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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416화 (416/649)

〈 416화 〉 6. 존재 증명(4)

* * *

셀린은 생에 두 번째 사춘기를 보냈다.

첫 번째 사춘기가 아이에서 소녀가 되는 길목이었다면, 두 번째 사춘기는 소녀가 여인이 되어 가는 과정이었다. 겨울처럼 차고 어두운 나날을 보낸 뒤에야 꽃이 피듯이.

계기는 단순했다.

그저 제 자신이 특별하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을 따름이었다. 아카데미에 입학할 당시까지만 해도 꿈에 부풀어 있었지만, 이제는 알았다.

천재와 수재 사이에 놓인 벽은 높고도 두터웠다.

범재가 노력으로 수재를 따라잡을 수 있을지언정, 수재가 천재를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했다. 손바닥이 찢어지도록 검을 휘둘러도 냉엄한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셀린은 사랑하는 사내의 옆자리를 포기해야만 했다.

그곳은 너무나 빛나는 이들의 차지였으니까.

밀물처럼 밀려드는 우울감이 소녀를 질식시켰다. 익사 직전에, 셀린은 누군가를 만났다.

어떤 여인이었다.

대화의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았다. 어렴풋한 기억만이 안개처럼 머릿속을 부유했다.

단지 정신을 차렸을 무렵, 셀린의 부산스럽던 심장은 잡념을 말끔히 털어낸 듯 가벼워졌다. 검이 전보다 날카로워진 것은 물론이었다.

아니, 이제 도끼인가.

그 까닭을 알 수 없다는 점만이 거슬릴 따름이었다.

그렇게 고개를 갸웃하며 아카데미로 돌아온 이후, 셀린이 처음으로 마주한 이는 익히 알고 있던 얼굴이었다.

“셀린 언니!”

창백한 피부와 칠흑의 머리카락이 묘한 대비를 이루는 소녀였다.

그 이름은 리아 페르쿠스, 셀린의 또 다른 소꿉친구였다.

또한 사랑하는 사내의 여동생이기도 했는데, 유독 오빠 사랑이 지극한지라 어린 시절부터 다툰 적도 많았다.

그래도 오랜 세월 쌓인 정리를 무시하기는 힘들었다.

리아는 귀신이라도 보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종종거리며 다가와 목소리를 높였다.

“어, 어, 어디 갔던 거야?!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더니! 레토 오빠는 별 일 아니라고만 하고……!”

아무래도 괜한 걱정을 끼친 모양이었다.

셀린은 그저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수밖에 없었다.

“아하하, 미안… 걱정했어?”

“당연하지! 어떻게 사람이 말도 없이 사라져?”

리아가 진정할 때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셀린은 볼을 부풀린 채 ‘나 삐졌어’라는 티를 팍팍 내는 소녀를 한참이나 달래야 했다. 이러나저러나 막내는 막내라는 감상을 품으면서.

짧은 앙금을 털어낸 두 사람의 걸음이 곧 나란해졌다.

자연스레 근황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필연이었다.

“셀린 언니, 우리 오빠는 만나봤어?”

그 말에 셀린의 멍한 시선이 리아를 향했다.

질문의 의도조차 짐작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리아는 어이가 없다는 기색이었다.

“이안 오빠 말이야! 셀린 언니가 사라져서 얼마나 걱정했다고.”

“……아, 그래?”

그 둔한 대답에 리아의 볼이 다시금 부풀었다.

오빠만 얽혔다 하면 머리가 이상해지는 리아였다. 당연히 오빠의 걱정은 일분일초라도 일찍 떨어주고 싶을 터였다.

불행하게도 셀린은 이를 뒤늦게 깨닫고 말았다.

느닷없이 사랑하는 사내의 이름이 언급되자 당황했던 탓이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안이 자신 따위를 신경 쓴다는 사실이 얼떨떨했다.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못난 소꿉친구 따위를 말이다.

또 다시 질척이는 진흙이 심장의 혈관을 틀어막는 듯했다. 늘 활기차던 황갈색 눈동자가 칙칙한 빛으로 물들었고, 내리깔린 시선이 흐릿해졌다. 그리고 살짝 입술을 깨물기까지.

누가 보아도 이상한 반응이었다. 오빠에 관련된 일만 아니었다면, 리아도 진작 눈치를 챘어야 할 만큼.

“당연하지! 우리 오빠가 언니 소식 듣자마자 당장 북부에서 달려오기까지 했… 어라?”

그러나 리아의 분노는 마저 토해지지 못했다.

