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3화 〉 5.5 막간: 금과 은(8)
* * *
내가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날이었다.
그 어려운 입학 시험을 통과했다는 기쁨은 찰나에 불과했다.
정작 본가를 떠나 타향살이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나는 번잡스러운 마음에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기대와 불안이 뒤죽박죽 뒤섞이는 느낌이었다.
아카데미는 명실상부 대륙 최고의 교육기관이다.
평민은 물론이고, 나와 같은 제국의 하급귀족들도 발에 채일 정도로 많을 것이 분명했다.
심지어는 쳐다도 보기 힘든 존귀한 신분의 사람들도 있을 테지.
그 틈바구니 속에서 4년을 버텨야 하는 것이다.
부담감이 없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내 여동생의 걱정거리는 따로 있는 듯했다.
“오빠, 잘 들어… 세상의 모든 여자는 여우야.”
야심한 밤에 찾아와 무슨 말을 하려나 했더니, 그다지 쓸데도 없는 이야기였다.
나는 하품을 하며 관심 없다는 티를 팍팍 냈다.
그럼에도 리아는 내게 재차 당부했다.
“지, 진짜라니까?! 절대 한 눈 팔지 말고, 다가오는 여자가 있어도 알아서 쳐내야 해. 오빠의 지위와 재산을 노리고 접근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거라고!”
“시골 자작가의 차남한테 무슨…….”
“아니, 아니. 그건 오빠가 여자들의 세계를 몰라서 그래… 그리고 한때의 여흥을 목적으로 접근하는 여자도 있을걸? 오빠가 떠받들어 주기를 바라면서!”
딱히 감흥을 이는 조언은 아니었다.
내 눈빛이 떨떠름해지자, 리아는 답답하다는 듯 제 가슴을 팍팍 내리쳤다.
혹시 셀린을 닮아가는 걸까.
벌써 몇 년을 교류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싶었다.
“하여튼 명심해. 모든 여자는 여우다, 조심해야 할 존재다!”
“그럼 연애는 어떻게 해?”
“하지 마!”
리아는 약점을 들킨 고양이처럼 갸르릉대며 외쳤다.
“어차피 나중에 나랑 살기로 했잖아! 여자친구가 왜 필요한데!”
“그래, 그래. 알았다.”
당시의 나는 그렇게 리아의 경고를 흘려듣고 말았다.
사랑하는 오빠를 떠나보내기 직전이었다.
여동생이 귀여운 투정을 부리더라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또 이를 증명하듯 이후 몇 년 동안이나 이성관계로 골머리를 썩은 적도 없었고.
그러나 오늘, 나는 어째서인지 그날의 기억이 새록새록 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새근거리며 잠든 후배를 앞에 두고서.
의식을 잃은 세리아는 옅은 신음만을 내뱉었다. 눈가에 맺힌 자그마한 이슬이 유독 눈에 밟혔다.
소녀의 품에는 나를 본뜬 인형이 안겨져 있었다.
당연히 내가 건네준 물건은 아니었다.
침대에 눕히자마자 세리아가 버릇처럼 제 품으로 끌어당겼을 뿐.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기나긴 한숨을 내뱉었다.
아무리 눈치가 없는 나라도 알 수 있었다.
세리아가 내게 품은 마음이 각별하다는 사실을.
아무리 남녀가 동등한 대접을 받는 세상이라지만, 여전히 더욱 정조 관념을 강요받는 쪽은 여성이었다.
남자의 동정과 여성의 순결이 지닌 무게는 저울에 매달아 볼 필요도 없었다.
무조건 여자 쪽이 손해다.
하물며 그 여성이 고위 귀족이라면야, 더더욱 등가교환이 성립될 가능성은 드물었다.
그리고 위와 같은 사실들이 가리키는 바는 하나였다.
설령 이성을 잃었더라도, 마음에도 없는 상대에게 동침을 요구하는 여자는 없다.
세리아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나는 그 난감한 결론에 침묵을 지켰다.
