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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408화 (408/649)

〈 408화 〉 5.5 막간: 금과 은(13)

* * *

전란이 지나간 뒤에도 북부는 소란스러웠다.

우선 살점 덩어리 괴물이 덮었던 대지가 반파되었다는 점이 컸다. 그 넓은 침엽수림의 절반 이상이 날아갔으니,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던 사람들은 곤혹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침엽수림은 북부 생명의 보고였다.

비단 땔감뿐만이 아니라, 희귀한 이끼나 약초 또한 자생하는 장소였다. 이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마수나 엘프와 같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마수의 존재는 마수 사냥꾼들의 이목을 끌기도 했다. 어느 마을은 마수 사냥꾼들이 머무르는 전초기지와 같은 역할을 수행할 정도였다.

이처럼 침엽수림은 북부 산업의 근간 중 하나였다.

그러한 곳이 처참히 파괴당하고 말았다.

심지어 그곳에 살아가던 엘프들 또한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는 상태였다. 그들을 숨겨줄 나무들이 사라진 이상, 그들 또한 어떠한 식으로든 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잠재적 위협들은 민중의 긴장과 경직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유르디나 가문의 강력한 지도력 아래 어떻게든 뭉치고는 있지만, 북부의 민심은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내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니었다.

오히려 말하자면, 북부의 민심은 흉흉할수록 좋았다. 그래야 제국 황실이 개입할 여지가 커질 테니까.

나는 델핀 선배의 지도력을 믿었다.

그녀가 적당한 선에서 제국 황실의 권위를 세워 주면서, 북부의 무너진 산업을 재건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정작 내 고민거리는 따로 있었다.

“아비앙, 이곳에 남겠다고?”

“네, 그러려고요.”

예상했던 대로의 답변이었다.

아비앙이 아카데미 주변에서 지내고 있던 까닭은 임무 때문이었다. 인간 사회의 동향을 정탐하는 간자로서의 역할 말이다.

그 쓰임이 다했으니, 이제 돌아가는 것이 당연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무의미해졌다는 표현이 더 알맞았다.

인류와 엘프의 전쟁은 끝났다.

누가 승자라고 할 것도 없었다.

엘프를 차가운 북부까지 몰아낸 결과, 북부에 살던 인류는 삶의 터전을 잃었다.

그리고 엘프에 이르러서는 그 피해를 가늠할 필요조차 없었다.

이러한 마당에 굳이 간자로 활동해야 할 이유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비앙은 도리어 또 다른 역할을 짊어져야 할 터였다.

“아직 엘프들은 인간 사회를 잘 모르잖아요. 적응하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할 거예요. 하지만 전 인간 사회에서 오랜 시간을 지내 봤으니까…….”

“또 네가 엘프 중에서는 가장 덜 적대적이기도 하고.”

내 말에 아비앙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이내 쓴웃음을 머금었다.

나 또한 아비앙과 마찬가지로 미소를 짓고 말았다.

우리 둘의 첫만남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인류를 열등하다고 부르던 꼬맹이가, 이렇게 인간과 엘프 사이를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담당하게 되다니.

단 몇 달만에 이루어진 변화였다.

믿기 힘든 소리였지만, 그 증거가 지금 내 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네, 그렇죠.”

더는 인류가 밉지 않다는, 혹은 앞으로는 미워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그 한 마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나는 아비앙을 구하기 위해 뛰어다녔던 지난날이 아깝지 않다고 느꼈다.

문득 어디선가 불만스레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애써 무시했다.

훈훈한 분위기였다.

대화의 주제는 자연스레 서로의 안부로 이어졌다.

“그러고 보니 여동생은 괜찮아?”

“다행스럽게도 천신교의 도움을 받고 있어요. 특히 성녀님의 도움이 컸는데… 그, 이안 님께서 소개해 주셨다고.”

“나보다는 성녀님한테 감사해야지.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서 베티를 봐주겠다고 했거든.”

