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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414화 (414/649)

〈 414화 〉 6. 존재 증명(2)

* * *

신의 존재는 증명되었다.

반론이 없지는 않겠으나, 최소한 대중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신성력’이라는 알기 쉬운 증거가 있기 때문이었다.

천신이 내려주는 힘은 말 그대로 ‘기적’이었다.

병이 들어도, 사지가 잘려나가도 신성력이 있다면 회복이 가능했다. 이는 인류가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마법’이라는 체계로도 불가능한 이적이었다.

만일 인류에게 마법을 전해 준 용들이 되돌아온다면 또 몰랐다.

하지만 용들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고, 인류의 지식은 아직 신의 뜻에 다다르지 못했다. 그러니 온 대륙에서 천신교가 성세를 누리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명실상부 대륙 최강의 국가는 제국이다.

그리고 그 제국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곳이 성국이었다.

종교가 가진 진정한 위력을 모르는 위정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비록 성국도 감히 제국을 자극하지는 못하지만, 제국이 성국의 권위를 존중한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나를 종교재판에 호출한 이들은 바로 그 정점에 존재했다.

천신교의 본산이자, 무수한 신도들의 숭앙을 받는 곳.

그 이름조차 위엄 넘치는 ‘교황청’이었다.

한 줄로 요약하자면, 그래.

좆됐다는 소리였다.

“아니, 도대체 누가 고발을 한 겁니까?”

나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그렇게 물었다.

지끈거리는 두통 탓에 끙끙거리는 신음이 섞여 나오고 있었다. 내 맞은편에 앉은 여인 또한 마음이 편하지는 않은지, 옅은 한숨을 몇 번이나 내쉬고 있었다.

아마도 모든 내막을 알고 있을 여인, 성녀였다.

이내 성녀의 고개가 힘없이 내저어졌다. 지난 며칠 동안 진이 다 빠졌는지, 피로한 낯빛이었다.

“우선, 제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어요. 그리고 고발을 막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요.”

그랬겠지.

상식적으로 성녀가 먼저 나서 고발을 했을 리는 없었다. 그랬다면 굳이 뒷수습을 하러 나를 찾아올 이유도 없었을 테고, 애초에 나를 법정에 세울 기회는 예전부터 차고 넘쳤다.

굳이 이제 와서 나를 고발할 이유는 없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미래에서 온 내가 무언가 음모를 꾸몄으리라.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나는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도대체 그 인간은 무슨 의도로 그랬던 걸까.

단순히 나를 엿 먹이고 싶어서?

심지어 그 많고 많은 죄목 중에 하필 ‘성희롱’이라니, 악의밖에 느껴지지 않는 선정이었다.

성녀는 내가 고민에 잠긴 와중에도 조곤조곤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그러니까 계기는 며칠 전, 제가 막 아카데미로 돌아왔을 때였어요…….”

**

북부에서 돌아오던 날, 성녀의 기분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우선 담당하고 있던 환자들의 예후가 좋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심각한 부상을 호소하던 이들도 있었지만, 사망자는 더 이상 늘지 않았다. 유르디나 가문의 전폭적인 지원 덕이었다. 더불어 인류와 엘프의 갈등도 이제 끝이 나지 않았는가.

전장은 언제나 가난한 자의 목을 물어뜯는다.

여러 가지 사정이 있겠으나, 전장에 서는 병사 대부분은 빈민층에 속했다. 이는 목숨을 걸고 돈을 버는 직종의 공통적인 특징이었다.

용병이라든가, 마수 사냥꾼이라든가.

벼랑 끝에 서는 자들은 저마다 한 가닥씩의 사연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성녀는 늘 최전선에 설 때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군은 물론이고, 적군 또한 한계에 몰려 있단 사실이 너무 빤히 보였던 탓이었다. 누구도 바라지 않는 전투가 무수한 생명을 거두어 가고 있었다.

신의 사자를 자처하면서 어찌 이를 기껍게 여길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 기나긴 비극도 이제 막을 내렸다.

