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0화 〉 5.5 막간: 금과 은(15)
* * *
오랜만에 돌아온 아카데미는 여전했다.
젊음이 넘치는 거리와 땀을 흘리는 재학생들, 그리고 곳곳에 자리한 웅장한 건물과 낯익은 가게들이 낯익은 풍광을 그렸다.
내게는 또 하나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장소였다.
난생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 생활한 곳이 아니었던가.
자고로 ‘모교’란 낱말은 단 두 음절로 표현할 수 없는 특별한 울림을 지니곤 했다.
그러나 내겐 모교의 반가운 공기를 만끽할 여유조차 남아있지 못했다.
당장 해야 할 일이 있었던 탓이었다.
나는 곧장 내 절친한 친구가 상주하고 있을 건물로 향했다.
아카데미의 대도서관.
제국과 성국, 남부 열왕국의 모든 지식이 모여 있다는 장소였다.
다소 과장이 섞인 평가였으나, 그만큼 대도서관에 보관된 장서의 수는 어마어마했다.
듣기로는 추산된 양만 무려 수백만 권에 이른다고 했던가.
아마 숫자로 파악되지 않는 책도 수만 권은 존재할 터였다.
수백 년의 세월 동안 온 대륙에서 지식을 긁어모은 성과였다.
그리고 이처럼 지식이 모인 장소에는 진리릍 탐구하는 이들이 모이기 마련.
대도서관은 늘 학자들로 붐볐고, 마도의 길을 걷고 있는 내 친구도 그 예외는 되지 못했다.
레토 아인스턴, 내가 가장 신뢰하는 참모이자 친구.
내가 그를 발견할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가 흔치 않은 미남자였기 때문이었다.
책과 인간의 바다 속에서도 레토의 외모는 빛이 났다.
나는 그를 질질 끌다시피 해서 도서관을 나섰다. 레토는 깜짝 놀라 무어라 저항을 하려고 했지만, 일개 마법사에 불과한 그가 내 완력을 이겨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애초에 그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나와 단 둘이 대담을 나누는 것.
결국 레토는 불만이 가득한 눈빛을 한 채 내 앞에 앉아야 했다.
미안하지는 않았다. 그의 눈치를 살필 겨를도 없었으니까.
나는 다짜고짜 본론부터 꺼내 들었다.
“레토, 들었어? 셀린이 실종됐다는 소식.”
“듣긴 들었지.”
나를 대하는 레토의 태도는 시큰둥하기 그지없었다.
바빠 죽겠는데 왜 나까지 상대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최소한 나를 반기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책상을 탕탕 두드리며 재차 내 주장을 피력했다.
“아니, 레토… 셀린이 사라졌다니까? 왜 그렇게 태평해?!”
“리아가 말했냐?”
그렇게 되묻는 레토의 눈빛은 무신경하기만 했다.
툭, 하고 내던지듯 뱉은 반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레토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답을 하지는 못했다.
무언가 이상하다.
돌이켜 보면, 왜 리아가 나를 찾아왔는지조차 의문이었다. 본래라면 레토가 가장 먼저 내게 연락을 취해야 정상이었다.
레토는 셀린을 친여동생처럼 아낀다.
다시 말해, 셀린의 신상에 이상이 발생했을 때 가장 먼저 눈이 돌아갈 사람도 레토라는 뜻이었다. 최소한 지금처럼 평정을 유지하고 있을 리는 없었다.
내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입을 다물자, 레토는 혀를 쯧쯧 찼다.
“이안, 너 요즘 셀린한테 너무 무관심하지 않냐?”
“……내가?”
나는 그렇게 답하면서도 침음을 삼키며 고민에 잠겼다.
요즘 내가 셀린을 신경 쓴 적이 있었던가?
숙고조차 필요 없는 문제였다.
나는 이내 어색한 미소를 깨물어야 했다.
“그랬던가?”
“그랬던가? 가 아니지… 미쳤냐? 너 요즘 셀린 찾은 적도 없잖아!”
레토의 지적에 나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 말대로였다.
최근 몇 달 동안 내가 셀린을 찾은 적은 없었다.
반대로 셀린이 나를 찾아오면 몰라.
그동안은 자각조차 하지 못했던 지점이었다. 너무나 오랜 세월 절친한 사이였기에, 나는 셀린과 레토가 내 곁에 있다는 사실이 당연하게만 느껴졌다.
셀린과 레토의 존재는 내게 공기와 같았으니까.
내 삶에 반드시 필요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언제든 곁에 있어 주는 이들.
나는 그 호의에 어리광을 부리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셀린과 레토 또한 저마다의 삶이 있을 텐데도.
