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1화 〉 6. 존재 증명(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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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하지 않아요?”
성녀의 침실은 넓고 아늑했다. 이만한 크기의 방이 고아원에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위화감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가구들도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깔끔했다. 나와 성녀 사이에 놓인 다탁 또한 마찬가지였다.
향긋한 찻내음이 코를 간지럽힌다.
값비싼 차는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싸구려 같지도 않았다. 성녀가 나를 대접하는 방식은 이처럼 절묘한 면이 있었다.
사치와 실례 사이.
성직자의 본분을 지키면서도, 손님 대접에 충실한 여인이었다. 심지어 출신 고아원마저 이러한 원칙을 지키는 것을 보면, 어린 시절부터 배워온 철칙일지도 몰랐다.
누구에게도 비난을 받지 않으려면 균형 감각이 중요했다.
내가 볼 때 성녀의 진정한 강점은 이러한 면에 있었다. 명분과 실리 사이를 절묘하게 넘나드는 성녀의 정치력은 본능의 영역에 가까웠다.
물론 나를 대할 때만큼은 예외였지만.
당장 지금만 하더라도 성녀는 제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차게 식은 시선이 나를 쿡쿡 찌를 때마다, 내 눈동자는 슬쩍 측면을 향했다.
너무하다니, 가슴 아픈 지적이었다.
나는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일부러 시치미를 뗐다.
“무슨 말씀이신지…….”
“한 번만 더 그래 봐요. 나 진짜 화낼 테니까.”
이미 화내고 있으면서.
그렇게 반론하고 싶었으나, 이 판의 주도권은 성녀가 쥐고 있었다. 결국 나는 성녀의 싸늘한 침묵을 이겨내지 못했다.
“네, 제가 잘못했습니다.”
“뭘 잘못했는데요?”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는 물음이었다.
예전에 레토가 내게 해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나름 진지한 조언이었던 것 같은데.
‘이안, 여심은 복잡한 거야… 잘못했다고 해도 화가 풀리지 않거든. 그럼 어떻게 하는 줄 알아?’
‘관심 없는데.’
‘그냥 들어, 새끼야.’
나는 새록새록 떠오르는 추억 속에서 깊은 감사를 느꼈다. 당시에는 레토가 또 귀찮은 소리를 한다고 생각했는데, 살다 보니 이보다 중요한 이야기가 몇 없었다.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었다.
‘뭘 잘못했냐고 물어 봐. 화가 나기는 했는데, 또 자기 입으로 말하기에는 부끄럽거든… 고작 그까짓 걸로 화를 낸 게 우습잖아.’
그래서 이럴 때는 어떻게 하라고 했더라.
몇 초 동안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린 끝에, 나는 가까스로 답안을 도출해 낼 수 있었다.
“그, 서운하게 해서 미안…….”
“그래요!”
성녀는 그 즈음에서 참지 못하고 책상을 쾅, 하고 내려쳤다.
보다 구체적인 죄목을 읊으려던 나는 흠칫 굳어버리고 말았다. 성녀는 분을 참지 못하고 손바닥으로 책상을 탁탁 내리치며 말했다.
“왜, 왜 멋대로 일행이 늘어나는데요?! 여동생까지는 이해하겠어요. 그런데 소꿉친구에, 대놓고 꼬리치는 암캉아지에… 심지어 나 없는 사이 서로 껴안고 난리가 났다면서요?”
타박이 이어질수록 내 입에서는 진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솔직히 말해 너무하기는 했다. 성녀를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취급한 셈이었으니까.
그러한 취급에 성녀도 많이 화가 난 모양이었다. 분을 이기지 못하고 탁자를 탁탁 내리치는 꼴이, 마치 아기새가 버둥거리는 모양새라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물론 이를 입에 담을 만큼 나는 용감하지 못했지만.
식은땀 한 줄기가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혹시, 바보에요? 눈치 없어요?! 여자가 단 둘이 고향으로 내려가자 하면 무슨 뜻인 줄 몰라요?!”
“죄송합니다, 성녀님.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는 사정이……”
“몰라요!”
흥, 하고 성녀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눈을 감고 볼을 부풀린 모습이 작위적이면서도 사랑스러웠다. 삐진 티를 한도까지 내는 모습이었다.
달래달라는 뜻이겠지.
그 의도는 알겠으나, 여자를 달래본 경험이 전무한 나로서는 난감한 요구였다.
엘시 선배는 쓰다듬으면 됐고, 리아는 뺨에 뽀뽀를 하면 됐고, 셀린이야 장난을 치다 보면 어떻게든 풀리는 사이였으니까.