다름 아닌 사랑하는 사내의 활약으로.

성녀는 오랜만에 이안을 볼 생각에 가슴이 부풀었다. 아카데미로 곧장 따라가지 못해 아쉬웠지만, 일주일 후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지킬 수 있어 다행이다 싶었다.

그 들뜬 기분이 가라앉을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아카데미의 중앙대로, 그곳에서 마주한 사내는 어딘가 이상했으니까.

황금빛 눈동자에는 진득한 피로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한 줌의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는 그 시선을 마주하며, 성녀는 직감했다.

저 사내는 ‘이안’이 아니었다.

성녀가 연모하고 있는 상대는 저토록 무기질적이지 않았다.

“……이안?”

움찔 몸을 굳히면서, 성녀는 우선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능성은 하나뿐이었다.

미래에서 온 ‘이안 페르쿠스’다. 까닭은 알 수 없으나, 그가 다시 이안의 몸을 차지한 것이다.

더불어 그는 성녀를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성녀에게 무언가 용건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행인들이 수도 없이 많은 이 중앙대로에서!

성녀의 사고가 순식간에 헝클어졌다. 어떻게 반응해야 될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적당히 아는 척만 하고 지나갈까?

아니라면, 좀 더 조용한 곳으로 장소를 옮겨 사정을 캐물어야 할까.

물론 사내는 성녀가 고민할 여유조차 주지 않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성녀님.”

이 무렵에서 성녀는 상대가 이안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성녀와 이안은 헤어진 지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았다. ‘오랜만’이라는 표현을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한 판단을 내린 성녀의 낯에 인자한 미소가 떠올랐다.

대다수의 타인을 대할 때 쓰는 ‘가면’이었다.

“임마누엘… 오랜만에 뵙습니다, 형제님. 그간 평온하셨는지요?”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습니다.”

어느덧 성녀의 주위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안과 성녀, 둘 다 아카데미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는 유명인사들이었다.

그 두 사람이 한 곳에 모여 있으니 호기심이 동할 만도 했다.

심지어 이안과 성녀는 얼마 전까지 북부에서 머무르고 있지 않았던가.

그곳에서 벌어진 온갖 사건들은 고스란히 영웅담이 되어 있었다.

도리어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이상했다.

성녀는 오늘따라 그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지금 상대의 의중은 안개 속에 있었고, 대중의 이목은 강력한 권위를 가진 증거가 되어 순식간에 퍼져 나간다.

돌발 상황이 발생해도 대처하기 난감하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성녀는 사내와의 대화를 적당히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부디 앞으로 다가올 시련에도 주님이 함께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저는 신전에 급한 용무가 있어 이만…….”

미소를 지으며 성호를 그은 성녀가 다시금 발을 내딛었다.

자세한 사정은 조금 이따 알아볼 심산이었다.

하지만 사내의 뜻은 그렇지 않은 듯했다.

“의외로 성미가 급하시군요. 아니…….”

그가 자연스레 검지로 턱을 쓰다듬으며 눈을 감는 기색이 느껴졌다.

너무나 차분한 반응.

그 탓에 성녀는 곧장 반격하지 못했다.

“……침대 위에서도 그랬던가.”

우뚝, 하고 걸음을 옮기던 성녀의 몸이 굳어버렸다.

너무 놀라서 미소에 균열이 갔다는 사실조차 눈치 채지 못했다. 성녀는 불신을 가득 담은 눈으로 뒤를 다급히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성녀처럼 눈을 휘둥그레 쓴 행인들을 배경으로.

“예민한 몸이긴 했죠. 특히 가슴 쪽이 민감해서…….”

“……자, 자, 잠깐!”

머리가 새하얘진 와중에도 성녀의 본능은 동작하고 있었다.

저 사내가 더 말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미 폭탄은 던져졌고, 도화선도 당겨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미 저 남사스러운 소리를 들은 증인만 수십 명이었다.

도저히 수습할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단지 성녀는 필사적으로 평온을 가장했다.

