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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412화 (412/649)

〈 412화 〉 5.5 막간: 금과 은(17)

* * *

레토를 만난 직후, 나는 알펜하우저의 쌍둥이를 찾아갔다.

굳이 발품을 팔 필요까지도 없었다.

알펜하우저의 쌍둥이는 초빙 교수였고, 대개는 집무실에 머무르고 있다고 들었으니까.

사전에 조율조차 되지 않은 방문이었다.

귀족들은 약속과 양해를 중요시 여긴다. 만나러 가는 쪽이 사전에 어느 시간을 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예의였다.

그럼에도 나는 그 예절을 지키고 싶지 않았다.

알펜하우저 가문, 유달리 수상한 냄새가 났다.

우선 이 시점에 갑작스레 아카데미로 돌아온 저의를 알 수 없었다.

더불어 나를 찾는 까닭까지도.

어차피 아쉬운 쪽이 상대라면, 배짱을 부리는 편도 나쁘지 않으리라.

아니, 사실 화풀이를 하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셀린이 두 사람을 만났고, 곧 실종되었다.

자세한 인과관계는 알 수 없으나 꺼림칙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대화를 나누었기에.

그 의문의 해답을 쥐고 있는 이는 머지않아 드러났다.

똑똑, 하고 문을 두드린 직후 나는 집무실 안에 들어설 수 있었다.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방이었다.

알펜하우저의 후광 덕인지, 쌍둥이의 집무실은 채광이 좋은 편에 속했다. 한낮의 태양이 살가운 인사를 건네는 곳이었다.

바깥은 여름이었다.

아직 기승을 부리는 더위가 파고들 만도 한데, 실내는 쾌적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값비싼 마도구를 사용한 덕이 아닐까 싶었다.

알펜하우저 가문에는 썩어넘치는 것이 금화였으니까.

유르디나 가문도 부호에 속했지만, 알펜하우저의 부는 차원이 달랐다.

대륙에 알펜하우저의 손을 거치지 않는 금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말이 공공연히 떠돌았고, 또 사실처럼 받아들여질 만큼 막대한 자본을 움직이는 곳이었으니까.

나는 의외로 정중한 환대를 받을 수 있었다.

“반가워요, 그러니까… 리안 페르쿠스?”

“이안 페르쿠스에요, 언니.”

말간 빛 사이에서 두 자매가 조곤조곤 속삭임을 나누었다.

의자에 앉은 여인은 화사한 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풍성한 은빛 머리카락이 은은한 굴곡을 타고 폭포수처럼 등 뒤로 떨어진다. 은빛의 동공은 흐릿해서 흰자위와 분간조차 힘들었다.

그리고 입가에 걸린 알 듯 말 듯한 미소까지.

맑은 혈색과 손에 들린 쥘부채가 활달하고 오만한 성미를 증언하는 듯했다.

반면 그 뒤에 시립한 여인은 창백하고 음침한 인상이었다.

우선 앞머리에 가려진 눈동자가 그랬다.

그리고 제 앞에 앉은 여인과는 다르다는 티라도 내려는지, 목덜미를 살짝 덮는 부피감 있는 단발까지.

앞에 앉은 여인이 인사를 건네고, 이를 뒤에 선 여인이 정정한다.

이토록 특이한 광경이라면 내가 들어보지 못했을 리 없었다.

일단은 내 선배였으니까.

쓴웃음과 함께 내 고개가 살짝 숙여졌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시에네 선배. 그리고 루나 선배.”

알펜하우저의 해와 달, 시에네와 루나.

시에네는 기억력이 좋지 않아 늘 루나의 조언을 들어야 했고, 루나는 판단력이 좋지 않아 늘 시에네의 결정을 따른다.

마치 태어난 순간부터 그렇게 운명이 짝 지어진 듯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두 사람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오직 ‘쌍둥이’라고만 호칭할 뿐.

어차피 두 사람은 떨어져 생활할 때가 거의 없었으니까.

나 또한 쌍둥이의 이름을 각자 불러 보기는 오랜만이었다.

시에네 선배는 어렴풋한 미소를 머금었다.

“알아봐 주다니 영광이에요, 베르타스 경. 그런데 우리가 언제 본 적이 있었던가요?”

