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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411화 (411/649)

〈 411화 〉 5.5 막간: 금과 은(16)

* * *

평민이 귀족의 연적이 되면 어떻게 될까?

아무리 재능에는 귀천이 없다고 주장하는 아카데미라지만, 그 끝은 너무나 뻔했다.

운이 좋으면 모두의 앞에서 수치를 당하는 정도로 끝난다.

그도 아니라면 눈이 뽑히거나, 실종되거나, 의문사를 당할 때도 왕왕 있었다.

단지 귀족의 남자를 사랑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만큼이나 귀족과 평민의 격차는 명백했다.

갖은 애를 써봐야 평민이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기는 불가능했다. 극소수의 평민들이 공을 세워 귀족이 되기도 하지만, 엠마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그리고 엠마는 감히 고위 귀족이 노리는 남자를 탐했다.

아니, 탐하는 수준을 넘어서 입을 맞추기까지 했다.

심지어 상대는 그 성질 더럽기로 유명한 ‘엘시 라이넬라’였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럼에도 엠마는 애써 쿵쿵 울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이럴수록 담대해져야만 한다고, 그녀는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다.

언제까지고 이안의 그림자에 의지할 수만은 없었다.

또 제 연정에 거짓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떤 모욕을 주더라도 묵묵히 감내하리라.

평민이 주제에 맞지 않는 사랑을 한 대가로는 싼 편이 아닌가.

하지만 엘시의 행보는 엠마의 상상을 아득히 초월하고 있었다.

“전부 다 계산해 줘.”

엘시가 엠마를 데리고 외출한 뒤, 처음으로 뱉은 말이었다.

그 전에는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흔해빠진 안부 인사조차 건네지 않던 참이었다.

오랜 침묵 속에서 엠마의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혹시 먼저 용서를 구할 시간을 주는 걸까?

귀족들은 평민과 다투는 것을 싫어한다. 기본적으로 모양새가 빠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평민에게 ‘자비로운’ 선택지를 내려 줄 때가 있었다.

스스로 죄를 고백하고, 귀족의 아량에 기대도록 기다려 주는 것이다.

그러면 대개의 귀족은 관대한 처분만으로 평민의 죄를 용서해 주곤 했다. 체면을 위해서이기도 했고, 굳이 귀찮은 일을 감내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고작해야 평민 하나 탓에 손까지 써야 한다니.

낭비였고, 비효율적인 선택지였다.

단 몇 분만에 엠마의 손이 식은땀으로 축축해졌다.

평민의 목숨은 귀족의 기분에 따라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축적된 경험과 본능이 끊임없이 엠마를 설득했다.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으면 된다.

엘시는 무슨 생각인지 엠마를 시내로 이끌고 있었다. 이처럼 유동인구가 많은 곳에서 용서를 구한다면,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엠마를 용서해 줄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래, 그것이 올바른 선택일 텐데.

엠마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이안이 없는 삶은 상상만 해도 눈물이 핑 돌 정도였으니까.

엘시가 화려한 옷 가게에 들어선 것은 그때였다.

처음에는 시종 노릇이라도 시키려나 싶었지만, 엘시는 귀찮다는 듯 옷을 닥치는 대로 짚을 뿐이었다.

대개는 엘시의 체구에 비해 너무 큰 치수의 옷들이었다. 엠마는 어안이 벙벙해서 엘시가 하는 양을 지켜보아야 했다.

그러다 나온 말이 저 한 마디였다.

모두 계산해 달라는 말.

그 저의를 알 수 없어 고개를 머뭇거리던 엠마의 귓가에,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내리꽂혔다.

“어떤 분을 기준으로 맞춰드리면 될까요?”

“얘.”

엘시가 무심히 가리킨 상대는 다름 아닌 엠마였다.

애초에 이처럼 고급스러운 가게를 처음 온 엠마는 그 대화조차 이해가 불가능했다. 그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줄자를 들고 온 재단사에게 얼떨결에 몸을 맡겼을 뿐.