“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죠? 혹시, 병상 위에서라면 환자의 상태에 따라…….”

“당연히 침실에 있을 때의 이야기죠.”

끝났다.

저 진술의 진위여부 따위는 상관없었다. 사내가 내뱉은 정보는 그만큼 자극적이었다.

제국의 신성과 성녀의 열애담?

당장 성녀만 하더라도 관심을 가지고 찾아볼 만한 내용이었다. 심지어 성녀는 순결의 의무를 지고 있었으니, 이야기는 몇 배나 배덕감 넘치는 소문으로 가공될 것이 분명했다.

그 짧은 시간 계산을 마친 성녀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거리는 침묵에 잠겼고, 사내는 능청을 떨며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흥분하셨습니까?”

이건 또 무슨 헛소리인가.

성녀는 오랜만에 욕지거리가 치솟는 것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대신 미처 여과하지 못한 분노를 토해냈다.

“무, 무슨 참담한 말씀을! 형제님, 아무리 우리 사이더라도 이 이상의 모욕은 용서하지 않…….”

“억지로 당하는 편을 더 좋아하잖습니까.”

그 한 마디에 성녀는 딸꾹, 하고 말문을 닫았다.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비밀스러운 취향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러고 보면, 저 사내는 예전에도 성녀의 성적 취향을 가지고 협박한 전적이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그가 성녀의 내밀한 정보까지 파악하고 있다는 가설은 유력했다.

그렇게 성녀가 잠시 당황한 사이, 사내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가 성녀에게 보인 몇 안 되는 감정 표현이었다.

“그래서 좋아할 줄 알았죠. 착각했다면 미안합니다.”

어느덧 행인들은 노골적인 의심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성녀의 고막을 찢고 들어왔다. 묘한 눈빛이 성녀의 낯빛을 훑고 지나갈 때마다 성녀는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수치스럽고, 당혹스럽다.

이미 얼굴은 터질 듯이 붉어진 뒤일 터였다. 여인으로서 제 성적 취향이 만천하에 공개당했다는 사실이 달가울 리는 없었다.

더욱이 성녀의 사고를 얽매는 것은, 아직도 사내의 말이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는 이제 선을 넘으려 들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스스로를 억누를 필요는 없습니다. 아마 아루스께서도 그러기를 원하고 계실 테니까요. 아아, 저도 아루스께 오늘 밤 좋은 따님을 주셔서 감사하다는 기도를 드려야……..”

“회, 회부!”

사내의 마지막 말은 성녀의 고함에 막혀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저 언행까지 퍼져 나가면, 성녀로서도 손 쓸 도리가 없었다. 천신을 직접 모독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으니까.

그래서 성녀는 이 모든 화두를 뒤엎을 수단을 동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당신, 종교 재판에 회부할 거야아아앗!”

제국의 신성, 성녀에게 성희롱으로 고소당하다.

다음날 아카데미 전역에 퍼진 소문은 그렇게 탄생했다.

**

“아니, 아니! 잠깐만요, 그럼 결국 절 종교재판에 회부한 건 성녀님 아닙니까?”

내 지적에 성녀는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살짝 고개를 돌렸다.

이내 소심한 반론이 이어졌다.

“……의도한 바가 아니라고 했지, 제가 하지 않았다고는 말하지 않았어요.”

“그게 그거 아닙니까!”

나는 믿었던 동료의 배신에 몸을 부들부들 떨며 외쳤다.

설마 했는데, 성녀가 나를 법정에 세우려 들다니.

결국 알펜하우저의 쌍둥이의 경고가 옳았단 말인가?

나는 여전히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는 성녀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천신교의 성녀라는 분께서, 성희롱과는 연조차 없는 무고한 기사를……!”

“……무고?”

서릿발처럼 내뱉어진 한 마디였다.

나는 나를 말없이 노려보는 성녀의 시선에 식은땀을 흘렸다.

성희롱을 하지 않았다는 건 너무 나가긴 했지.