“2년 전의 졸업식 때 인사를 나눈 적이 있어요, 언니. 그 밀림의 암사자와… 그리고 베르타스가 아니라 페르쿠스에요.”

아아, 하고 시에네 선배는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탄성을 터트렸다.

정작 내 이름을 틀렸다고 미안해 하는 기색은 없었다.

“암사자가 소개해 준 그 잘 생긴 후배! 반가워요, 그러지 않아도 찾고 있었는데.”

싱긋, 하고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시에네 선배는 눈웃음을 지었다.

“우선 앉겠어요? 보아하니, 후배도 우릴 꽤나 그리워했던 모양인데.”

굳이 거부할 필요가 없는 제안이었다.

나는 얌전히 시에네 선배의 맞은편에 앉으면서, 한숨 섞인 불평을 늘어놓았다.

“여전하시군요. 이름을 외우지 못하는 건.”

“비효율적이기 때문이죠.”

탁, 하고 쥘부채를 접으며 시에네 선배는 단언했다.

루나 선배는 그새 찻잔과 주전자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자연스러운 몸짓에서는 잡일을 도맡는 자 특유의 불만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마땅히 이래야 한다는 듯 태연한 낯빛이었다.

이는 시에네 선배조차 마찬가지였다.

“이름이라든가, 지명이라든가, 구체적인 수치라든가… 그까짓 것들이 왜 중요하죠? 알아야 할 것은 흐름뿐이에요. 그 무수한 사실들이 모여서 만들어 내는 도도한 시류… 이를 읽어내는 자만이 금화를 손에 쥘 수 있죠.”

“그래서 제 이름도 기억하지 않는 겁니까?”

“두뇌의 용량에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쪼르륵, 하고 찻잔에 찻물이 차올랐다.

증기와 함께 향긋한 다향이 풍겼다. 시에네 선배는 기품 있는 자세로 찻잔을 들었다.

“쓸데없는 사실이 제 집중을 흐트러트리는 걸 원치 않아요. 부디, 양해해 주시길.”

헛소리, 나는 그 말을 들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와 동시에 내 눈이 흘깃 측면을 향했다. 그곳에는 다소곳이 내 찻잔에 차를 따르는 루나 선배가 보이고 있었다.

만약 정보가 필요 없었다면, 루나 선배를 언제나 데리고 다닐 필요도 없을 테지.

하지만 나는 굳이 시에네 선배의 고집을 꺾지는 않았다.

그보다 중요한 용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 아끼는 후배를 만나셨다고 들었습니다.”

차를 홀짝이던 시에네 선배의 눈이 가늘어졌다.

흐응, 하고 묘한 소리가 흘러나온다.

허공을 노닐던 찻잔이 탁, 하고 제자리로 돌아간 것은 그 무렵이었다.

“검술학부의 그 여자? 그러니까, 이름이 엘린이었던가…….”

“셀린 하스터에요, 언니. 우리 가문의 금광이 있는 영지 출신이기도 하고요.”

“아아, 맞아. 그 하스터 금광의?”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는 내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하스터 금광’이라니.

애초에 하스터 가문의 소유였던 광산을 강제로 빼앗은 이들이 나눌 대화치고는 파렴치했다.

그러나 나는 일부러 감정을 드러내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나와는 사는 세계가 다른 사람들이었다.

일일이 잘못을 지적해 봐야, 계약에 따른 정당한 거래라는 소리만 늘어놓을 것이 뻔했다.

그보다는 어서 대화를 마치는 편이 내 정신 건강에 이로우리라.

“혹시 셀린과 무슨 마찰이라도 있었습니까?”

그러자 되돌아오는 것은 코웃음이었다.

노골적인 조소.

불쾌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었지만, 나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확신했다.

시에네 선배는 셀린을 건드리지 않았다.

그래야 할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했을 테지.

“그럴 리가 없잖아요? 굳이 그 약소 가문의 영애를 자극해야 할 이유는 없다고요. 비효율적이니까.”

“그렇다면 대화 도중에 이상한 점이라도…….”

“없어요, 없어. 단지 당신의 행방을 물어보러 갔을 뿐이에요. 북부에서 언제쯤 돌아온다는 전언이 있나, 하고.”

