전히 있잖아요. 칼을 들고 죽이려 들거나, 다시 빼앗아 보겠다고 멍멍 짖어대지도 않잖아요?!”
“세리아, 잠깐. 잠깐만…….”
나는 쏟아지는 분노의 향연에 그만 정신이 아찔했다.
도무지 대화의 맥락을 쫓아갈 수가 없었다. 반쯤 애원하다시피 질문을 던진 까닭도 그래서였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잘 모르겠거든. 그러니까… 델핀 선배가 너한테 뭘 빼앗아 갔다고?”
정작 세리아는 내가 알고 싶은 정보를 알려주지는 않았다.
단지 입을 꾹 다물더니, 나를 한참 동안이나 말없이 쳐다보았을 뿐이었다.
그러기를 얼마쯤.
내가 어색한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무어라 입을 열기 직전에, 세리아가 나지막한 음성을 토해냈다.
“이안 선배.”
“응?”
훅, 하고 빛 없는 눈동자가 내 목전까지 치달았다.
나는 살짝 놀랐지만, 일부러 세리아의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자세히 살펴봐도 빛이 바라지 않는 미모였다.
무심코 나는 델핀 선배를 떠올리고 말았다.
델핀 선배도 아름다웠으나, 세리아는 그 미의 방향성이 달랐다.
델핀 선배가 태양이라면 세리아는 달이다.
시리고 가냘픈 속눈썹만 보아도 그랬다.
묘한 한기가 감돌고 있어도 세리아는 세리아였다.
나는 그 미모에 잠시 넋을 놓고 말았다.
어느덧 소녀의 속눈썹이 내 망막을 간질이기라도 할 듯 다가와 있었다.
소녀의 달콤한 숨결까지도.
“얼마 전에, 언니의 침실에서 남자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그리고 벼락이 쳤다.
새하얀 전류가 척추를 찌르르 타고 흐른다.
내 몸은 대번에 얼어붙어,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본 건가?
이틀 전, 델핀 선배의 침소에서 보냈던 열락의 시간을.
상상도 하지 못했던 사태라, 나는 아무런 대답도 내놓을 수 없었다.
애초에 이럴 때는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마치 바람을 피우다 걸린 연인이 된 기분이었다.
정작 내가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는데 말이다.
그러든 말든, 세리아는 속삭이듯 추궁을 이어갔다.
“그날 밤에… 어디 계셨어요, 선배?”
“글쎄? 내 기억으로는 일찍 자러 간 걸로…….”
“그때가 언제인 줄 알고요?”
아차.
뻔뻔스레 거짓말을 늘어놓던 나는 결국 묵비권을 행사하기로 했다.
나를 바라보는 세리아의 시선이 더욱 가늘어졌던 탓이었다.
무어라 더 말해봐야 소용 없었다.
이미 세리아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이를 부정할 수단은 내게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정적이 내려앉았다.
물끄러미 나를 응시하고 있던 세리아가 한숨을 푹 내쉴 때까지, 나는 시선을 피한 채 한사코 대답을 거부했다.
세리아는 골치 아프다는 듯 제 이마를 짚었다.
“실수하셨어요, 선배. 하필 단 둘이서 술을 마시다니요… 심지어 그 상대는, 발정난 암캐.”
‘암캐’는 너무한 표현이 아닐까.
나는 이의를 제기하고 싶었으나, 결국 속으로만 중얼거리는 데 그쳤다.
세리아의 기분은 여전히 좋지 않아 보였다.
언뜻 비치는 푸른 눈동자가 매서운 살의로 번뜩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해해요. 선배도 한창 때의 남자시니까요.”
“그, 그래?”
나는 다소 자비로워진 세리아의 기준에 희망을 걸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 생각해 보니 억울하긴 했다.
말마따나 나는 한창 때의 남자였다.
매력적인 여인과 하룻밤을 보내는 정도야, 이상한 일도 아닐 터였다.