그 지적을 수용하여, 내 의견에 수정이 가해졌다.

“뭐어, 다소의 오해가 있긴 했지만… 하여튼 순수한 의도로 접근한……!”

“순수?”

그렇다고, 나는 다시금 목청을 높여 강변하려 들었다.

성녀의 팔이 살짝 제 젖가슴을 바치지만 않았어도 말이다.

자연스레 강조되는 굴곡에 무심코 내 시선이 움직였다. 남자라면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

성녀의 눈동자는 차게 식었다.

나는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며 항복이라는 듯 몸에 힘을 풀었다.

“……좋습니다. 말씀하시죠.”

그제야 성녀는 코웃음을 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무리 흥분했더라도 성녀는 성녀였다. 당혹스러운 와중에도 심계를 숨겨두었을 터였다.

“어차피 제가 아니라도 주변에는 사람이 많았어요. 그렇게 노골적인 모욕을 들었다면, 당연히 성국에도 소문이 퍼지겠죠. 그러면 제가 나서지 않아도 종교재판은 확정이에요.”

“그래도 시간을 벌 수 있었을 텐데…….”

“중요한 것은 제가 종교재판을 요청했다는 거죠. 제가 바로 피해자니까.”

그러면서 성녀는 살짝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스스로 짜낸 계략이 꽤나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다시 말해, 합의 조건에도 제 입김이 들어갈 여지가 크다는 거에요.”

“합의라니… 그런 것이 가능합니까?”

그럼에도 나는 일말의 의문을 지우지 못했다.

왜냐하면 내가 종교재판에 회부된 죄목 때문이었다.

일단은 ‘성희롱’이라지만, 피해자가 성녀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신성 모독’이라는 혐의가 주안점으로 다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성녀는 천신이 가장 사랑하는 처녀였으니까.

성국의 최고위직을 성희롱했다는 것조차도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심지어 그 상대가 천신교의 상징적인 인물 중 하나인 성녀라면, 성국도 얌전히 있을 리는 없었다. 길길이 날뛰며 나를 십자가에 매달겠다 들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성녀는 여전히 자신만만한 기색이었다.

“이안, 이제 스스로의 위치를 자각해요. 지금 성국에서 당신을 사형에 처하겠다고 하면, 제국에서 옳다구나 받아들이겠어요?”

그제야 나는 아, 하고 탄성을 터트렸다.

성녀의 말이 옳았다.

내게는 제국 황실을 비롯한 여러 인연이 있었다. 게다가 나는 ‘제국의 신성’이라고 불리는 몸이었으니, 아무리 내 죄가 명백하더라도 제국에서 얌전히 있지는 않을 터였다.

고작해야 성희롱 정도라고 강변하겠지.

이렇게 되면 성국도 셈법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성녀는 그 틈을 파고든 모양이었다.

“성국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피해당사자인 제가 선처를 요청하는 거죠. 그리고 체면치레에 가까운 합의 조건을 들고 오면, 일처리는 끝.”

“오오.”

나는 순수하게 감탄했다는 얼굴로 성녀를 바라보았다.

그 와중에도 손익을 명확히 분별해 행동했단 말인가?

더불어 성녀는 이를 통해 성국과 제국에 동시에 빚을 지워두게 되었다. 어찌됐든 간에 문제를 하나 해결해 준 셈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새삼 성녀가 성국의 정치판에서 살아남은 이유를 실감했다.

이제 남은 문제는 하나뿐이었다.

“그래서, 합의조건은 뭡니까?”

그러자 성녀는 다시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착, 하고 서류 한 장이 내 앞에 펼쳐진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내가 그 내용을 읽어 내리기도 전에, 성녀는 더욱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가족한테 인사 갈래요?”

가족이라.

나는 성녀의 치명적인 미모에 넋을 놓은 와중에도 생각했다.

고아에게도 가족이 있었던가?

그렇게 나의 다음 행선지가 결정되었다.

성국으로.

편지를 읽기도 전의 일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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