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6화 〉 5.5 막간: 금과 은(11)
* * *
‘사랑’이란 참으로 난감한 화두였다.
누구나 그렇지 않겠는가. 실체 없는 감정은 파고들수록 애매하고 모호한 경계를 드러낼 뿐이었다.
낯뜨거운 이야기다.
성인식을 치른 지 몇 년이 지난 사내가, ‘사랑’에 대해 자문한다는 것은.
하지만 아무리 수치스러워도 나는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설마 지금 엠마가 읊조린 말이 그와 관련이 있는 것인지.
나는 그만 뇌리가 새하얘지고 말았다.
예전에 엘시 선배한테 고백을 들었을 때와 마찬가지였다.
내가 넋을 놓은 사이, 침묵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타닥거리며 타는 벽난로의 장작만이 이 장소에 시간을 부여해 주었다.
엠마는 한참 동안이나 내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묵묵히, 달콤한 숨결을 내뱉으면서.
나는 문득 두 사람의 사이가 지나치게 가깝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대로 살짝 얼굴을 내밀면 어떻게 될까.
엠마의 부드러운 숨결이 코끝을 스칠 때마다, 나는 가슴이 간질거렸다. 입술을 덮어도 비슷한 향이 날지 궁금하기도 했다.
망설인다는 것.
외줄을 타듯 내 마음은 균형을 잃고 휘청였다. 아슬아슬하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칠 찰나, 나는 엠마의 낯이 아직도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이후에 벌어진 일은 뻔했다.
그럼에도 나는 얼어붙은 듯 물러나지 못했다.
머릿속은 갖가지 선택지가 뒤섞여 엉망진창이었다. 나는 이대로 엠마를 덮쳐야 할지, 혹은 그만두어야 할지도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다만 뇌리를 스치는 몇몇 얼굴들이 있었다.
엘시 선배, 성녀, 델핀 선배와 세리아.
이래서는 안 된다.
마침내 그러한 판단을 내렸을 때는, 이미 엠마의 얼굴이 지척까지 다가온 뒤였다.
물러나고 싶어도 물러날 수 없다.
그러한 조짐이라도 보이는 순간, 입술이 닿아버릴 테니까.
그만큼이나 가까운 거리였다.
하아, 하고 엠마가 내뱉은 숨소리가 낯가죽을 적실 만큼.
내가 그렇게 내심 각오를 다졌을 무렵.
“……푸흡.”
맑은 웃음소리가, 난데없이 정적에 잠긴 침실을 울렸다.
그 진원지는 말할 것도 없이 엠마였다.
그녀는 자지러지듯 몸을 되돌리더니, 이내 배를 잡고 웃음을 터트렸다.
눈물이 배어 나올 만큼 즐거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나는 얼떨떨하다 못해 당황스러워서, 살짝 미간을 좁히는 수밖에 없었다.
“아하, 아하하하하! 이안, 너무 진지한 거 아니야?”
“……그럼 코웃음이라도 칠까?”
나는 괜히 서운한 기분이 들어 퉁명스레 답했다.
하지만 엠마는 오히려 그러는 내 말투가 더욱 우스운 듯했다.
깨끗한 웃음소리가 한참이나 이어졌다.
내가 뚱한 낯빛을 하고, 엠마가 제 눈가에 맺힌 이슬을 닦아낼 때까지.
나는 엠마가 조금 진정한 뒤에야 한숨 섞인 물음을 던졌다.
“기분은 좀 나아졌어?”
“응, 덕분에.”
엠마는 속이 후련하다는 듯 만면에 웃음을 띄웠다.
솔직히 말해 기대를 배신당한 느낌이라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곧 엠마의 행복한 미소를 보자마자 화가 풀리고 말았다.
언젠가 엠마가 이렇게 말했던 기억이 났다.
‘바보, 멍청이, 호구. 그러다 나 같은 평민 계집애한테 이용만 당하는 거야.’
이름을 지닌 마수를 바쳐 엠마를 구했던 날,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던 내게 했던 말이었다.
그때는 웃어 넘기고 말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되짚어 보니 아예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었다.
어째 그 알맹이 없는 경고가 점차 실현돼 간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엠마에게 유독 물렀다.
물론, 엠마가 행복하다면 아무래도 좋았지만.
결국 나는 쓴웃음을 깨물었다.
“그래도 너무하지 않아? 내 순정을 거짓말로 갖고 놀다니.”
“응?”
무슨 소리냐는 듯 엠마가 순진한 눈망울을 깜박였다.
나는 한숨 섞인 목소리를 내뱉는 수밖에 없었다.
“엠마, 아무리 우리가 친하다고 해도 말이야. 고백은 진심으로…….”
“거짓말 안 했는데?”
웃기지 말라고, 농담처럼 한 마디를 내뱉으려던 그때.
나는 그만 엠마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리고 알았다.
엠마는 한없이 진지히다는 사실을.
다시금 내 미간이 좁혀졌다.
“나, 진짜로 너 좋아해.”
“그런데 방금 전에는…….”
“응, 진지해지지 말라고.”
그 어느 때보다도 진중한 어조였다.
나는 직감적으로 눈을 꾹 다물었다. 그래야만 할 것만 같았다.
저 구슬픈 미소를 마주한다면, 누구나 그랬으리라.
“예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이제야 실감했어. 너랑 나는 어울리지 않아.”
나는 일부러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물끄러미 엠마를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이를 어떤 신호로 받아들였을까.
엠마는 배시시 웃으며 덧붙였다.
