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7화 〉 5.5 막간: 금과 은(12)
* * *
“유르디나 가문은 이미 엘프를 보호한 전적이 있으니까요. 또 그 엘프 중 하나는 지난 전투에서 커다란 공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그래, 무려 제 목숨을 희생해 가며 말이지.”
쪼르륵, 하고 제 앞에 놓인 잔에 포도주를 따르며 던진 말이었다.
나는 그 담백한 사실에 다소 목이 매었다.
그 ‘엘프’란 바로 포프 영감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이내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의 죽음이 결국 미래로 이어지는 길을 놓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황실은 엘프를 제국에 포섭시키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과 엘프의 해묵은 은원부터 처리해야 할 텐데, 아무래도 그 상징이 될 만한 존재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인류를 위해 희생한 엘프라…….”
델핀 선배는 눈을 감고 검지로 탁자를 두드렸다.
톡, 톡, 하고 소리가 이어진 뒤에야 다시금 여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쁘지 않아… 아니, 상상 이상으로 괜찮겠어.”
“그 엘프를 보호하고 있던 가문이 유르디나 가문입니다.”
“하지만 황실이 그 정도로 끝을 낼 리는 없는데.”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엘프를 북부에 정착시키는 작업은, 황실뿐만 아니라 유르디나 가문의 이익에도 직결되는 문제였다.
누가 뭐래도 북부는 유르디나의 관할이었기 때문이었다.
암흑교단과 결탁한 가문에 내릴 처분치고는 지나치게 관대했다.
아무리 후계자가 제 손으로 배신자를 체포했다는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말이다.
최소한 황실은 체면치레에 불과하더라도 처벌을 원한다.
내게 이 계획을 전달한 레토 또한 잘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엘프의 정착 과정을 전적으로 지원해 주시면 됩니다.”
“아아, 그래… 그러는 수도 있었지.”
나름 묘수였지만, 델핀 선배의 반응은 다소 빈약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유르디나 가문의 사정은,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난데없이 가주가 배신자로 낙인 찍혔다.
살점덩어리 괴물과의 일전을 준비하느라 군대의 소모가 극심했고, 군량을 비롯해 수많은 자원이 날아갔다. 갑작스러운 권력 이양에 대응할 만한 시간조차 없었던 차였다.
그런데 엘프의 정착을 책임지고 지원하라?
“결국 민생 안정은 황실의 손을 빌릴 수밖에 없겠네. 그러니 제국 황실은 유르디나에 목줄을 채워서 좋고, 엘프 정착까지 잘 풀리면 그보다 좋을 수는 없지. 신민도 늘고, 미개척지도 줄일 수 있어, 심지어 암흑교단과의 일전을 대비한 전력까지 확충할 수 있잖아.”
“그리고 아직 원한이 깊은 엘프를 제어하려면 유르디나 가문의 사병도 재정비해야겠죠. 물론, 엘프를 통제하기 위한 병력이니 정작 움직일 수는 없겠지만.”
“유사시에는 활용이 가능하지. 예를 들어, 제국의 미래를 앞둔 전쟁이라든가?”
델핀 선배는 흐, 하고 헛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짜증이 날 만큼 깔끔하네.”
“그나마 제국 황실이 이 문제를 표면화하고 싶지 않았기에 나온 결과입니다. 만일 암흑교단과 결탁했다는 사실을 발표하기라도 했다면…….”
“알고 있어.”
더 말할 필요 없다는 듯, 델핀 선배는 손을 들어 내 말을 제지했다.
어차피 그 가설의 끝은 뻔하긴 했다.
멸문지화.
최소한 그에 준하는 재앙이 유르디나 가문에 닥쳤을 터였다.
물론 지금도 성국을 비롯한 각종 협의체와 대화를 나누는 과정이 남아 있었지만, 그 정도는 제국 황실에서 나서면 어떻게든 무마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즉, 고비는 넘겼다.
제국 황실은 충견을 살리고 실리를 얻었으니 좋았다.
그리고 유르디나 가문은 최악의 상황을 피했으니 다행이었다.
델핀 선배의 동의를 얻은 내 입에서 기나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이제야 끝이다.
그 사실을 확인해 주듯, 델핀 선배는 슬그머니 술잔을 들고 몸을 일으켰다.
사뿐사뿐 내딛는 걸음걸이조차 고혹적이기 그지없었다.
단숨에 일변한 분위기, 나도 이제 델핀 선배의 의중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 또 이 흐름이구나.