엘시는 점원에게 옷의 대금으로 추정되는 금액을 건넸다.

백금화, 무려 100골드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주화였다.

그 고귀한 광택을 목도하자마자, 엠마는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별세계의 화폐가 난데없이 등장한 느낌이었다.

엠마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거부했다.

“라, 라이넬라 아가씨! 제가 입기엔 너무 과분한 옷…….”

“그건 내가 결정해.”

단호한 어조였다.

그 음색에는 귀족 특유의 오만과 자신감이 내재되어 있었다. 평민 따위가 무슨 판단을 내렸든 간에, 제 결정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확신이었다.

결국 엠마는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엘시가 고른 옷들은 하나같이 고급스러웠다. 옷맵시는 물론이고, 원단부터가 달라 보였다.

애초에 시내에서 옷을 사본 적도 손에 꼽는 엠마였다.

식비조차 부족한 마당에 시내까지 나올 여유는 없었다. 그나마 괜찮은 옷은 입학 때 평민들에게 일괄지급된 아카데미 제복뿐이었다.

그마저도 아껴 입던 실정이었는데, 느닷없이 맞춤복을 선물 받다니.

혹시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지워 괴롭히려는 심산일까?

하지만 엘시는 100 골드의 지출 따위 딱히 신경 쓰는 기색도 아니었다.

“세세한 부분은 적당히 어울리게 맞춰 줘, 완성되면 기숙사로 보내주고.”

“네, 알겠습니다.”

그 이후에도 엘시는 이상 행동을 반복했다.

비싼 식당을 데리고 가거나, 희귀한 연금술 재료를 사주거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벤치에 나란히 앉아 음료를 마시고 있었다.

엠마로서는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 행보였다.

난생 처음 겪는 호사였으나,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보니 엠마는 마음이 불편하기만 했다.

한 끼에 1골드가 넘는 식사를 할 때는 위장이 얼어붙는 듯했고, 희귀한 마법 재료를 받았을 때는 미안한 마음에 눈치만 보았을 정도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엠마는 값비싼 음료를 마시면서도 그 맛을 음미할 수 없었다.

그저 엘시의 의도가 무엇인지 열심히 고민했을 뿐.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마땅한 해답은 도출되지 않았다.

참다 못한 엠마는 조심스레 운을 떼고 말았다.

“저, 라이넬라 아가씨…….”

“응? 왜.”

익숙하다는 듯 빨대로 음료를 쭉쭉 빨면서, 엘시는 그 푸른 눈동자를 엠마에게로 향했다.

여전히 그 속을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자그마한 몸집에는 다소 큰 감이 있는 의자 위에 앉아, 두 다리를 쭉 뻗은 모습은 마치 나들이를 나온 소녀처럼 보이기도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엘시가 왜 굳이 평민과 함께 나들이를 나온단 말인가.

엠마는 애써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소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절 부르셨나요……?”

그것이 신호였다.

다시 엘시의 표정이 딱딱히 굳었고, 엠마는 순간적으로 가슴이 철렁하고 말았다.

혹시 실수를 한 걸까?

엠마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엘시는 망설이듯 끙끙거리며 신음을 흘렸다.

그러기를 한참.

엘시는 비로소 결심이 섰다는 듯,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야, 평민. 너 요즘 주인님이랑 사이 좋더라?”

예상했던 대로였다.

엠마는 오히려 그 차가운 말투에 안심을 느꼈다. 이제야 준비해 두었던 답변을 꺼내놓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각오는 이미 했다.

엠마는 결연한 낯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고작 한 음절에 불과하지만, 강한 힘이 느껴지는 대답.

어떠한 외압이 있더라도 순순히 물러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이를 마주한 엘시는 입술을 짓씹기 시작했다.

그렇게 또 다시 머뭇거리다, 가까스로 한 마디.

“……어떻게?”

그 직후, 엠마의 사고가 보기 좋게 정지했다.