정면에서 다가오는 그림자를 본 직후였다. 저벅저벅 걸어 거리를 좁혀오는 사내가 하나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에 금빛 눈동자, 너무나 익숙한 색조였다.

찌푸려졌던 리아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더불어 상체를 기울이며 눈을 반짝이기까지 할 정도였다.

영락 없이 주인을 만난 강아지 같은 모양새였다. 이대로 두면 꼬리 대신 엉덩이라도 흔들지 않을까.

그 쌀쌀맞은 리아를 저렇게 만들 수 있는 인물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이를 깨달은 셀린은 한숨과 함께 살짝 시선을 올렸다.

과연 예상대로였다.

이안 페르쿠스, 그가 다가오고 있었다.

까닭은 알 수 없었지만, 셀린은 기가 죽어 고개를 푹 떨구어야 했다. 괜히 사내를 정면에서 마주하기가 힘들었다.

반면 리아는 곧장 셀린을 버리고 이안에게 달려갔다.

“오빠, 그동안 어디 있었어? 어제는 보이지도 않더니… 참, 그러고 보니 셀린 언니가 돌아왔어!”

그렇게 조잘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사내의 목소리는 일정 섞여 있지 않았다. 오로지 리아만이 일상을 나누는 대화가 이어졌다.

이 시점에서 셀린은 위화감을 느꼈다.

리아가 오빠를 사랑하는 만큼이나 이안 또한 제 여동생을 무척이나 아꼈다. 리아를 보자마자 인사를 나누거나, 최소한 셀린이 돌아왔다는 소식에 무언가 반응을 보여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사내는 아직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을 뿐이었다.

설마, 하고 셀린이 고개를 들어 사내와 시선을 마주한 순간.

새하얀 벼락이 척추를 관통했다.

찌르르, 흐르는 전율에 셀린은 정신을 차리리가 힘들었다.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황금빛 눈동자가 유심히 셀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래, 그야말로 들여다보았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근육과 혈도, 체내에 흐르는 마력까지 그 시야를 벗어나지 못했다. 셀린은 그 사실에 본능적인 공포마저 들었다.

압도적인 격차였다.

차라리 예전이었다면 모르고 지나갔을지도 몰랐다. 당장 며칠 전만 하더라도 그랬겠지.

하지만 발돋움을 하고 나니 비로소 보이는 경치가 있었다.

아득히 멀고 높은 정상으로의 길.

혹시 저 사내는 그 위에 도달한 걸까?

셀린의 안색이 대번에 창백해졌다. 뒤이어 몸을 파르르 떨자, 사내의 눈동자에 흐릿한 이채가 스쳤다.

멈춰있던 호흡이 되돌아온 것은 그때였다.

셀린이 헐떡이는 숨소리를 내뱉는 사이, 사내는 무심한 눈길을 리아에게로 향했다.

소녀가 한창 신이 나서 제 자랑을 늘어놓던 와중이었다.

“그래서 말이야, 내가 성국에서 난 마수 사체를 인수 받기로 했거든? 물량이 워낙 많아서 처치 곤란이었던 모양인데, 내가 누구야? 마수 토벌 직후 일거리가 없어진 용병들을 고용해서…….”

“리아.”

지독히도 무심한 호명이었다.

그 지친 음색에는 마치 겨울 벌판의 서리처럼 뼈 마디마디를 파고드는 울림이 있었다. 리아는 난생 처음 듣는 오빠의 목소리에 몸을 움찔 떨었다.

그리고 멍하니 사내의 눈동자를 응시하기를 몇 초.

점차 리아의 낯빛에 혼란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개방된 장소에서 사업 이야기를 떠들지 말아라. 채신머리 없어 보일 뿐더러, 기밀 유지에도 좋지 않으니까. 누가 널 노리기라도 하면 어쩔 셈이냐?”

합리적인 지적이었다.

예전과 달리 이안은 유명인사가 되었고, 그가 애지중지하는 여동생은 이용가치가 높았다. 호위를 대동하지 않고 일정을 수행하는 것조차 지양해야 정상이었다.

심지어 앞으로 있을 행보를 공공연히 떠들기까지 하다니.

이에 대해서는 문제의식을 가져야 마땅했다. 그럼에도 리아는 무언가 마뜩잖다는 듯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하, 하지만……”

“민폐다.”

그 한 마디가 결정타였다.

리아는 충격으로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그러든 말든, 사내는 무관심한 얼굴이었다.