델핀 선배는 머리를 슬쩍 내 가슴팍에 기대며 말했다.
“고생 많았어, 서방님. 그래도 꽤 괜찮은 책사를 두고 있나 봐?”
“네, 뭐. 그렇죠.”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사실 델핀 선배가 다가오니 떠오르는 기억들이 많았다.
예를 들어 세리아라든가, 엠마라든가.
그러한 내 속도 모르고 델핀 선배는 애정이 가득 담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목덜미를 파고드는 숨결이 뜨겁다.
그저 술기운 탓만은 아니리라.
“잘했어, 결국 수하를 잘 다루는 것도 지도자의 능력이거든… 내가 서방님한테 큰 은혜를 입었네? 어떡하지, 이 빚을 어떻게 갚으면 좋을까.”
이미 결론이 정해진 물음 같은데.
그러나 나는 일부러 그러한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다만 애써 태연을 가장하며 델핀 선배에게 화두를 던졌을 뿐이었다.
“저, 그런데 문제가 그뿐만이 아니거든요.”
“……?”
그리고 이야기는 이어진다.
세리아의 폭주, 그리고 엠마와 있었던 일까지 전해들은 델핀 선배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종래에는 한숨을 푹 내쉬며 멋대로 자리에 앉았을 정도였다.
그러더니 뚱한 표정으로 술잔을 가득 채우고, 비우기를 두어 차례.
나는 절로 식은땀이 나는 것을 느꼈다.
누가 봐도 델핀 선배의 기분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짜증이 났다는 티가 팍팍 날 정도였다.
내가 델핀 선배의 그 황당한 해결책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원인이기도 했다.
세리아와 하룻밤 자 보라니?
그게 말한다고 될 만큼 간단한 일이란 말인가.
나는 조심스레 델핀 선배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저, 델핀 선배?”
“왜.”
부루퉁한 목소리였다.
나는 늘 당당하고 도도하던 델핀 선배가 이러한 음색을 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삐진 여인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무심코 나는 옅은 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혹시 기분 나쁘십니까?”
당연한 것을 넘어 무례하다고까지 느껴질 수 있는 질문이었다.
이미 육체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은 사내였다.
그랬던 정인이 또 다른 여자들과 만나고 다닌다면, 당연히 기분이 좋지 않겠지.
하지만 델핀 선배는 여러모로 내 예상을 뛰어넘는 여인이었다.
“내가? 기분이 나쁘다고? 흐음… 왜?”
진심으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어투였다.
그러면서도 숨길 수 없는 짜증이 배어나오는 눈빛에, 나는 일부러 눈치 없는 대답을 내놓았다.
“질투하시는 것 아닙니까?”
“내가, 질투? 다른 사람들을? 푸흡, 그럴 리가…….”
처음에 델핀 선배는 내 지적을 그렇게 웃어넘기려 했다.
하지만 문득 걸리는 점이 있었는지, 이내 델핀 선배의 웃음소리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여인의 낯빛이 굳어버릴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델핀 선배는 결국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항복의 표시였다.
“질투, 질투… 그래, 그랬나 보네.”
허탈함마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설마 제 자신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는 듯, 델핀 선배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미쳤나 봐.”
물론 터무니없는 한탄이었다.
굳이 미친 쪽을 따지자면, 델핀 선배처럼 매력적인 여인을 두고 외유를 하는 내가 아닐까.
나는 최대한 따스한 어조로 델핀 선배를 위로해 보기로 했다.
“아니, 델핀 선배의 잘못이 아니잖아요. 제 잘못이니, 델핀 선배가 만일 불편하시다면…….”
“안 돼.”
나는 그 단호한 거절에 일단 입을 다물었다.
델핀 선배는 포도주로 목을 축이면서,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난 어차피 한동안 결혼도 못해. 그리고 당신은 이미 주변에 앞날이 창창한 여자들이 널려 있고… 굳이 나한테 얽매여 있을 이유는 없어. 난 당신 앞길 막기 싫어.”
“델핀 선배, 아무리 그래도…….”
“내 말대로 해.”
그렇게 말하면서, 델핀 선배는 불쑥 몸을 일으켰다.
여인이 내 지척까지 다가올 때까지는 찰나의 시간만이 필요했다.
그리고 애원하듯 이어지는 목소리.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당신, 아니 서방님은 내가 독점할 수 없는 남자라고… 알면서도 그랬던 거야. 또 세리아도 불쌍한 아이거든. 그러니까, 나는 너무 신경 쓰지 마.”