“그야 그렇잖아? 너는 귀족에, 이제 황제 폐하의 신임까지 받는 제국의 신성이야. 그런데 나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지, 평민에, 가난해서 너한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해.”
“엠마, 넌 이미 내 목숨을 몇 번이나 구했어.”
“고마워, 이안. 그렇게 말해줘서… 그런데 그 정도는 내가 아닌 누가 해도 상관없는 일이었어.”
나는 후우, 하고 짙은 날숨을 내뱉었다.
이러한 대화도 몇 번째인지, 이제는 꽤 답답했다.
그러는 내 마음도 모르고 엠마는 자꾸만 자학을 반복했다.
“으응, 내가 아닌 누구라도… 연금학부의 아무 평민 계집애한테 1만 골드를 던져주면 누구라도 해내지 않았을까?”
“엠마.”
“그래도 다행이야, 내가 주제 파악은 잘하거든. 이제부터 노력하면, 네 첩이라도 될 수 있을까? 아하하… 앞으로 열심히 해야겠…….”
나는 결국 더는 참지 않기로 했다.
엠마의 심정은 이해가 갔다.
열등감은 심장을 갉아먹는 괴물과 같았다. 혼자서 대적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나 또한 그런 적이 있었다.
내가 하급 귀족이라서, 재능이 뛰어나지 못해서.
어쩌다 운이 좋아 지금은 그보다 강해지기는 했다.
하지만 정작 이것이 내게 어울리는 역할인지는 알 수 없었다.
세상을 구하는 영웅이라니.
철 지난 동화 속의 주인공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내가 엠마에게 더욱 조심스러웠는지도 몰랐다.
그 자기비하는 나와 닮은 면이 있었으니까.
무섭고 괴로우니까 끝없이 스스로를 깎아내리지만, 또 한편으로는 누군가가 아니라고 말해 주기를 바란다.
그저 그 대상이 나였을 뿐이다.
“그만 좀 징징대자.”
한숨에 젖은 내 한 마디에, 엠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곧 시선을 떨구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처량한 눈빛으로.
“그, 그렇지? 미안, 괜히 내가… 읍?!”
중얼거리는 여인의 입술을, 겹치듯이 덮친다.
애매한 감촉이었다.
델핀 선배와 나누었던 키스는 보다 열렬했다. 혀와 혀를 얽는 쾌감에 비하자면, 단지 점막과 점막이 맞닿았을 뿐인 행위에서 별다른 의미를 찾아내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더욱 신기했다.
엠마의 입술은 예상하던 대로의 맛이 났다.
보드랍고 촉촉하고, 그리고 달콤한 숨결이 느껴졌다.
엠마는 그 어느 때보다도 깜짝 놀란 듯 보였다.
동그랗게 뜨인 눈동자에서는 경악의 감정이 엿보이고 있었다. 마치 금기를 범한 죄인처럼 당장이라도 입술을 뗄 태세였다.
물론 미약한 반항에 불과했다.
내가 손으로 살짝 턱을 쥔 것만으로, 엠마의 모든 저항은 무너져 내렸다.
그로부터 몇 초.
입술이 떨어지자, 그동안 막혀 있던 숨통이 트였다.
푸하, 하고 귀여운 숨소리를 내는 엠마의 얼굴은 달아오른 지 오래였다.
나는 우물쭈물하며 내 눈치를 살피는 엠마에게 물었다.
“이제 그만할 거지?”
목적어조차 생략된 질문이었다.
무엇을, 이라고 되물을 만도 한데도 엠마는 아무런 반문이 없었다.
단지 살짝 고개를 돌려 내 시선을 피했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 내뱉어진 목소리에는, 희미한 물기가 섞여 있었다.
“이, 이안…….”
가만 두면 울음이라도 터트릴 기세였다.
나는 조용히 엠마의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나, 진짜로 첩으로도 괜찮을 것 같아.”
벌써 너무나 행복해서.
그 고백을 들으면서, 나는 속으로 쓴웃음을 머금었다.
문득 내 뇌리를 때리는 의문은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나, 이래도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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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제정신을 차린 것은 그 다음날이었다.
“……미쳤나?”
전날 밤에는 분위기를 타서 몰랐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나는 대형사고를 저지른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장 나와 얽혀 있는 여인만 해도 몇인가.
엘시 선배와 성녀, 델핀 선배와 세리아까지.
지금도 감당이 불가능한 수준인데, 난 어제 엠마와 입을 맞추었다.
몇 갈래로 찢겨 죽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중죄였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내가 황녀에게 맡긴 문제가 잘 해결되었다는 점이었다.
내가 오늘 델핀 선배를 마주할 수 있었던 까닭도 그 덕이었다.
언제나와 같이 깊은 밤, 델핀 선배는 재미있다는 듯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재미있는데? 결국 유르디나가 엘프를 제국의 신민으로 만드는 과정을 책임지라는 소리잖아.”
“유르디나 가문에도 나쁜 소리는 아닙니다.”
나는 혹여 델핀 선배의 마음이 상할까 얼른 덧붙였다.
사실 델핀 선배의 두뇌는 나보다 뛰어난 편이었다. 애초에 어린 시절부터 후계자 수업을 받아온 여인이 아니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굳이 설명을 곁들인 이유는, 아마 델핀 선배에게 티를 내고 싶어서일지도 몰랐다.
내가 이만큼 고생했다는 생색.
남자란 여자 앞에서 이토록 유치한 생물이었다.
나는 비로소 레토에게 들었던 계책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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