그렇게 고개를 내젓던 시에네 선배의 귓가에 누군가가 다가섰다.

루나 선배였다.

그녀가 무어라 속삭이자, 시에네 선배의 태도가 다소 누그러졌다.

“흐응? 그러고 보니, 그때 자꾸 무슨 여자를 보지 못했냐고…….”

“여자요?”

“그래요, 아무도 없는 공터였는데 말이죠. 검만 휘두르다 보니 머리가 조금 이상해진 걸까요? 아니, 아니! 그보다 당신!”

‘여자’를 보는 환각이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 현상이었다.

나는 그 잡힐 듯 말 듯한 기억을 뒤적이느라 눈앞의 여인이 무어라 떠드는지도 듣지 못했다.

우쭐한 얼굴로 쥘부채를 들이미는 꼴로 보아, 내게 거래라도 제안할 심산인 듯했다.

과거를 헤매던 내 의식이 부상한 것은 잠시 후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강제로 깨어난 것에 가까웠다.

촤르륵 쏟아져 내리는 백금화를 보면 누구라도 그럴 테니까.

멍청해진 내 눈빛을 배경으로, 여인은 도도한 미소를 머금었다.

“어때요, 충분한가요?”

그렇게 이야기는 이어진다.

“성녀를 팔아치우는 대가로는.”

바로 내가 손도끼를 뽑아들면서 말이다.

쾅, 하고 폭음과 함께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손도끼가 탁자를 내리치자마자 벌어진 사태였다.

숙련된 검사의 완력은 범인의 상식을 아득히 상회한다. 일순 내리꽂힌 새하얀 벼락은 목재 가구 하나를 단숨에 산산조각 내 버렸다.

허공에 비산하는 백금화와 목편, 그리고 넋을 놓은 시에네 선배의 얼굴.

나는 망설임 없이 손도끼의 고도를 높였다.

뒤늦은 비명이 터져 나온 것은 그때였다.

“꺄, 꺄아아아아악! 다, 당신… 뭐하는 거야?!”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합니까?”

나는 낮게 으르렁거리며 이를 악물었다.

성녀를 팔아치우라고?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성녀는 내 동료일 뿐더러, 여태껏 몇 번이나 내 목숨을 살려준 은인이기도 했다. 팔아치우라는 소리를 들은 것만으로도 귀가 썩어버리는 느낌이었다.

나는 애써 분기를 억누른 목소리로 재차 말했다.

“제 동료를 배신하라니요? 설마 그따위 모욕을 하고도 몸 성히 나갈 생각은 아니시겠죠.”

“몸 성히 나갈 생각인데요?! 말 한 마디 했다고 도끼를 휘두르는 미친놈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

시에네 선배는 안색이 새파래진 채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아무래도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된 모양이었다.

나는 후우, 하고 숨을 가다듬었다.

귀족의 명예는 목숨과 같다.

모욕을 당한다면 그 이상으로 돌려주는 것이 상례였다. 마침 시에네 선배의 깔보는 듯한 태도가 고깝던 참이었다.

심하지는 않더라도, 나를 얕보지 못할 정도로는 손을 봐줄 생각이었다.

루나 선배는 이러한 내 의도를 눈치 챈 듯했다.

그나마 침착을 되찾은 목소리가 조곤조곤 울려 퍼졌다.

“언니, 이안 페르쿠스는 폭력적 성향으로 유명해요. 이미 유르디나 자매를 비롯한 대귀족들에게도 중상을 입힌 전례가 있습니다.”

그제야 다가올 미래를 짐작했는지, 시에네 선배는 핼쑥한 얼굴이 되었다.

물론 그 혀는 아직도 활로를 찾아 움직이는 중이었다.

“아니, 아니, 아니… 난 아무 힘도 없는 여자잖아! 당신, 나한테 이래도 돼?! 기사의 명예 따위는 없는 거야?”

당장이라도 손도끼를 내리찍으려던 내 몸이 우뚝 멈춰 섰다.

타당한 지적이었다.

지금껏 나는 무력을 갖춘 상대를 향해서만 도끼를 휘둘렀었다. 최소한 검이든 마법이든 스스로를 보호할 수단을 갖춘 이들이 내 적이었다.

