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9화 〉 6. 존재 증명(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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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각거리는 말발굽 소리가 여행의 흥취를 돋운다.
도시를 떠나 길목에 접어들자, 낯선 경치와 행인들이 마차를 맞이했다. 제국과 달리 회색 정복을 입고 있는 위병들은 가슴에 십자가를 새기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외국에 방문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얼마 전까지 나는 시골 자작가의 차남에 불과했다. 굳이 외국을 들릴 까닭도 없었고, 한창 수련에 열중하던 때라 그럴 만한 여유도 없었다.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후에는 바쁜 학제를 따라가느라 애를 써야 했고 말이다.
그동안 딱히 외국에 나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도 한몫했다. 어차피 어딜 가든 도시는 엇비슷하리란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성국에 도착해 보니 알겠다.
어째서 시야를 넓히고 싶다면 여행을 다니라고 하는지.
건축 양식부터 시작해서, 사용하는 언어와 풍습까지도 달랐다. 지식으로는 이미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그 한가운데에 서니 얼떨떨한 기분마저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마차의 마부석, 내 옆에 앉아 말을 몰고 있던 유렌이 물었다.
“이안, 성국 말은 좀 할 줄 아나?”
“시엔델 어(?) 말이지? 주 외국어 전공이긴 한데.”
그러자 유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간만에 돌아오는 고향이었으나, 그의 낯빛은 내내 못마땅하기만 했다.
갑작스러운 성국행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이미 나와 동행하며 수련 시간을 많이 뺏긴 뒤였다. 또 다시 고아원에서 봉사 활동을 해야 할 판이니, 그의 심기가 편할 리가 없었다.
이러나저러나 유렌은 검을 좋아했으니까.
“그나마 다행이네. 고아원의 꼬맹이들은 제국어를 도통 알아듣지 못하거든.”
“아이들이 제국어를 배울 이유가 어디 있다고?”
“왜 없어? 배워두면 얼마나 유용한데… 적어도 도시 나가서 굶어죽진 않을걸. 그래서 일부러 선생까지 초청했건만.”
그러면서 유렌은 쯧, 하고 혀를 찼다. 아무래도 투자에 비해 별다른 성과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하여튼, 누님은 성질이 너무 급해서 문제라니까. 일주일 전에 일정을 통보하면 어떡해?”
나는 유렌의 툴툴거림에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여야 했다.
일단은 나도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이었으니까. 엄밀히 따지자면 미래에서 온 ‘나’의 잘못이긴 했지만, 내게도 도의적 책임은 존재했다.
미래의 ‘나’는 나를 돕고자 행동한다. 그러다 벌어진 사건이었으니, 나 또한 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니, 나를 도우려 한 건 맞나?
그렇게 내가 곰곰이 고민에 잠겼을 무렵이었다.
“혹시나 불편하거나 궁금한 점이 생기면 제깍제깍 말해. 일단 손님이니까, 대접은 해줄 테니.”
다소 불만스러운 어조였으나, 나를 향한 배려심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나는 그 말에 쓴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마부석 옆자리에 앉아 가는 것만으로 충분해.”
그러자 큭, 하고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
당연히 진원지는 유렌이었다. 그는 어느덧 어처구니 없다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너도 참 고생이다.”
많은 감상이 함축된 말이었다.
나는 말없이 시선을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에 접어드는 초원에는 들꽃들이 피어 있었다. 이처럼 평화로운 풍경인데.
내 눈이 흘깃 등 뒤를 향했다.
여러 명이 타고 있을 그곳에서는 진한 정적만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 분위기를 견디다 못해 도망친 것이다.
일행이 상상 이상으로 많아졌다는 점이 패착이었다.
우선 리아까지는 괜찮았다. 성녀 또한 가족을 소개하고 싶다는 논리에는 어찌저찌 납득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가 문제였다.
느닷없이 셀린도 성국행에 동참하겠다는 의사를 피력해 오기 시작했다.
당연히 성녀는 완곡한 거절의 뜻을 밝혔으나, 셀린이 들고 온 궤변은 가관이었다.
“나도 이안 오빠의 가족이나 다름없잖아?”
무슨 헛소리야, 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당시의 셀린은 나와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팔에 힘을 주면 얼마든지 내게 압박을 가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떨쳐내고 싶다면 얼마든지 떨쳐낼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얼마 전에 있었던 레토와의 대화를 떠올리고 말았다. 최근 내가 셀린에게 너무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는, 그 통렬한 지적에 반성하기로 한 지가 얼마 전이던가.
또한 셀린의 핑계가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
‘가족’이라니, 하필 내가 최근 가장 신경 쓰고 있는 낱말이었다.