“이안 선배…….”
내 심란한 마음도 모르고, 세리아는 그렇게 훌쩍일 뿐이었다.
무의식 중에도 내 이름을 중얼거릴 정도라니.
세리아의 연심은 상상 이상으로 깊어 보였다.
그래서 더더욱 마음이 복잡했지만.
내게는 이미 잠재적인 연애 상대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었다.
예를 들어, 내게 가장 먼저 고백을 한 엘시 선배라든가.
본래 순결했어야 할 몸 이곳저곳을 만지작거린 성녀라든가.
아예 첫날밤을 치른 델핀 선배도 빼놓을 수 없었다.
그런데 하필 이때 세리아의 마음을 알게 된 것이다.
나로서는 갑작스러울 뿐더러, 한숨이 푹푹 나오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내 손이 곤히 잠든 세리아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세리아는 이제 끙끙거리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악몽이라도 꾸는 듯했다.
“세리아…….”
이성으로는 거절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자꾸만 세리아가 기절하기 전까지 보였던 집착이 마음에 걸렸다.
누가 보아도 비정상적인 광경이었다.
나를 잃어버렸다는 충격에 제 엄지를 씹으려 들거나, 존경하던 언니를 ‘암캐’라고 칭하질 않나, 종래에는 이성을 잃고 나를 덮치려고까지 했다.
물론 내가 맨정신일 때만 여인들과 교분을 나눈 것은 아니었다.
성녀나 델핀 선배와는 술의 힘을 빌려 다소 과감히 진도를 뺀 면모도 있었다.
하지만 세리아는 그 이상으로 이성을 잃고 있었다.
취기 따위로 설명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일단 기절시켰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많이 놀란 탓이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세리아를 진정시키기 위해서였다.
제정신이 아닌 여인과 거사를 치를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렇게 한숨만 깊어지던 와중이었다.
누군가 문을 살짝 열고 빼꼼 고개를 내미는 기척이 느껴지더니, 곧 종종거리며 소녀 하나가 내 옆에 섰다.
휘둥그레 뜨인 두 눈이 그녀의 감상을 대변하고 있었다.
제국의 제5황녀, 시엔.
내게 세리아가 이상해졌다고 증언한 인물이었다. 아무래도 이후의 상황이 궁금해 침실까지 찾아온 듯했다.
“세상에, 이안 경…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어째서 유르디나 선배가…….”
“사정이 있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심란하던 차였다.
황녀에게 답하는 내 목소리는 괴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더는 묻지 말아달라는 암묵적인 신호였다.
하지만 숨겨둔 말뜻을 곧장 알아들을 황녀가 아니었다.
“유르디나 선배도 마음고생이 심하셨나 봐요. 그새 야위셨어요… 기운이 없는지 정신도 못 차리시고, 불쌍하셔라.”
이어지는 황녀의 연민에도 나는 침묵을 지켰다.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당장 무얼 어찌 해야 할지도 모르는 마당인데.
나는 말없이 세리아의 얼굴만 내려다 볼 따름이었다.
그때, 또 다시 소녀의 입술을 비집고 애틋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안 선배… 흐윽, 버, 버리지 말아주세요…….”
황녀의 눈빛이 더욱 가라앉았다.
그 연회색 눈동자에 우울한 심상이 떠오르고 있었다.
한결 어두워진 음색으로, 황녀는 중얼거렸다.
“역시나, 그랬군요.”
“……알고 계셨습니까?”
나는 의외라는 듯 황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사실 다소 자괴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황녀가 눈치 챘을 정도라면, 나를 제외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세리아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남녀관계에 한해서는 내가 황녀보다 둔감하다는 뜻이기도 했고.
어느 쪽이든 반가운 소식은 아니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진실은 냉혹한 면이 있었다.
“그야 알 수밖에 없죠. 아무리 선배라고 해도, 그렇게 종일 졸졸 따라다니는 건 사심 없이는 불가능해요. 특히나 남녀 사이에서는.”