어떻게, 라니?

엠마도 몰랐다. 어쩌다 입을 맞추고, 그 이후로 매일매일을 꿈꾸는 기분으로 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엘시는 상상 이상으로 절박해 보였다.

소녀가 입술을 침으로 적신 뒤 재차 엠마를 추궁했다.

“그, 그러니까 어떻게 가까워졌냐고! 무언가 계기가 있을 거 아니야, 계기가! 그, 오해하지는 마라?”

그와 동시에 짐짓 우쭐한 척을 하며 펴지는 자그마한 어깨.

그래봐야 체구의 한계를 극복할 수는 없었으나, 허세를 부리려는 그 의도만큼은 잘 전달되었다.

엘시는 애써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검지를 치켜세웠다.

“주인님이랑 내 사이가 딱히 나쁘다는 건 아니거든? 단지, 그냥… 뭐라고 할까. 일정 수준 이상으로 가까워지지 못하는 느낌이라고 할까. 아하하… 그래서 사, 살짝 고민이 됐을 뿐이거든. 그러지 않으면 내가 평민 따위한테 조언을 구할 리가 없잖아?”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본심마저 드러나고 있었다.

평민 따위에게 조언을 구한다.

그것은 고위 귀족으로 자라온 엘시에게 있어 수치에 가까웠던 것이다.

불현듯 엠마는 오늘 보았던 엘시의 모습을 떠올렸다.

딱딱히 굳은 낯빛과 가라앉은 목소리, 처음에는 화가 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단지 엘시는 부끄러움을 감추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엠마는 그동안의 불안이 거짓말이라도 되는 양 편안해졌다.

도리어 엘시에게 묘한 친근감마저 느끼기까지 했다.

라이넬라 가문의 아가씨라도, 여자는 여자였다.

사랑 앞에서 끙끙 앓는 것은 엠마나 엘시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엠마는 무심코 쿡, 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평소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무례였다.

스스로도 화들짝 놀라 다시 눈치를 살필 만한 실수였다. 그럼에도 엘시는 그다지 화가 난 기색이 아니었다.

다만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몸을 부들부들 떨었을 뿐.

“우, 웃지 마라……?”

“아, 아니에요! 제가 어찌 라이넬라 아가씨 앞에서… 그저 예전에 비슷한 고민을 품은 적이 있어서요.”

아차, 엠마는 또 다시 실수를 저질렀다고 생각했다.

자존심 강한 귀족 앞에서 ‘비슷한 고민’을 한 적이 있다니.

혹시라도 맞먹으려 드는 거냐고 역정을 내더라도 할 말이 없었다.

본래 귀족이란 그런 존재였다.

제멋대로에, 통제가 불가능한 인간들.

그러나 엘시는 의외로 엠마를 탓하지 않았다. 대신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냈을 따름이었다.

“비슷한 고민?”

“네, 네에… 저도 이안과 친해지기 전까지, 많은 고민을 했거든요.”

엠마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어떻게 말을 해야 엘시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고, 제 의도대로 움직일 수 있는지.

아카데미에서 평민으로 살아간다는 건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그 오랜 경험이 지금 엠마에게 활로를 열어주고 있었다.

엘시는 흐응, 하고 묘한 소리를 내며 목소리를 죽였다.

“그럼, 나 좀 도와줄 수 있어?”

“네? 제가 어찌 감히 라이넬라 아가씨께…….”

“첩하고 싶다며.”

툭, 하고 엘시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러한 말을 꺼냈다.

그것이 모욕이 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한 태도였다.

그리고 이는 사실이기도 했다.

귀족과 평민이 맺어지면, 대개 평민은 첩의 자리를 얻는다. 처가 되는 것은 귀족뿐이었다.

엠마도 익히 알고 있던 바라, 딱히 상처를 받지는 않았다.

“첩살이가 얼마나 힘든지는 알지? 본처의 견제가 만만치 않거든… 하지만 내가 본처가 된다면?”