우물쭈물하며 내 눈치를 살피는 아비앙에게, 나는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다름 아닌 우리 사이잖아? 네 여동생이면 내 여동생이나 다름없으니…….”

“누가 여동생이야!”

더는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파열음이 터져 나온 것은 그때였다.

나는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내 팔에 매달린 채 으르렁거리는 소녀가 하나 자리하고 있었다.

내 여동생, 리아 페르쿠스.

불과 몇 분 전에 날 찾아온 인물이었다.

나로서는 오랜만에 단 둘이 아비앙과 만나는 자리라 축객령을 내리고 싶었지만, 이미 리아는 흥분 상태였다.

다시 말해 언어로는 제어가 불가능하다는 뜻이었다.

무력을 동원한다면 되겠지만, 글쎄.

지난 시체 거인의 습격 이후 각성한 리아의 신체능력은 만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나조차도 넋을 놓고 있으면 아차, 하는 사이 당할 정도였다.

리아를 본격적으로 제압하기 위해서는 마력을 써야 한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귀여운 여동생에게 어찌 그렇게까지 힘을 쓸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결국 여동생의 어리광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 오빠의 여동생은 나 하나뿐이야! 어떻게 저 엘프가 어떻게 여동생이 될 수 있어?!”

“그래, 그래.”

나는 알겠다는 뜻으로 리아의 머리를 톡톡 두들겼다.

그럼에도 리아의 흥분은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다. 머리까지 꾹 누르고 나서야, 더욱 분기탱천해서 소리를 지르려던 리아를 가까스로 만류할 수 있었다.

이 한 편의 희극과도 같은 상황에 아비앙은 어색한 미소를 머금어야 했다.

“저, 그… 여동생 분이시죠?”

“그래!”

리아는 다시금 불쑥 튀어 오르며 그렇게 대답했다.

만일 그녀에게 꼬리가 있었다면, 이미 빳빳이 하늘을 향하고 있었으리라.

그만큼이나 경계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하여간 독점욕이 심한 여동생이었다.

“너, 우리 오빠랑 함께 다녔다던 그 엘프구나? 너희 때문에 우리 오빠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다 들었어… 내가 그 소리 듣고 얼마나 암담했는지 알아?!”

“리아, 제발…….”

나는 자포자기해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물론 그런다고 멈춰 설 리아가 아니었다.

“내가 우리 오빠 얼굴 봐서 참겠지만, 다음에도 또 우리 오빠한테 민폐 끼친다는 소리 들리기만 해봐? 내가 가진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파멸을……!”

“저, 백 년 넘게 살았어요.”

느닷없는 고백이었다.

리아는 아비앙의 그 한 마디에 멈칫하는 수밖에 없었다.

고작해야 1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소녀가 백 살이 넘었다니, 이해하기 힘들겠지.

지식으로는 알고 있을 터였다.

엘프는 무려 500년 이상을 살아가는 종족이다. 인간과 나이 감각이 일치할 리는 없었다.

하지만 이를 본인에게 직접 듣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개념적으로 알고 있던 ‘100년’이라는 세월이 실체가 되어 나타난 것이다.

그렇게 리아가 조용해진 사이, 아비앙은 생긋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제가 여동생이 되겠어요? 그리고 또, 인간은 연장자와 굉장히 친근한 관계를 맺고 있나 보네요. 초면부터 반말을 하시고.”

“아니, 그… 뭐…….”

리아의 황금빛 눈동자에 번민이 감돌기 시작했다.

상대는 100년 넘게 살아온 존재였다. 당연히 연장자이긴 하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엘프의 기준이 아닌가.

인간 기준으로 생각하면 아비앙은 아직 애송이였다.

일평생의 반의 반도 살아오지 못한 셈이었으니까.

하지만 또 무작정 그렇게 따지기에는 10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치게 길었다.

리아의 조부모님조차 그 정도 연배는 되지 않을 테니까.

혼란스러운 마음은 주저함을 낳는다.