결국 셀린은 나의 암묵적 동의 하에 성국행에 합류했고, 이때부터 성녀의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성녀의 기분을 나락으로 떨어트린 결정적 계기는 바로 엘시 선배의 등장이었다.
엘시 선배는 ‘우연’이라고 말했지만, 결코 우연일 리가 없었다.
더불어 엘시 선배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레이놀드 씨의 등장까지.
아직도 레이놀드 씨가 나를 ‘조카사위’라고 불렀을 때의 풍경이 선명했다. 성녀는 물론이고, 리아와 셀린도 낯빛이 싸늘해지던 아픈 기억이 났다.
심지어 그 레이놀드 씨는 뻔뻔스럽게도 지금 마차의 뒤칸에 탑승해 있었다.
어어, 하는 틈에 합류한지라 말릴 틈도 없었다.
나는 지끈거리는 두통을 애써 가라앉히며 중얼거렸다.
“도대체 왜 온 걸까, 레이놀드 씨는…….”
“나는 이미 이해를 포기했거든. 혹시 알게 되면 귀띔 좀 해줘.”
별종 중의 별종인 유렌도 저리 말할 정도였다. 나로서도 레이놀드 씨가 왜 저러는지 행동의 저의를 알기 힘들었다.
결국 나는 답답한 마음에 고개를 내저었다.
“인간관계는 왜 이리 어려운 걸까? 전투는 도끼만 잘 휘두르면 되는데.”
“넌 인간관계도 그렇게 해결하잖아.”
나는 짜증 어린 눈빛을 유렌에게 보냈다. 물론, 유렌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지만.
“그나마 넌 사정이 나은 거야. 네 주위에는 호의를 품은 사람이 더 많잖아.”
“혹시 네 이야기냐?”
“아니, 누님 이야기. 성국에는 적이 많거든.”
흐음, 하고 나는 침음을 삼켰다.
그러고 보니, 레오릭이 죽기 직전에 ‘아인델 총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다. 예전에 성녀가 지나가듯 언급한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나는 보다 자세한 정보를 얻기 위해 질문을 골라냈다.
“아인델 총주교?”
그 말에 유렌의 시선이 흘깃 나를 향했다. 그 눈동자에는 의외라는 빛이 서려 있었다.
“그래, 그 인간도 그중 하나지. 우리 누님께서는 교리 해석을 보다 폭넓게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아인델 총주교는 정반대거든.”
“빡빡한 인간이네.”
“원래는 그렇지 않았어.”
나는 무어라 말을 덧붙이려다, 그만 다물었다. 유렌은 그러든 말든 제 말을 이어갈 뿐이었다.
“아들을 잃고 나서 그렇게 됐지.”
“어쩌다 죽었길래?”
“교리 재판.”
침묵 속에서, 다그닥거리는 말발굽 소리만이 울려 퍼진다. 이제 고아원까지는 곧이었다.
“아인델 총주교의 아들은 금지된 지식을 탐했어. 그래서 죽은 거야.”
차마 자세한 사정을 캐묻지는 못했다. 그렇게 길목은 고아원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새로운 사건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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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영합니다, 성녀님. 그리고 인류의 영웅이신 이안 님과 그 친우 여러분.”
고아원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를 맞이한 인물은 나이가 지긋한 수녀였다. 그 자글자글한 주름에서 약자들을 위해 헌신한 세월이 엿보이는 듯했다.
나는 ‘인류의 영웅’이라는 과분한 호칭에 쩔쩔 매면서도,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고아원을 둘러보았다.
길포드 고아원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시설은 훌륭했고, 건물 중에는 새로 지은 것도 보였다. 우리를 빙 둘러싸듯 구경하고 있는 원아들의 수도 꽤 많아 보였지만, 그중 배를 곪거나 헐벗고 있는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과연 성녀를 배출한 고아원다웠다.
성녀와 유렌 또한 알게 모르게 신경을 써 주었을 테지만, 그 이상으로 성국이 관심을 기울인 티가 났다. 그야 천신교의 위신이 달린 일이니 당연하겠지만.
리아와 셀린은 상상 이상으로 깔끔한 시설에 당황한 듯했다.
“언니, 잘하면 내 방보다 좋겠는데?”
“그야 네 방은 이안 오빠가 준 물건들로… 으극?!”
정작 셀린은 리아가 옆구리를 꼬집는 바람에 감상조차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반면 성녀는 차분한 기색이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겹겹이 쌓인 곳이었으나, 감회가 새롭다는 반응조차 보이지 않았다. 담담히 주위를 훑어보다가, 원장 수녀에게 물었을 따름이었다.
“원장 수녀님께서 바뀌셨군요. 또, 시설도 많이 달라졌고.”
