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5화 〉 5.5 막간: 금과 은(10)
* * *
델핀 선배를 만나기 전, 나는 며칠 동안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야 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델핀 선배를 보고 싶었다.
나는 황제로부터 유르디나 가문의 처분을 일임받은 입장이었다. 당연히 그 전에 유르디나 가문의 사정을 청취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이를 가장 잘 알고 있을 이는 바로 델핀 선배가 아닌가.
더불어 세리아의 연심까지 들은 판이었으니, 나로서는 머리가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쪽이든 델핀 선배의 조언이 간절했다.
정작 델핀 선배는 나를 만나주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황제의 신임은 소중한 자산이야. 아녀자가 돼서, 남편의 일을 망칠 수는 없잖아.”
제국 첩보부에게 자그마한 빌미조차 내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이 옳았다는 사실은 곧 증명되었다.
다름 아닌 네리스 선배에 의해서였다.
“이안 님, 최근에는 유르디나 가문의 차기 가주와 접촉이 많이 줄어드셨군요.”
넌지시 던진 말이었으나, 그 의도는 명확했다.
제국 첩보부가 나와 델핀 선배의 관계를 주목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경고보다는 충고에 가까운 말이었다.
일부러 내게 델핀 선배와 접촉을 줄이는 편이 좋다는 점을 알려준 것이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그래도 됩니까?”
언제나와 같이 공손한 자세로 서 있던 네리스 선배의 눈빛에 짧은 동요가 일었다.
내가 알기로, 네리스 선배는 딱히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당장 내가 네리스 선배라 해도 그랬을 터였다.
문답무용으로 도끼부터 휘두르는 상사를 누가 좋아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네리스 선배는 내게 필요한 정보를 넘겼다.
상부로부터 내려온 지시가 아니라면, 이는 순전히 네리스 선배의 호의라 봐야 했다.
내 물음에도 여인은 한동안 망설이는 기색을 보일 뿐이었다.
그러기를 한참.
이내 결의를 다진 듯, 네리스 선배는 고개를 살짝 치켜들며 반문했다.
“왜 구해 주셨습니까?”
많은 요소가 생략된 질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기다렸다. 네리스 선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절절한 어조를 덧붙였다.
“엘프에게 야습을 당했던 날, 굳이 절 구해야 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절 포기하고 이안 님께서 살아나가시는 편이 전략적으로도 옳은 판단이었어요. 그런데 왜……!”
오랜 시간 파묻어 두었던 의문이었으리라.
이어질수록 달구어진 목소리는 최후에 이르러서야 우뚝 멈춰 섰다.
암녹빛 눈동자가 나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네리스 선배의 낯빛이 새파래졌다. 그리고 급히 고개를 떨구며, 내게 변명을 주워섬기기 시작했다.
“이, 이안 님의 결정에 의문을 품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네… 호, 혹시 그렇게 비쳤다면 사죄…….”
“구하고 싶어서요.”
내 담백한 대답에, 네리스 선배의 입술이 꾹 다물어졌다.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는 듯했다. 정작 흔들리는 눈빛은 숨길 수 없었지만.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옅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구하길 잘했네요, 지금 보니까.”
그 근거조차 드러나지 않는 말이었다.
나로서는 단순한 감상을 읊었을 뿐이었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네리스 선배의 심정은 조금 다른 듯했다.
여인의 볼이 살짝 붉어졌다.
칭찬을 받을 때마다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오늘 네리스 선배의 귓가를 물들이는 색조는 무언가 달랐다.
예전에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느낌이었다면, 오늘은.
그래, 그야말로 부끄러워 보였다.
그제야 나는 네리스 선배도 여자라는 사실을 알았다.
**
그 외에도 만나야 할 사람은 많았다.
다행스럽게도 황녀의 필사적인 설득은 나름 잘 먹히고 있는 듯했다. 나를 볼 때마다 반색을 하는 황녀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불안한 점이 하나 있다면, 오직 하나뿐이었다.
바로 황녀의 괴멸적인 눈치.
혹시 황녀는 협상이 지지부진한데도 잘 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부디 그러한 결과가 나오지 않길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레토가 일러준 수가 나름 설득력 있기도 했고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한 줌의 불안을 지워버릴 수가 없어서, 마침 생각나는 사람을 만나러 가기로 했다.
어떠한 정치적인 영향 관계에서도 무관한 인물이자, 내 마음을 치유해 주는 샘물 같은 여인.
내 친구 엠마였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꽤나 야위어 있었다.
누가 봐도 기력이 빠진 모습이었다. 심지어 잔기침까지 하고 있었으니, 환자라 봐도 무방했다.
나는 엠마의 처량한 몰골을 보자마자 펄쩍 뛰었다.
“엠마, 괜찮아?!”
“안녕, 이안…. 콜록, 미안. 내가 몸이 좋지 않아서…….”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하지!”
나는 곧장 하인을 불러 엠마의 병간호를 부탁하려다 그만두었다.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엠마가 사용인을 부르지 않은 까닭이 있을 터였다.
내가 눈치 없이 그 마음을 해칠까 싶어 겁이 났다.
대신 나는 엠마를 부축하듯 품에 안고, 침대로 이끌었다.
벽난로에 땔감을 쑤셔 넣고 물을 끓이는 일 또한 내 몫이었다.
정작 엠마는 내가 어깨를 살포시 끌어안자마자 얼굴을 붉혔지만 말이다.
“괘, 괜찮아! 나 그렇게까지 아프지 않아! 봐, 봐봐! 제대로 서 있잖아!”
“그래도 아플 때는 안정이 중요하잖아. 기다려 봐, 따뜻한 차라도 내올 테니까.”