솔직히 말해 실감 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결혼이라니, 엠마로서는 먼 훗날의 일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하지만 제안을 건네는 엘시의 표정은 한없이 진지했다. 진심으로 이안의 본처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엠마는 어색한 미소를 짓는 수밖에 없었다.

귀족의 삶도 참 피곤하구나.

그러한 감흥만이 와 닿았다.

“나도 네가 예뻐서 잘해 주는 건 아니야. 단지, 너도 주인님의 곁에 있으려면… 귀족의 품위에 익숙해져야 해. 오늘 사준 옷도 그러한 의미라고 생각해. 그 허름한 제복 좀 벗고 다니고.”

“앗, 네. 네! 명심할게요…….”

엠마는 일단 머뭇거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내심 엘시의 지적이 부끄럽기도 했다.

귀족의 품위라니, 돌이켜 보면 이안도 귀족이었다.

당연히 명예나 품위를 신경 쓰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 그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여자애가 매일 굶고, 허름한 옷을 입고 다닌다니.

남들이 손가락질을 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엠마는 괜히 침울해져서 살짝 고개를 떨구었다.

그 모습을 보며, 엘시는 혀를 쯧, 하고 찼다.

“앞으로는 조심해. 내가 종종 봐주긴 하겠다만은…….”

아닌 척해도 엠마를 도와주긴 하겠다는 뜻이었다.

심지어 아직 엠마가 엘시의 제안에 응하지 않았음에도.

이후에도 한참이나 대화를 나누면서, 엠마는 생각했다.

자신이 엘시를 오해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엘시는 무리를 이끌던 사람답게 털털하고 사교성도 나쁘지 않았다. 최소한 제 사람의 자그마한 트집까지 잡아내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렇게 평가가 달라지니 엠마의 태도도 자연스레 풀어졌다.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떠보듯 농담까지 던질 사이가 되었다.

“그러다 제 쪽이 먼저 이안과 좋은 분위기라도 되면…….”

“야.”

그때였다.

훅, 하고 다시금 엠마의 상반신이 엉거주춤 굽혀졌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는 사이, 어느덧 엠마는 엘시와 이마를 맞대고 있었다.

엘시는 웃고 있었다.

그래, 최소한 입가는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정작 그 눈동자에는 빛이 사라져 있었지만.

“선 넘지 마라? 넌 첩이고, 난 본처야. 우리 이건 확실히 하자고.”

엠마는 결국 울먹이며 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네, 네…….”

귀족은 역시 무서웠다.

엘시 라이넬라는 특히나 더.

그날, 새로운 동맹이 탄생했다.

건방진 귀족과 이해심 많은 평민이라는 기묘한 조합이었다.

**

나는 잠시 넋을 놓고 말았다.

고풍스러운 집무실, 내 앞에는 아리따운 두 여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은빛 머리카락과 은빛 눈동자.

그 초점조차 명확하지 않았다. 어디를 보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저의를 알 수 없다는 것은 불안을 불러 일으킨다.

이처럼 꺼림칙한 외모야말로 어느 가문의 상징이었다.

알펜하우저, 제국에 단 둘밖에 없는 공작가.

내 앞에 선 여인은 그 이름에 걸맞은 화사한 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등 뒤에 시립한 여인은 정반대로 음침한 인상을 주고 있었지만 말이다.

눈까지 가리는 앞머리만 잘 처리하더라도 한결 낫지 않을까.

물론 오지랖이었다.

그보다 내 이목을 사로잡는 광경은, 나와 두 여인 사이에 놓인 탁자였다.

그 위에는 백금화가 산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알펜하우저의 부를 과시하듯이.

“어때요, 충분한가요?”

그 신분만큼이나 고고한 목소리로, 내 맞은편에 앉은 여인은 슬쩍 눈웃음을 지었다.

“성녀를 팔아치우는 대가로는.”

나는 이내 흐, 하고 웃음을 터트렸고.

대답 대신 손도끼를 치켜들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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