“힘도 없는 주제에 이곳저곳 돌아다니지 마. 그리고 그 마수 사업도 때려치우고… 네가 도움이 될 길은 그 정도가 유일하니까.”

송곳 같은 당부를 끝으로 사내와 소녀가 엇갈렸다.

셀린은 그 대화를 들으며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언제나 생각하는 바였지만, 저 미래에서 온 ‘이안 페르쿠스’는 입이 너무 험했다. 굳이 그래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을 만큼.

그리고 두려웠다.

사내의 평가는 언제나 냉정하고 객관적이었다. 저 칼날 같은 말귀가 겨눌 다음 상대는 바로 자신이었다.

감당할 수 있을까.

무능하다는 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 이미 자책만으로도 셀린의 심장은 너덜너덜해진 지 오래였는데.

하지만 사내는 의외로 혹평을 남기지 않았다.

“이제 좀 익숙해졌나?”

어느덧 지척에 다가온 사내가 던진 물음에, 셀린은 일순 답변을 하지 못했다.

짧은 머뭇거림이었다. 사내의 시선을 따라가기만 해도 질문의 의도는 명확했다.

등 뒤에 동여매두었던 배틀 엑스.

셀린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어느덧 셀린의 말투는 경어로 격상되어 있었다.

예전과는 달랐다. 이미 셀린은 사내가 지닌 실력의 일부를 엿본 뒤였다.

무인으로서 격이 다른 인물이었다.

그러한 상대에게 함부로 반말을 쓸 만큼 셀린은 담이 크지 못했다.

물론 사내는 셀린이 반말을 쓰든 존댓말을 쓰든 관심조차 없어 보였다.

단지 셀린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며, 격려의 말을 전했을 뿐이었다.

“그래, 열심히 하도록.”

기대도 하지 않던 칭찬이었다.

아니, 애초에 저 사내가 누군가를 칭찬을 한다는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셀린은 한동안 우두커니 서서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막 호평을 받은 참이었지만, 영 실감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환청을 들은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정작 무어라 소리를 내는 이는 따로 있었다.

“……웃기지 마.”

으득, 하고 이를 갈며 내뱉어진 음성이었다.

셀린과 사내의 시선이 동시에 그 진원지를 향했다. 그곳에는 두 주먹을 꽉 쥔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리아가 존재하고 있었다.

등 뒤를 노려보는 소녀의 표정이 표독스럽기 짝이 없었다.

“웃기지 마, 당신 누구야… 도대체 누구길래 우리 오빠 행세를 하는 거냐고! 우리 오빠는 절대로 나한테 그따위 말 안 해!”

결국 눈치 챘구나.

셀린은 덜컥, 하고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당장이라도 리아에게 진실을 밝히고 싶었지만, 이곳은 아카데미였다.

주위에 행인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벌써부터 수군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히고 있었다. 셀린은 당황해서 시야가 핑핑 도는 느낌이었다.

으아, 어떻게 해야 하지.

그 해답은 셀린이 아닌 사내의 입으로부터 나왔다.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진실이 아닌 것은 아니지.”

명백한 도발로서, 말이다.

리아의 불타는 시선에 맞서, 사내는 담담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내가 틀린 말을 했나? 설령 내가 누구든 간에, 네가 하는 짓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건 분명한데.”

“그건, 그건… 아직 모르는 일이잖아!”

“어린아이처럼 굴지 마라, 꼬맹아.”

그 무렵에 사내는 다시금 등을 돌려 리아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저벅저벅,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모두의 시선이 사내와 리아에게 집중되었다.

처음에는 노기등등하던 리아의 기세도 점차 꺾여가고 있었다. 사내가 거리를 좁힐 때마다, 리아는 분한 듯 입술을 짓씹으면서도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사내의 눈빛에서는 일말의 흔들림도 읽어낼 수 없었다.

강한 확신, 그것은 강한 설득력을 부른다.

“우리는 네 소꿉장난을 일일이 받아줄 시간이 없어. 장사? 자본이야 많을수록 좋겠지. 하지만 당장 날붙이가 춤을 추고 피가 비처럼 쏟아지는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그, 그야 어떻게든…….”

더듬거리며, 리아는 필사적으로 변명을 주워섬기려 했다.

옆에서 보기 안쓰러울 만큼 애를 쓰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인간의 감정 따위 가지지 못한 괴물이었다.

“그럼 해봐.”

그게 무슨 소리냐고, 리아가 되묻기도 전에.

콱, 하고 사내의 발길질이 소녀의 명치를 강타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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