하지만 알펜하우저의 쌍둥이는 달랐다.

아무런 무력도 없는 일반인, 모욕을 당했다고 해서 함부로 도끼를 휘두를 수는 없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이내 적당한 타협책을 고안해냈다.

“그럼 흉이 남지 않을 정도로만…….”

“이거 완전 미친놈이잖아?!”

결국 출구를 찾지 못한 시에네 선배는 울먹이며 루나 선배에게 매달렸다.

그 초점조차 보이지 않는 은빛 눈동자에 물기가 가득 차올랐다.

“루나, 저 인간 이상해… 눈이 맛이 갔잖아! 왜 우린 이딴 인간에게 호의를 베풀려고 했던 거야?”

마지막까지 뻔뻔한 소리를 늘어놓다니, 그 담력이 놀라웠다.

과연 알펜하우저의 차기 당주를 노릴 정도는 된다는 걸까.

그래서 나는 헛웃음을 삼키며 반문하는 수밖에 없었다.

“호의라니, 그게 무슨 헛소리…….”

“배신이 아니니까요.”

나는 일순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었다.

의문을 담은 내 눈동자가 시에네 선배를 향했다.

어느새 그 은회색 동공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이전에 느껴지던 두려움이나 물기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은근한 흥미마저 담긴 눈빛이었다.

“배신을 당하기 전에, 정당한 대가를 취하라는 거죠. 아, 혹시 검술학부에서는 그것도 배신이라 가르치나요?”

그리고 시에네 선배의 입가에 떠오르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앞에 두고, 나는.

손도끼를 쥔 손에 다시금 힘을 주었다.

“꺄아아아아악! 지, 진짜 미친놈이야!”

한동안 집무실에는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

나는 터덜터덜 기숙사로 돌아왔다.

낯익은 풍경이 망막을 덮었다. 오랜만에 되돌아 온 방이었으나, 나는 그저 피곤한 낯빛을 한 채 찬장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싸구려 위스키가 한 병 자리하고 있었다.

뚜껑을 따고, 잔을 채우면서, 나는 오후에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성녀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나요? 푸흡, 아하하! 제 이름조차 버리고 평생을 연기해 온 독한 여자인데?”

“어디든 그렇지만, 특히 성국의 정치판은 만만한 곳이 아니에요. 혓바닥이 칼처럼 춤을 추고, 미소를 칼집이라 생각하는 아사리판이죠… 성녀는, 그곳에서 살아남은 거에요.”

비웃듯이, 혹은 동정하듯이.

시에네 선배는 내게 말을 적선했다. 내 손이 술잔을 움켜쥐었다.

그래서 나는 무어라 대답했더라.

“믿는다고요? 아아, 뭐. 괜찮겠죠. 배신을 당하고 나서 후회해도 나쁘지 않아요. 젊음이란 그렇게 교훈을 얻어가는 과정이니까요.”

싱긋, 웃으면서 여인은 말했다.

“행운을 빌죠, 페리안트 경.”

페르쿠스 경이라고, 나는 이제 눈앞에 있지도 않은 상대에게 불만을 토해냈다.

머리가 복잡했다.

단순한 이간질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시에네 선배는 너무나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나도 모르는 성녀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듯.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실이 밝혀지기라도 한다는 듯이.

나는 어느 여인을 떠올렸다.

은빛 머리카락과 연분홍빛 눈동자, 신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순결한 처녀.

점차 회상은 이어진다.

혀를 쭉 내밀며 나를 놀리던 기억, 왜 고아들을 구했냐며 부르짖던 기억, 손과 손이 스치던 감각, 따스한 온기, 뺨에 떠오른 홍조와 여인의 살내음.

“……아니야.”

홀로 중얼거리며, 나는 쓴웃음을 삼켰다.

성녀는 악인이 아니었다.

무슨 비밀을 숨기고 있던 간에, 성녀를 향한 나의 믿음은 변함이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였다.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성녀에게는 곧 시련이 찾아온다.

그러니 내가 지킬 것이다.

성녀를, 아프지 않도록.

그렇게 각오와 함께 밤이 깊었고, 다음날.

내 머리맡에는 편지 봉투가 하나 놓여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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