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4화 〉 5.5 막간: 금과 은(9)
* * *
세리아는 부스스 눈을 떴다.
졸음이 가시지 않는 눈은 혼탁하기만 했다. 몽롱한 정신이 단련된 지각 능력을 따라가지 못했다.
이곳은 어디지.
흙먼지가 부유하는 기억의 물웅덩이 속에서, 세리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마치 절단된 것처럼 과거의 화상이 끊겨 있었다.
정확히는, 의식을 잃기 직전의 기억들이었다.
세리아는 멍한 정신으로도 차근차근 지난 시간을 되짚어 갔다.
이안 선배가 침실에 방문했다.
마침 선배를 본뜬 인형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던 세리아는 당황했다.
그리고 그 후에는.
말갛게 가라앉은 추억들이 하나둘씩 제자리를 찾아간다.
진흙이 사라진 물웅덩이는 가려졌던 진실을 들추었다.
그래, 이안 선배가 그 암캐 이야기를 꺼냈구나.
세리아는 화가 났다. 도저히 이성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제정신이 아닌 채로 이안 선배를 채근했었지.
그리고 그 다음에는.
기억이 하나둘씩 되살아날 때마다, 세리아의 낯에 핏기가 가시기 시작했다.
본래도 새하얗던 피부가 창백해질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소녀의 상반신이 벌떡 일으켜졌다.
어떻게든 해명해야 한다.
아니, 그 전에 용서를 빌어야 했다.
느닷없이 이안 선배에게 잠자리를 강요한 꼴이었다.
무려 고백조차 하지 않은 상태에서 말이다.
세리아가 비슷한 짓을 당했다면, 결코 상대를 용서하지 못하리라.
그 어느 때보다 심장이 거칠게 맥동한다.
초점을 맞추지 못하는 눈동자와, 과한 힘이 들어가 경련하는 팔다리가 소녀의 불안을 증언했다.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만일 바라마지 않던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오지만 않았다면.
“일어났어?”
우뚝, 하고 세리아의 몸이 뻣뻣이 굳는다.
불신을 담은 눈동자가 서서히 측면을 향했다. 그곳에는 언제나와 같은 얼굴을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이안 선배였다.
세리아는 몇 초 동안 넋을 놓았다가, 이내 화들짝 놀라 시선을 떨구었다.
부끄럽다.
그리고 죄송했다.
그야말로 면목이 없어서, 세리아는 울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 그, 그러니까… 이, 이안 선배!”
“응, 그래.”
이안의 목소리는 의외로 여유가 넘쳤다.
그대로 기절한 자신과는 달리, 한동안 마음을 정리할 틈이 있었기 때문일까.
세리아는 당장이라도 수치심에 혀라도 깨물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실제로 깨물기도 했다.
너무 당황했던 탓에, 오랜만에 혀 씹는 소리를 낼 정도였다.
“그, 그게헤… 으으, 저!”
세리아의 눈앞을 하나둘씩 스쳐 지나가는 화상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충격을 남긴 장면은, 세리아의 턱을 치고 지나가는 이안의 손도끼였다.
언어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너무나 노골적인 대답이었다. 또 잔인하기도 했고.
여타의 여인이었다면 차라리 이안을 욕할지도 몰랐다.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세리아는 진심을 털어놓고 있었다.
이를 대화가 아닌 폭력으로 해소하려는 시도는 실례라면서.
하지만 세리아는 차마 사랑하는 선배를 원망할 수 없었다.
그저 모든 것이 제 잘못처럼 느껴졌다.
내가 못 생겼으니까.
내가 매력적이지 못하니까.
그래, 내가 언니보다 못하니까.
어느덧 세리아의 푸른 눈동자에선 맑은 이슬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주, 죽여… 흐윽, 주세요…….”
수치와 절망, 열패감이 뒤섞여 내뱉은 부탁이었다.
당연히 빈말은 아니었다.