손님인 내가 주인인 엠마를 대접하는 구도가 그려졌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보다 엠마가 더 중요했으니까.
엠마는 결국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면서도, 침대에 걸터앉은 채 내 호들갑을 감내해야 했다.
그렇게 내가 한창 과보호에 열중하고 있던 무렵이었다.
“……여전하구나.”
흐릿하게 내뱉은 그 목소리가, 마치 입김처럼 흩어졌다.
내 시선이 흘깃 등 뒤를 향했다. 마침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을 고민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곳에는 쓴웃음을 머금은 엠마가 자리하고 있었다.
흔들리는 조명, 벽난로의 불 그림자, 그리고 병마로 인한 열기.
아니, 또는 어떠한 감정에 의해 붉어진 낯빛은 다소 몽환적이라는 느낌마저 주었다.
설원의 밤이 부린 마법인가.
엠마가 오늘따라 유독 예뻐 보였다.
원래도 예쁘긴 했지만, 더더욱.
“요즘 바쁘다며? 들었어, 유르디나 사람들이 네 눈치 많이 보더라.”
“별 것도 아닌데, 무슨…….”
나는 코웃음을 치며 그렇게 대답했다.
사실 중대한 사안은 맞았으나, 내 부담감을 엠마와 나누고 싶진 않았다.
결단은 늘 고독해야 한다.
어린 시절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귀족의 의무였다.
엠마에게 징징거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나 이상으로 눈치가 빠른 여인이었다.
“별 것 아닐 리가 없잖아… 천하의 유르디나가 네 일거수일투족에 주목하고 있다니까?”
“내가 좀 눈길을 끌긴 해. 잘 생겨서.”
“응, 그렇긴 해.”
농담으로 한 말에 돌아온 대답이었다.
나는 그것이 농담이리라 생각하면서도, 흠칫 몸을 굳히는 수밖에 없었다.
엠마는 모른 척 제 입술을 톡, 톡, 하고 검지로 두드리고 있을 뿐이었다.
난제를 만난 연금술사의 얼굴이었다.
“나는 말이야, 아직도 얼떨떨해. 어쩌다 이곳에 오긴 했지만,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내 시중을 들어준다는 사실이 낯설어. 그리고 땔감 걱정 없이 피울 수 있는 난로랑, 매일 끼니를 걱정해야 할 필요가 없단 점도.”
나는 입술을 달싹이려다 멈추었다.
이제야 깨달았다.
엠마가 어째서 사용인을 부르지 않았는지.
오히려 사용인이 낯설고 불편했던 탓이었다. 몸도 아픈데 괜히 신경 쓸 일은 만들고 싶진 않았으리라.
그래서 나는 침묵을 지키기로 했다.
얼마 전까지라면 사용인을 억지로 불렀을지도 몰랐다.
그것이 나의 상식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때로는 말없이 경청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대답일 때가 있다.
“그런데 내가 제일 낯선 게 뭔 줄 알아? 바로 너야.”
나는 그 말에 픽, 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방금 전에는 여전하다며?”
“응, 그래서 더 헷갈려. 넌 고작 평민 계집애에 불과한 나한테 이렇게 잘 대해 주는데… 사실은 아니더라고.”
그러면서 구슬픈 호선을 그리는 엠마의 눈꼬리.
여인의 고백은 이어지고 있었다.
“왜 몰랐을까? 나는 이 침실조차 별세계처럼 느껴지는데, 너는 이만한 방 수백 개를 가진 사람도 눈치를 보는 상대잖아.”
“엠마…….”
안타까운 소리를 내뱉어도 엠마는 멈추지 않았다.
어쩌면 이것이 엠마를 줄곧 괴롭혀 오던 난제일지도 몰랐다.
아무리 지우고 싶어도 지울 수 없는, 신분의 한계.
사실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으응, 알아. 넌 대단하잖아. 나랑 달리… 벌써 세상을 몇 번이나 구했고.”
“나 혼자서는 못했겠지.”
“그리고 들었어. 잘은 모르겠지만, 황제 폐하로부터 중요한 임무를 받았다며? 검공께서 친히 찾아와 주시기도 했고… 응, 그래도 잘 됐…….”
내 두 손이 탁, 하고 엠마의 어깨 위로 얹혀졌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깜짝 놀랐는지, 엠마는 숨을 죽이며 내 눈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나는 뒤를 돌아 엠마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엠마의 손을 잡고,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서.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백했다.
“엠마, 난 사실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대단한 사람이 아니야. 지금 직면한 문제도 친구 없이는 아무런 수도 내지 못했을 거야.”
그리고 나는 수치를 무릅쓰고 온갖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재능이 부족해서 잠을 줄여가며 수련을 했던 이야기.
레토 덕에 위기를 넘긴 이야기.
어쩌다 운이 좋아서 실력이 늘었고, 또 그 대가로 겁을 잔뜩 먹고서도 목숨을 던져 싸워야 했던 이야기.
끝내는 최근의 사정까지 털어놓았다.
델핀 선배나 세리아, 그리고 유르디나 가문에 대한 이것저것.
그만큼 내가 엠마를 믿고 있기에 가능한 진술이었다.
하지만 엠마의 반응은 내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이안.”
내가 세리아에 대한 이야기를 끝맺었을 무렵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뚱한 얼굴을 하고 있던 엠마는, 갑작스레 나와의 거리를 좁혔다.
달콤한 숨결이 코끝을 간지럽힌다.
연녹빛 눈동자가 내 눈동자를 비추고 있었다.
“나, 너 좋아해.”
난생 세 번째로 들어보는 고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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