이에 대해서 무어라 말해야 할까.
내가 답답한 마음에 한숨부터 내쉬자, 델핀 선배의 두 손이 조용히 내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진심을 담은 눈빛으로, 또 한 번.
“이게 내 사랑이야.”
결국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델핀 선배와 입술을 겹쳤다.
그 이후에는 한동안 서로의 온기만을 느낄 뿐이었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단지 이러고만 있어도 좋았다.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을 나른한 충족감이 내 가슴을 가득 채웠다.
안온한 시간은 그렇게 계속해서 이어졌다.
델핀 선배가 흐릿한 웃음을 터트릴 때까지.
“꼴이 재미있게 됐네… 유르디나 자매가 한 남자를 섬기고, 평민도 하나가 더 있다고? 몇 달 전의 내게 말했다면 죽음을 면치 못했을 거야.”
마치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들었다는 태도였다.
그래서 나는 델핀 선배에게 차마 이야기를 꺼내기가 힘들었다.
아직 여인들이 더 남아있다고.
물론 언제까지고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한참을 망설이고 있자, 델핀 선배의 의아한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리고 나는 결국 눈을 질끈 감은 채 모든 관계를 실토해야 했다.
엘시 선배나 성녀의 이야기까지.
델핀 선배의 눈빛이 다시금 온기를 잃어갔다.
나는 무릎이라도 꿇고 싶은 마음을 참아내며, 더듬더듬 되물었다.
“저, 그… 괜찮겠습니까?”
“괜찮냐고? 아아, 괜찮다마다. 아예 날마다 침실을 바꿔가며 자지 그래? 아니, 그것도 귀찮으면 두 여자랑 한꺼번에 자든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있을 턱이 없었다.
내가 입을 꾹 다문 채 묵언수행을 시작하자, 델핀 선배는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래도 정리를 해야겠지.
그렇게 결심을 하고, 입을 열려던 찰나.
내 입술을 덮치듯 델핀 선배가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혀가 얽혀 들고, 그 틈새로 흘러 들어오는 달콤한 술 냄새.
침과 함께 술을 교환한 나는 깜짝 놀라 델핀 선배를 바라보았다.
그래, 너무나 고혹적인 미소를 짓고 있는 여인을.
“대신, 그때마다 나한테 보고해… 누구와 보낸 밤이 가장 기분 좋았는지.”
이 또한 대답이 정해져 있는 물음이 아니냐고.
나는 반문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이제 남은 것은 증명뿐이었다.
나와 델핀 선배의 몸이 다시금 침대 위에서 포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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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나는 하품을 내쉬며 유르디나 성의 복도를 걷고 있었다.
이제 급히 처리해야 할 문제는 대부분 해결했다.
남은 것은 이제 자잘한 뒤처리밖에 없었다. 그 외에는 엘시 선배를 보러 가거나, 성녀에게 바가지를 긁히거나, 아비앙의 안부를 물으러 가는 정도의 잡무뿐.
이처럼 평온한 내 일상에 균열을 일으킨 것은 어느 소녀의 방문이었다.
마침 아비앙과 단 둘이 걸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던 참이었다.
“……오빠!”
저 멀리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온다고 인지했을 찰나.
나는 강렬한 충격을 받고 땅 위로 널브러져야 했다. 포탄처럼 달려든 소녀는 마치 정복자처럼 내 위에 올라탄 채 울상을 짓고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에 금빛 눈동자.
어느 가문의 상징이었다.
“어, 어떡해… 그동안 고생 많이 했지?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나는 쿨럭, 하고 메마른 기침을 토하며 반박하고 싶었다.
내가 지금 몸을 가누지 못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고.
하지만 그보다도 먼저 소녀가 반응했다.
내가 아니라, 내 옆에 있던 아비앙을 향해.
“뭐야, 이 더러운 엘프는……?! 야, 너 우리 오빠랑 무슨 사이야!”
그 모습을 보며, 나는 결국 포기했다는 듯 목에 힘을 풀었다.
초면인데도 존댓말조차 쓰지 않는다. 심지어 무례하기까지.
이는 소녀가 무척이나 흥분했다는 증거였다. 그러니 어차피 말해봐야 들어먹지도 않을 터였다.
다만 내 여동생의 방문은 또 다른 사실을 알려 주었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아카데미로.
북부에서의 일상이 끝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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