그러면서 황녀는 힐끔힐끔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내가 의문을 담은 시선을 보내자, 황녀는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흠흠, 하는 귀여운 소리.
그리고 재차 강조하는 말이 이어졌다.
“아시겠죠? 아무리 선배라고 해도, 그렇게 졸졸 따라다니는 건 사심 없이는 불가능하다고요!”
“아, 네. 뭐… 알겠습니다.”
나는 일단 고개를 주억거리며 얼떨떨한 동감을 표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황녀가 나보다 이성관계에 밝은 것은 사실로 보였다.
그러니 아마 저 말도 옳겠지.
허나 황녀는 여전히 못마땅한 기색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반응이었으나, 황녀는 이내 시선을 세리아에게로 돌리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소녀의 낯빛에 다시금 동정이 어리기 시작했다.
“유르디나 선배를 마주쳤을 때, 난생 처음 보는 감정의 색채를 느꼈어요. 어둡고 끈적해서, 당장이라도 집어 삼켜질 것만 같은 감정의 파도였죠. 무서워서 일단 이안 경께 달려갔지만, 이제 다른 감정도 보이네요.”
황녀는 굳이 그 감정의 정체를 말해 주지는 않았다.
나 또한 이미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시작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유르디나 선배께 대답을 드리셨나요?”
“아니요, 그럴 틈도 없이…….”
“아아,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혼절하신 거군요.”
황녀는 이제 눈가에서 눈물까지 찍어내고 있었다.
세리아의 처지에 깊이 몰입한 듯했다.
“아무리 이안 경이시더라도, 그 절절한 고백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으셨겠죠. 그렇게 머뭇거리던 사이에 유르디나 선배가 기절한 거죠?”
내 입이 절로 꾹 다물어졌다.
아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기는 했는데.
정작 세리아가 혼절한 원인은 따로 있어서,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하기야, 이렇게 가녀린 여자한테 어찌 그리 매몰차게 굴 수 있겠어요… 손길을 뿌리치기는커녕. 심한 말도 하지 못하셨겠죠.”
크흠, 하고 나는 헛기침을 하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이제 그 이야기는 그만하자는 뜻이었다.
물론, 황녀는 언제나 그렇듯 눈치가 없었다.
내 암묵적인 의사 표현을 알아들을 턱이 없었다.
그렇게 나를 향한 성토가 이어졌다.
“설마 사랑을 고백하는 여자를 건드리는 남자가 있을까요?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쓰레기일 거예요. 나쁜 남자!”
“그래도 유르디나 선배가 좋아하는 상대가 이안 경이라서 다행이에요. 적어도 이안 경은 기사도에 어긋나는 행동은 하지 않잖아요?”
“이안 경은 유르디나 선배를 어떻게 달래 주셨나요? 혹시, 품에 안고 따스한 말을 건네 주셨다던가…….”
한 마디, 한 마디가 치명타였다.
나는 몸을 부르르 떨다가, 이내 견디지 못하고 소리쳤다.
“그만!”
갑작스러운 외침에 황녀는 깜짝 놀라 나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내가 왜 이러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죄책감이 들던 차에, 가슴에 비수까지 꽂힌 격이었다.
짜증이 나지 않았다면 이상했다.
하지만 또 황녀에게 무어라 타박을 주기도 웃긴 꼴이었다.
그녀는 틀린 말을 하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잘못한 쪽은 나였다.
무엇보다 상대는 황제의 친딸이었다. 눈치가 없다는 이유로 꾸중을 들을 만한 위치가 아니었다.
그래서 결국 나는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이내 체념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대신 나는 황녀와 보다 건설적인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우리, 잠깐 일 이야기 좀 합시다.”
유르디나 가문의 운명을 결정지을 처분.
황제 앞에서 나를 대변할 만한 적절한 인물은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이 문제가 해결되어야, 세리아의 마음에 대해서도 논의해 볼 수 있으리라.
그날, 나는 세리아가 일어날 때까지 황녀와 머리를 맞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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