내가 회개의 시간을 가지는 동안, 레토는 기나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의 눈빛이 깊이 가라앉았다. 과거를 되짚는 그 눈동자에서는 옅은 망설임마저 보이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고민이 되는 모양이었다.
“요즘 힘드냐?”
고민 끝에 레토가 내뱉은 말은 그랬다.
요즘 힘드냐는, 상투적인 안부 인사에 불과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그 목소리의 저변에는 진한 피로가 묻어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일순 멈칫했으나, 결국 내 고개는 두어 번 남짓 꺾였다.
어차피 고민해봐야 기가 막힌 대사가 떠오를 리는 없었다.
레토 앞에서는 본심을 숨기지 않는 편이 최선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힘들지… 지난 몇 달 동안 편하게 쉰 적이 손에 꼽잖아. 숨 좀 돌릴라 치면 또 사건이 터지고…….”
“널 따라다니는 애들도 힘들어.”
레토는 묵직한 목소리로 단언했다.
그 내용 또한 지극히 상식적이었다.
“특히 누군가에게는 더 힘들지. 넌 힘들어도 어떻게든 나아가겠지만, 재능이 부족한 사람은 성장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어. 온힘을 다해도 따라갈 수 없는 격차가 존재한다고.”
“셀린이 그렇다는 거야?”
“셀린도 지난 몇 달 동안 많은 고민을 했어.”
찻집에 주문한 음료가 나온 것은 그 무렵이었다.
젊은 여성으로 보이는 점원은 음료를 내려놓으며 나를 흘깃 바라보았다. 마치 희소한 구경거리라도 발견한 얼굴이었다.
아니, 사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를 둘러싼 이들은 하나같이 내게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속닥이는 소리 중에도 나를 주제로 삼은 대화가 꽤나 많았다.
이것이 지난 몇 달 간 달라진 나의 위상을 단적으로 드러내 주었다.
시골 자작가의 차남 이안 페르쿠스는 이제 없다.
제국의 신성이자 인류의 떠오르는 영웅인 이안 페르쿠스만이 남았을 뿐.
이를 위해 수많은 피를 흘려왔으나, 누구나 따라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나는 그저 운이 좋았을 따름이었다.
반대로 말하자면, 누군가는 운이 없었을지도 모르고.
나는 말없이 눈앞에 놓인 음료를 홀짝였다.
시원한 액체가 식도를 타고 넘어갔다. 피부 위에 엉겨붙은 땀방울이 더욱 잘 느껴지도록.
“힘들었겠지. 알다시피, 네 주위에 모인 사람들이 워낙 뛰어나잖아? 그러다 보니 손에 물집이 잡힐 때까지 검을 휘두르기도 하고… 그런다고 단숨에 강해질 리도 없는데, 최근에는 환청이나 환각까지 보이는 모양이더라고.”
“환청? 환각?”
이어지는 레토의 말에 내 미간이 대번에 좁혀졌다.
환청이나 환각은 주로 중대한 정신 질환에 수반되는 증상이었다. 나는 설마 셀린이 그만큼 부담을 느꼈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알았다면 어떻게든 말렸을 터다.
무리해서 나를 따라올 필요는 없다고.
레토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혀를 쯧쯧 찼다.
“아서라, 아서. 그러다 병만 더 깊어지지… 그리고 아직은 양호한 편이야. 명상을 조금 하고 나면, 증상이 다시 사라지거든.”
당장이라도 셀린을 찾아나서려던 내 몸이 움찔했다.
그러고 보니, 레토는 셀린이 사라져도 딱히 걱정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 까닭이 밝혀질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한두 달 전부터 그랬어. 압박이 심해지면 잠깐 숨을 돌리러 가는 거야… 리아는 셀린을 오랜만에 보니 몰랐겠지.”
“하지만……!”
“그리고 너는 관심이 없어서 몰랐을 테고.”
결국 나는 끄응, 하고 신음을 삼키며 항복의 뜻을 밝혔다.
할 말이 없었다.
셀린이 그 지경이 된 것도, 그렇게 된 줄도 모르고 지냈던 것도.
온통 내 잘못뿐이었으니까.
침울해진 나를 보며 레토는 코웃음을 쳤다.
“너무 울적해 하진 마라. 어쩔 수 없는 거니까.”
나는 대답 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답답한 마음에 머리라도 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레토의 침착한 조언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지금 너한테는 해야 할 일이 있잖아. 일단은 그것만 생각해.”
“그러다 너무 늦어 버리면?”
“아무도 늦지 않아.”
주어조차 불분명한 질문에 답하는 레토의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도리어 상반신을 살짝 앞으로 기울이기까지 했다.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진중한 빛을 품고 있었다. 내게는 드물게 보여 주는 모습이었다.