잔뜩 흥분한 상태였던 리아의 눈이 팽팽 돌기 시작했다. 명민한 리아치고는 드문 반응이었다.

나는 이쯤에서 중재를 해볼까 싶었으나, 이내 그만두었다.

당황하는 리아가 귀엽기도 했고, 그 어린애 같던 아비앙의 성장이 기껍기도 했다.

지난 몇 주간의 시간이 아비앙을 진정한 어른으로 발돋움하게 한 것이다.

예전이었다면 우선 머리채부터 붙잡고 보았을 텐데.

무척 감동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저 혼자만을 위해 남는 건 아니에요. 이안 님한테 입은 은혜를 모를 만큼 바보는 아니니까요. 아마도 침엽수림의 엘프들은 많은 정보를 숨기고 있으리라 짐작됩니다.”

“정보?”

“레오릭과 그 일당들이 암흑교단과 협력하면서 얻은 정보 말이죠.”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흐음, 하고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레오릭은 죽으면서 내게 경고를 남겼다.

아인델 총주교.

내 기억으로는 성국의 인물이었다.

자세한 사정은 성녀에게 들어봐야겠으나, 제국의 5대 귀족 가문에도 손을 뻗친 조직이 성국을 그대로 두었을 리는 없었다.

무언가 끈이 존재하겠지.

어쩐지 나는 그 이름을 오래 듣게 될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내가 엘프의 첩보요원의 덕을 보게 될 줄은 몰랐는걸.”

“이미 잔뜩 부려먹어 놓고선…….”

아비앙은 지난 고생이 떠올랐는지 그렇게 툴툴거렸다.

물론 진심으로 불평을 쏟아내는 것은 아니었다.

나와의 추억을 회고하고자 하는 몸부림이라 봐야겠지.

나는 기꺼이 그에 어울려 주기로 했다.

“대신 너도 나 많이 부려먹었잖아. 설표도 사냥하고, 목재도 나르고…….”

“그건 자발적인 노동이었잖아요.”

뼈가 있는 말이었다.

한때 아비앙의 어금니 두어 개를 털어버렸던 장본인이 할 말이 있을 턱이 없었다.

“……좋아, 그건 그렇게 치자고.”

그렇게 나와 아비앙 사이에서는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이를 얌전히 두고 보고 있을 리아가 아니었다.

그녀는 두 손을 꽉 쥔 채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무척이나 분하다는 기색이었다.

다만 나는 이 시점에서 무언가 이상을 느꼈다.

리아가 아무리 흥분하더라도, 이만큼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는 인물은 아니었다.

고작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상단을 이끌 재목도 되지 못했겠지.

그런데 오늘따라 왜 이러는 걸까.

나도 다소 의아한 심정을 품었을 찰나.

“아무튼, 이야기는 끝이야. 오빠, 얼른 아카데미로 돌아가자.”

리아가 막무가내로 나오자 아비앙도 슬슬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 또한 나와 오붓이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방해받았으니, 기분이 좋지는 않겠지.

그럼에도 아비앙은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한 듯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후에 조곤조곤 이어지는 목소리.

“저, 여동생분? 죄송하지만 이안 님과 따로 중요한 이야기를 나눠야 해서…….”

“어르신은 빠져요.”

이제는 아비앙이 격침될 차례였다.

‘어르신’이라는 그 세 음절에 아비앙은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자업자득이었다.

그러나 말이 험한 감이 있어서, 나는 리아를 점잖게 타이르려 했다.

그 전에 리아가 본론을 던지지 않았다면.

“셀린 언니가 실종됐어.”

나는 흐음, 하고 묘한 소리를 내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내 뇌리가 리아의 전언을 한 글자, 한 글자 곱씹으며 청해하기를 몇 초.

그 함의를 깨달은 내 몸이 곧장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그걸 왜 지금 말해?!”

리아가 느닷없이 북부로 찾아온 이유.

그것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새로운 사건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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