“네, 이제는 성국이 직접 운영하는 곳이니까요. 그러면서 많은 변화가 있었죠.”
그럴 만하다는 듯 성녀는 몇 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이내 흔해빠진 안부의 말을 나누었다.
“혹시 고아원에 문제는 없나요? 무언가 부족한 점이라든지…….”
“아유, 그럴 리가요. 무려 성녀님께서 지내시던 곳이 아닙니까. 천신의 보살핌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가득합니다.”
그야말로 판에 박은 듯한 인사치레였다.
성녀도 딱히 이 대화를 더 이어나가고 싶은 마음은 없어 보였다. 이보다는 더 실용적인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테니까.
느닷없이 내가 끼어든 것은 그때였다.
“정말 없습니까?”
다급히 던진 질문이었다.
목청이 다소 높았기 때문에, 좌중의 시선이 단번에 내게 집중되었다. 물론 이는 원장 수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당황한 노파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혹시나 최근 아이들이 사라지고 있다든지…….”
“아이고,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을.”
원장 수녀는 쩔쩔 매면서도 확신을 담아 그렇게 답했다. 그 흔들림 없는 목소리에서는 한 치의 거짓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곳은 성국의 관리를 받는 고아원입니다. 당연히 그런 참담한 일이 벌어질 리가 없죠. 설령 벌어졌더라도 당장 보고가 올라가 성기사들이 파견됐을 겁니다.”
명료한 설명이었다. 이대로 넘어가도 무방할 정도로 깔끔한 해명이었으나, 그럼에도 나는 다시금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라면 다른 것도 괜찮습니다. 최근 무언가 기이한 일이 벌어진다든가……!”
“이안!”
결국 나를 만류한 쪽은 원장 수녀가 아닌 성녀였다.
그녀는 이미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의 무례에 단단히 화가 난 모습이었다.
“이게 무슨 실례에요! 이곳은 성국이 관리하는 고아원이라고요. 혹시 성국의 권위를 믿지 못하겠다는 말인가요?”
“아니, 뭐…….”
나는 일부러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도리어 당황한 이는 원장 수녀였다.
“괘, 괜찮습니다. 성녀님. 이안 님께서는 지난 몇 달 내내 암흑교단과 싸우셨다고 들었습니다. 사전에 동선이 노출되었을 수도 있으니, 불안한 마음도 이해합니다.”
원장 수녀가 나를 적극적으로 옹호하자, 성녀의 기세도 한결 누그러지고 말았다.
아니, 사실은 이를 바라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무례를 저지르고도 나와 성녀의 체면이 모두 상하지 않는 길은 이뿐이었으니까.
성녀는 미안함이 한가득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다시 말씀드리지만, 괜찮습니다. 후후… 오히려 자신 있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 고아원에서만큼은 그러한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으리란 사실을!”
나는 째릿, 하고 나를 노려보는 성녀의 시선을 마주하는 대신 딴청을 피웠다.
이만하면 됐다. 원장 수녀는 무척이나 자신만만해 보였고, 나중에 그 까닭을 캐물어 보면 그만이었다.
정작 내가 기대하고 있던 효과는 따로 있었다.
성녀와 원장 수녀가 화기애애한 이야기를 나누며 고아원에 들어서는 사이, 나는 묘한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주위에는 아이들이 가득했다. 난데없는 소란에 놀라서 달려왔으리라.
그중에서도 유독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사내아이가 하나, 그리고 그 옆에 붙어 불안한 눈빛을 하고 있는 여자아이가 하나.
나는 슬쩍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됐다. 자고로 아이들은 어른이 느끼지 못하는 부분까지도 감지하는 법이었으니까.
망막에 두 사람의 모습을 깊이 새긴 후, 나는 일행을 따라 고아원으로 들어서려 했다. 그러다 입구에 설치된 표지석에 눈이 닿았다.
그곳에는 고아원 설립에 기여한 이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건립 일자가 최근인 것으로 보아, 고아원이 성국의 관리를 받게 된 이후 재건축을 한 모양이었다.
명단을 읽어 내려가던 내 눈동자가 불현듯 우뚝 멈추었다.
‘총주교 아인델’.
흠, 하고 침음을 삼키며 나는 다시 걸음을 내딛었다.
아무리 봐도 수상했다. 이 고아원.
그렇게 고아원에 본격적으로 들어서기 직전, 갑작스레 내 옷깃을 꾹꾹 잡아당기는 힘이 느껴졌다.
나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고, 그곳에는 고깔모자가 하나 자리하고 있었다.
아니, 그 아래에 초조한 낯빛을 한 소녀가 하나.
“자, 잠깐만… 주인님, 우리 단 둘이서 이야기 좀 할까?”
엘시 선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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