세리아는 단두대에서 칼날을 기다리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흘러넘치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서.
“제발, 흑… 제발 죽여 주세요. 더는, 더는 견디기가 힘들어요.”
“세리아.”
“제 잘못이에요.”
이안의 한숨 섞인 호명에, 세리아는 결연한 의지를 다지듯 이를 악물었다.
정작 그 낯빛은 처연하기 그지 없었지만.
“제가, 제가 못난 탓이겠죠… 죄송해요, 이안 선배. 흑… 처음부터 끝까지 폐만 끼쳐서.”
사내가 말없이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소녀는 끝없이 울었다.
이러다 탈수로 죽어버리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기분 나쁘시죠? 말도 잘 못하고, 소심해. 게다가 친구도 없는 데다 천출이잖아요. 어딜 내놔도 언니보다 못한 여자가 느닷없이 고백까지 해서.”
“세리아…….”
“죄송해요, 감히 선배에게 과분한 마음을 품어서. 그, 그래도 앞으로는 눈에 띄지 않도록… 아니, 그래도 곁에만 남을 수 있도록…….”
“세리아!”
답답한 마음을 이기지 못한 사내가 목청을 높인 후에야, 소녀의 입이 다물어졌다.
그럼에도 아직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안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 그렇게 좋은 사람 아니야. 나 없어도 세상에 남자는 많아.”
“아니요, 이안 선배는 유일해요.”
세리아는 훌쩍이면서도, 그렇게 단언했다.
한 치의 의심조차 섞이지 않은 어조였다.
“모두가 날 미워할 때, 제 곁에 있어 주셨잖아요. 그리고 절 구해 주셨고.”
“그건 누구나 할 수 있어. 단지 내가 너와 일찍 가까워졌을 뿐이지.”
“아니요, 이제 못해요.”
다시금 소녀의 뺨을 타고 맑은 물방울이 흐른다.
세리아는 이제 눈물을 훔칠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이안 선배가 아니면 싫어요. 이안 선배가 제 전부에요.”
그 단단하고 담백한 진술은 파고들 틈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안은 세리아가 진심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한참을 망설였다.
세리아한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더 나아가 스스로 무슨 미래를 택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불현듯 이안의 뇌리를 스치는 것은 어느 여인의 초상이었다.
처음으로 그에게 진심을 털어놓았던 그녀.
결국 이안은 기나긴 한숨을 내뱉었다.
“세리아, 사실 나 쓰레기야.”
그 폭력적인 어휘에 푸른 눈동자가 동그랗게 뜨였다.
울컥, 하고 세리아는 이를 부정이라도 하겠다는 듯 입술을 달싹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보다 이안 쪽이 더 빨랐다.
“고백 받은 여자가 있어. 기다려 달라고 했는데, 또 갈팡질팡하다가 다른 여자랑 잠자리까지 가졌잖아. 벌써 이래저래 건드린 여자만 셋이야. 우유부단하고 둔감하지, 심지어 겁도 많아.”
단숨에 쏟아지는 고백에 세리아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이것은 이안이 숨기고 있던 진심이었다.
영원히 파묻어 두고 싶었을지도 몰랐다.
엘시를 제외하면,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본심.
“솔직히 말해서 무서워. 진지한 관계를 가질수록, 지키고 싶은 것이 많아질까 봐… 난 세상을 구해야 하잖아.”
한탄처럼 내뱉어지는 말귀들은 일견 짜증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혹은 부담감에 눌려 힘겨워 보이기도, 오랜 사투에 지쳐 버린 듯도 보였다.
“이래도 날 좋아할 수 있겠어? 난, 어차피 누구도 고르지 못해. 델피렘의 심장에 칼을 꽂기 전까지.”
세리아는 문득 어느 사내를 떠올렸다.
사랑하는 선배와 동일한 외견을 지녔으나, 그 눈빛에 담긴 감정은 지극히 마모되어 있던.
선배는 그 사내를 닮아가고 있었다.