“그러기 위해 모두가 아등바등 하며 애를 쓰는 거야. 너무 늦지 않으려고… 넌 네가 해야 할 일을 해. 나머지는 우리가 어떻게든 할 테니.”
내가 해야 할 일을 한다.
지당한 말이었다.
내 어깨 위에는 나만이 짊어질 수 있는 짐이 놓여 있었다.
미래에서 온 편지를 보고,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세상을 구한다.
그 무엇보다 우선해야 할 사명임이 틀림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씁쓸한 마음을 지우지 못해서, 한 마디 하려다가.
문득 레토가 읽고 있던 책의 제목에 눈길이 닿았다.
‘시공간의 상대성을 응용한 시간 여행 이론의 가설과 검토’
레토는 내 시선도 눈치 채지 못한 채 우쭐해서 내게 당부하고 있었다.
“그리고 알펜하우저 영애 이야기도 들었지? 어차피 셀린은 기억 못하는 모양인데, 널 찾아왔더라. 알다시피, 언니 쪽이 워낙 남을 얕잡아 보기로 유명해서…….”
“레토.”
그러고 보면, 아직 시험 기간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레토가 이처럼 피로한 낯빛을 할 이유가 하등 없다는 뜻이었다.
웃기게도 나는 이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너도 힘드냐?”
그 한 마디에, 쉴 새 없이 나불거리던 친우의 입이 닫혔다.
침묵은 길지 않았다.
레토는 이내 하, 하고 헛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몰라도 돼, 새끼야.”
그야말로 레토다운 대답이었다.
나는 몇 번째인지 모를 쓴웃음을 머금으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알펜하우저 영애, 나를 찾아왔다라.
그렇다면 마중을 나가 주는 편이 예의에 알맞을 터였다.
후배답게 말이다.
더불어 셀린과 나눈 마지막 대화도 캐물을 수 있고.
레토는 괜찮다고 했지만, 내 직감이 묘한 경고를 보내오고 있었다.
셀린이 겪고 있다던 환청과 환각.
그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
엠마는 요즘 눈을 뜰 때마다 볼을 꼬집곤 했다.
“……아파.”
그렇게 몽롱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엠마의 눈은 몽롱하기만 했다.
아직도 꿈나라를 헤매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엠마의 눈동자에는 얼마 지나지 않아 활기가 차올랐다.
만면에 차오른 미소가 그녀의 환희를 증명하고 있었다.
아프다.
다시 말해, 꿈이 아니다.
설원의 밤에 나누었던 고백.
이안과 나누었던 입맞춤과, 그의 따스했던 품까지.
거짓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 모든 추억들이 온기가 되어 엠마의 볼을 덥혔다.
발그레 달아오른 얼굴을 두 손바닥으로 가린 채, 여인은 헤실거리며 웃었다.
드문 일이었다.
엠마는 성실하고 부지런한 인물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잠의 여운에 잠긴 적도 많지 않았다.
그런데 느닷없이 행복에 겨워 침대 위에서 밍기적거리는 꼴이라니.
방을 함께 쓰는 친구조차 고개를 갸웃할 정도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사랑은 누군가의 세상을 폐허로 만들기도 하지만, 꽃밭으로 만들 때도 있었다.
첫사랑이 이루어진 여인의 세상은 단연 후자에 가까우리라.
물론 천성이 성실한 엠마는 침대 위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어찌할 도리는 없었지만, 몸을 일으키고 세안을 할 시간은 충분했다.
그렇게 방을 나서려던 찰나였다.
앞장 서 문을 열던 친구가 몸을 움찔 떨며 물러서는 것이 시작이었다.
엠마는 그제야 이상을 느끼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느덧 그녀의 앞에는 고깔모자 하나가 보이고 있었다.
불청객의 정체는 자그마한 소녀였다.
얼핏 보기에는 인형처럼 사랑스러워 보이지만, 아카데미 내에서 그 악명을 모르는 이가 없는 유명인사.
엘시 라이넬라였다.
엠마가 무심코 주춤거리며 물러서는 사이, 엘시는 도리어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팍, 하고 순식간에 엠마의 멱살을 잡고 끌어당겼다.
결국 엠마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상반신을 굽혀야 했다.
바로 앞에 이글거리는 푸른 눈동자가 보였다.
엠마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하고 삼키고 말았다.
위험하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손을 뿌리치고 싶었지만, 상대는 고위 귀족이었다.
평민에 불과한 그녀가 반항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엘시는 굳이 뜸을 들일 만큼 신중한 여인이 아니었다.
“야, 너 나랑 이야기 좀 하자.”
딱딱히 굳은 낯빛과 차가운 목소리.
엠마는 엘시의 말을 듣자마자 생각했다.
이것은, 제의를 가장한 명령이라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