성녀는 무얼 해야 좋아해 줄까.
성추행?
지극히 실례되는 발상이었지만, 통할 것 같은 전략이라는 점이 놀라웠다.
그러는 와중에도 성녀의 ‘나 삐졌어’ 티 내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힐끔힐끔 내 눈치를 살피다가도, 나와 눈이 마주치면 어김없이 콧소리가 흘러나왔다.
“흥!”
이럴 때는 마냥 애 같다니깐.
결국 나는 쓴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그럼 소원이라도 하나 들어드릴까요?”
“……소원?”
다행스럽게도 반응이 있었다.
성녀는 고민에 잠긴 듯 흐음, 하고 침음을 삼켰다. 그러면서도 아직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고작 이 정도로 화를 풀어줘도 되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 듯했다.
더욱 강경하게 몰아붙여야 할 시점이었다.
“네, 그동안 신세를 많이 지기도 했고… 소원 정도야 얼마든지 들어드려야죠.”
“그야 뭐, 그렇긴 한데요…….”
성녀가 아닌 척 하면서 넘어오고 있었다. 슬슬 화를 풀어주겠다는 신호였다.
나는 그에 호응하여 말을 이어갔다.
“오늘은 실례도 많았으니까요. 다음에 좋은 곳이라도 가죠.”
그러자 성녀는 흐음, 흐음, 하고 묘한 소리를 내며 고심에 잠긴 체를 했다.
그야말로 ‘체’에 불과해서, 어차피 그 대답이 어떠리란 사실은 이미 잘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나는 다소 처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원하던 대답이 돌아올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좋아요.”
마치 자비라도 베푸는 듯한 어조였으나, 개의치 않기로 했다. 기쁜 마음을 내색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역력히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 증거로 성녀는 우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목소리에서는 은은한 콧노래가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럼 다음에 좋은 곳 데려다 줘요. 단 둘이서,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곳으로.”
무척이나 소박한 소원이었다.
오히려 말하자면, 대개의 사내들이 평생 소원으로 삼을 만한 이야기였다. 성녀와 단 둘이서 오붓한 시간을 보내다니.
나로서도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자연스레 내 입에서 순응의 말이 흘러나왔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단 둘이에요.”
그럼에도 성녀는 아직 불안한지, 재차 내게 강조했다.
“그리고 아무도, 그 누구도 방해하지 않는 곳이어야 해요. 느닷없이 식칼을 들고 누가 쳐들어오거나, 적군이 야음을 틈타 기습을 하는 곳도 안 돼요.”
묘하게 구체적인 요구였다. 나는 그 예시들을 들으며 헛웃음을 머금어야 했다.
“상식적으로 누가 그런 곳을 갑니까?”
물론 성녀의 반응은 떨떠름하기만 했다.
내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릴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나를 못마땅한 눈빛으로 보고 있던 성녀는, 이내 침음을 삼켰다.
마침 떠오른 의문이 있는 듯했다.
의아한 눈빛이 성녀를 향했다. 망설임은 길지 않았고, 성녀는 내게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요즘 무슨 일 있어요?”
일이라, 그야 잔뜩 있었다.
편지에 언급된 ‘배신자’의 존재만으로도 머리털이 곤두설 지경이었으니까. 심지어 ‘가족’이라는 말까지 함께 언급되어 있지 않았던가.
당장 짚이는 사람만 해도 한두 명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섣불리 성녀에게 속내를 털어놓지 못했다. 성녀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아이들을 돌보던 성녀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즐거워 보였다. 벌써부터 그 행복을 부술 필요가 있는 걸까.
그렇게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 성녀의 태도는 더욱 신중해졌다.
“오늘 아침만 해도 그렇잖아요. 원래 그렇게 무례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결국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털어놓아야 할 정보였다. 미리 상담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정작 문제는 따로 있었다.
“우리 중에 배신자가 섞여 있는 것 같습니다.”
“……? 네, 우리 모두 소중한 동료죠.”
“편지에 따르면, 고아원에서 사건이 벌어진다더군요.”
“고아원이 시설이 좋은 편이긴 해요.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아마 성국이 신경을 써 준 덕이겠죠?”
대화가 미끄러진다. 맞물리는 지점이 없다 보니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이미 오래 전에 한 번 겪어본 적 있는 현상이었다.