애정과 독기로 반짝이던 눈빛이, 어느새 이토록 피로로 젖어 버렸는지.
세리아는 이 와중에도 이안이 불쌍해 견딜 수가 없었다.
어차피 대답은 달라지지 않는다.
“네.”
습기를 잔뜩 머금은 목소리였으나, 세리아는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좋아할 거예요. 앞으로도 쭉.”
왜냐하면 내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이니까.
다시금 빛을 되찾은 푸른 눈동자를 마주하며, 이안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럼 조금만 기다려 줘.”
세리아의 마음에 답하는 것은, 최소한 유르디나 가문에 대한 처분이 결정된 뒤다.
이안은 그렇게 다짐하며 세리아를 품에 안았다.
그래, 세리아는 이래야지.
귀엽고 사랑스러우며, 순진한 후배.
이따금씩 집착이 과할 때가 있지만, 이안은 세리아의 이러한 점을 참 좋아했다.
제정신을 차려서 다행이다.
그것이 이안의 진실한 감상이었다.
그래도, 뭐.
도끼로 기절시킨 것은 과하긴 했지만.
세리아가 잊어버린 듯해서 다행이었다.
**
이안이 떠난 후, 세리아의 낯빛에는 간만에 생명력이 감돌았다.
꿈만 같았다.
꼼짝없이 버림받을 줄 알았는데, 무려 선배의 품에 안기기까지 하다니.
그 이상은 진도를 빼지 못해도 좋았다.
선배는 기다려 달라고 했다.
다시 말해 이는 세리아에게 아직 기회가 남아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아직은 그 암캐년이 앞서고 있으나, 세리아에게 주어진 시간은 길었다.
언젠가는.
그래, 언젠가는.
세리아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방 한 켠에 놓인 피 묻은 옷가지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안이 세리아 대신 늑대 마수를 상대할 때 입고 있던 옷이었다.
처음에는 폐기 처분을 하려고 했으나, 수렵제 준비로 한창 정신이 없을 때라 차마 버리지는 못했다.
그 이후에는 버려야 할 까닭이 없어졌고 말이다.
이안의 옷에서는 추억의 냄새가 났다.
이안이 처음 세리아를 구해주었던 날의 향기.
흙먼지를 뒤집어 쓰고, 피투성이가 된 이안 선배라.
멋있었지.
세리아는 제복에 남은 피 냄새를 맡으며, 몽롱해진 정신으로 사고했다.
그래서 눈치 채지 못했다.
제 등 뒤로 피어오르는 검은 안개를.
[피를, 피를 속이지는 못해.]
[넌 괴물이야. 언젠가는 알게 될 테지. 머지 않은 미래에…….]
큭큭, 킥킥, 쇠를 긁는 듯한 불길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럼에도 세리아는 이를 조금도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도리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평온한 낯빛이었다.
검은 연기는 그 무관심에 지쳤는지 이내 진흙으로 화해 무너져 내렸다.
마룻바닥에 스며들면서도, 그 불쾌한 폭소는 멈추지 않았다.
[나는 알아, 냄새가 난다… 네 피의 주인께서 오고 계신다. 저 머나먼 남쪽에서…….]
도리어 환희에 찬 부르짖음이 잔향처럼 감돌았을 뿐.
[‘질투’께서 오시리라!]
이윽고 진흙은 새하얀 연기를 남기며 사라져 버렸다.
**
델핀 선배와 오랜만에 마주한 날.
나는 세리아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았고, 델핀 선배는 코웃음을 치며 내게 말했다.
“자.”
단 한 음절에 불과한 대답이었다.
그 저의를 짐작하지 못한 나는 얼빠진 반문을 내뱉어야 했다.
“네?”
그러자 델핀 선배는 친절하게도 보충 설명을 해주었다.
“그렇게 소원이라는데, 하룻밤 자 주라고… 그럼 되잖아?”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묘수였지만 말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