심지어 나와 세리아는 이성으로서 그다지 많은 접점을 가지지 못했다.
성녀나 엘시 선배가 나를 추궁한다면 할 말이 없겠지만.
세리아가 도를 넘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 뇌리를 스쳤다.
선배로서 교정해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물론 그따위 잡념이 사라질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안 선배도 사람인데, 겉모습만큼은 훌륭한 여자가 유혹하면 견디기 힘들겠죠. 게다가 술까지 드셨고… 그러니까, 그건 어쩔 수 없는 사고였다고 생각해요.”
“그, 그래. 뭐… 그런 면이 조금 있기도 한 것 같고.”
“누구든 상관 없었던 거죠?”
재차 던져지는 질문에 나는 묘한 불길함을 느꼈다.
지금까지는 세리아의 살벌한 기세에 넘어가 고개만 끄덕여 주었지만, 대화의 흐름이 이상했다.
누구든 상관없다니.
나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누구든 상관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
“누구든 상관없잖아요!”
강하게, 내 팔을 움켜쥐면서.
세리아는 불타는 눈동자로 말했다.
청염(?)이었다.
“그래요, 누구든 상관없었던 거야. 술에 취해서, 정욕을 풀 상대라면… 누구나. 굳이 언니가 아니더라도. 으응, 그래. 나라도.”
“세리아, 제발 진정… 큭?!”
나는 더 늦기 전에 세리아의 어깨를 붙잡으려 들었다.
그러나 그보다 세리아가 더 빨랐다.
꾹꾹, 세리아의 검지가 내 가슴을 눌렀다. 나는 그 맹렬한 돌진에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야 했다.
“그랬던 거죠?! 그 간악한 여자가 그걸 몰랐을 리가 없어요. 그러니까, 나한테 뺏어간 거야. 비겁한 수까지 동원해 가면서!”
“다시 말하지만, 세리아. 너 지금 많이 흥분…….”
“절 안아 주세요.”
탁, 하고 벽면까지 내몰린 끝에 들은 부탁이었다.
나는 더욱 미간을 좁히는 수밖에 없었다.
포옹이야 얼마든지 해줄 수 있지만, 그 의미로 꺼낸 말이 아니라는 사실쯤은 알고 있었다.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내가 멍청이는 아니었던 탓이었다.
더는 피할 곳이 없는 내게 세리아가 밀착했다. 탄력 있는 여체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나는 한숨을 푹 내쉬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 세리아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리고 제정신이 아닐 때 이처럼 중요한 결정을 내려서는 안 됐다.
“누구든 괜찮은 거잖아요?! 그, 그러니까 제가……!”
“세리아, 너 지금 제정신 아니야.”
내 나지막한 호통에 세리아는 도리어 이를 악물었다.
더욱 거칠어진 어조가 소녀의 입에서 토해졌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었다.
“아니요, 제정신이에요! 그 어느 때보다도……!”
그리고 콱, 하고 세리아의 턱에 틀어박히는 손도끼.
물론 도끼날은 아니었다.
그 반대편이었지만, 빛살처럼 쏘아진 금속 덩어리의 위력은 어마무시했다.
설령 초인에 달한 검사라도 제대로 서 있을 수는 없으리라.
심지어 그것이 불의의 일격이었다면야.
눈을 부릅뜬 채로, 세리아의 몸이 허공을 날았다.
소녀의 푸른 눈동자에 타오르던 불길이 사그라졌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렇게 철푸덕 쓰러진 소녀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단지 잔경련을 일으키며, 서서히 눈꺼풀을 닫았을 뿐.
혼절이었다.
그제야 자유를 되찾은 나는 짜증을 담아 머리카락을 어지럽혔다.
손도끼의 옆면을 탁, 하고 손바닥에 내리치면서.
“……하여간, 정신 좀 차리라니깐.”
예로부터, 제정신이 아닌 사람에게는 약이 하나뿐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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