미래에서 온 편지의 내용은 오직 나만이 읽을 수 있다. 이에 대한 정보를 발설하려고 해도, 상대에게 전달되는 순간 별개의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몇 차례의 시도 끝에 나는 그 변함없는 사실만을 확인하게 되었다.
성녀의 의뭉스러운 낯빛을 마주하며, 내가 전할 수 있는 유일한 정보는 하나뿐이었다.
“편지가 왔습니다.”
이 정도의 정보까지는 왜곡이 되지 않았다. 예전에 레토와 상담했을 때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심각해지는 성녀의 낯빛을 보며, 나는 몇 마디를 덧붙였다.
“아시잖습니까. 미래에서 온 인격이 드러날 때가 언제인지.”
“술 많이 먹으면 그러잖아요?”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잠깐의 간극은 차마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내가 의식을 잃어야 미래에서 온 인격이 부상하고, 또 그 주된 수단이 음주였으니.
성녀의 표정에 불길한 조짐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고아를 돌볼 때와 비교하면, 참혹한 균열이었다.
“그럼 설마, 이곳에…….”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조사해 보고 있어요.”
편지의 내용과 달리, 내가 스스로 조사해 알아낸 정보는 공유에 제한이 없었다. 더불어 이러한 단서들이 모여 합리적인 추론의 단계까지 가면, 편지에 나온 핵심적인 내용을 읊어도 됐다.
아직은 ‘배신자’를 운운할 때가 아니라는 소리였다. 또 한편으로는 언젠가 성녀에게 이를 털어놓아야 한다는 소리이기도 했지만.
우선은 정보 수집이 더 중요했다. 나는 한결 진지해진 어조로 물었다.
“그래서 궁금한 점이 하나 있는데… 혹시 ‘상단’에 대해 들어보신 적 있으십니까?”
“상단이라니요?”
“고아원에 자주 들린다고 하더군요. 아이 하나의 말을 들어보니, 아이들을 자주 데려간다고 하던데.”
성녀는 잠시 고민에 잠긴 듯 미간을 좁혔다. 그마저도 잠깐, 내가 바라마지 않던 정보가 여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고아원에는 협력 상단이 하나 있어요. 그곳에서 물자를 정기적으로 배송할 뿐만 아니라, 원아들의 입양까지 중개하죠. 아무래도 외진 곳에 위치해 있다 보니…….”
“그러한 업무를 전문적으로 하는 상단입니까?”
“아니요, 그렇지는 않다고 들었어요. 다만 성국의 상단들은 겉치레라도 사회 공헌 활동 한두 개쯤은 하고 있으니까요. 아마도 본업은…….”
톡, 톡. 탁자를 두드리는 가녀린 검지가 매력적인 소리를 냈다.
“마수 산업.”
그래, 이래야지.
나는 성녀의 말을 듣자마자 박수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나는 리아와 함께 마차에 올랐다. 리아도 마수 시체를 취급하고 있으니, 접촉이 더욱 용이하리란 판단 때문이었다.
리아는 사정도 모르고 나와 단 둘이 떠나는 여행에 신이 나 있었다.
“흥, 이제야 여동생이 눈에 좀 들어오시나 봐?”
겉으로는 새침한 체를 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봐야 부풀어 오른 가슴을 숨길 수는 없었다. 살짝 상기된 볼이 리아의 기대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리아에게 사죄했다.
“미안해, 요즘 신경 많이 못 써줘서. 그래도 앞으로 며칠 동안은 단 둘이서…….”
마부석에서 뜬금없는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안은 좀 편안한가?”
“오빠야!”
리아는 갑작스런 중저음에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 움츠러든 어깨와 흔들리는 눈동자 잽싸게 내 품을 파고드는 동작이 그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나 또한 놀라긴 했지만, 리아의 반응이 꽤 극적이다 보니 도리어 진정이 되었다.
그나저나 깜짝 놀랐을 때는 대개 ‘엄마’를 부르지 않나. 특이하게도 리아는 나를 부르고 있었다.
어느 쪽이든 리아가 잔뜩 놀란 참이었다.
오라버니가 돼서 앞장 서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나는 곧장 빼꼼히 창문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내달리는 마차의 앞쪽에서, 익숙한 사내의 그림자가 보이고 있었다.
갈색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
나는 얼빠진 목소리를 내는 수밖에 없었다.
“……레이놀드 씨?”
“마침 나도 그쪽에 볼일이 있어서 말일세… 며칠 동안 잘 부탁하네, 조카 사위.”
차마 내뱉지는 못했지만, 목젖까지 치닫는 감상이 하나 있었다.
당신이 왜 이곳에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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