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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423화 (423/649)

〈 423화 〉 6. 존재 증명(11)

* * *

이목이 집중된다는 것은 꺼림칙한 일이다.

무대나 연단 위에 서는 이들이라면 또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얼마 전까지 시골 자작가의 차남에 불과했고, 타인의 시선에 익숙하지 못했다. 쏟아지는 관심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걸음을 옮기기만 해도 주위에서 쑥덕이는 소리가 들려오는 삶이라니.

어째 정체를 숨겨도 달라지는 점은 없었다. 오히려 후드로 얼굴을 감추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를 유발하고 있는 듯했다.

하기야 그럴 만도 했다.

느닷없이 등장한 두 용병이 제국 황실의 인장을 지니고 있다. 심지어 둘 다 체구가 건장한 편이라 어디서도 눈에 띄었다.

경계의 시선을 받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제국 황실의 의뢰를 받았다고 하던데…….”

“설마, 그 황제가 인장을 함부로 내주겠어? 고귀한 혈통이겠지.”

“말로만 듣던 제국 첩보부 아니야?”

아직 내 정체를 깨우친 사람은 없는 모양이었다. 나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마수가 대량 발생하는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만일 사건과 관련이 있다면 암흑교단이 연루되어 있을 터였다. 그리고 나는 암흑교단에 있어 요주의 인물이나 다름없었고.

괜히 신분을 밝혀봐야 일만 꼬일 확률이 높았다. 물론 언제까지고 숨길 수는 없을 테지만 말이다.

당장 내가 손도끼만 꺼내들어도 내 정체를 눈치 챌 이들이 태반이었다.

다만 레이놀드 씨는 나와 달리 좌중의 시선이 거슬리지 않는 듯했다.

“황실의 인장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군.”

담백한 물음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무심코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용혈 문자의 소유자라는 사실은 나의 동료들에게만 알려져 있었다.

레이놀드 씨가 의문을 품는 것은 지당했다.

고심 끝에 나는 적당한 변명을 주워섬겼다.

“얼마 전에 받았습니다. 마신의 권속을 해치운 보상이라면서요.”

“그 문양의 무게는 가볍지 않네.”

‘문양’이라, 도장에 새겨진 용 무늬를 말하는 듯했다.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어른이 선의로 하는 조언에 토를 달 수는 없어서, 나는 얌전히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제국뿐만 아니라, 대륙 어디를 가도 자네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는 뜻이지. 오늘처럼 말일세.”

“그만큼 신중해야 하겠지만요.”

“알고 있다니 다행이군. 관심과 경계는 동전의 양면이라는 사실을 잘 기억해두게.”

레이놀드 씨가 내게 주의를 준 이유는 곧 밝혀졌다.

마수의 출몰 지역을 향해 군영을 벗어나자마자, 등 뒤에서 따라붙는 기척이 느껴졌다. 딱히 숨기려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흘깃 등 뒤를 바라보자, 성기사 둘이 우뚝 멈춰 섰다.

그중에서 입을 연 쪽은 중년의 기사였다.

“아시다시피 귀빈의 안위를 보장하는 것 또한 성국의 의무라서 말입니다.”

“필요 없네만.”

그리고 우리 쪽에서 응수에 나선 이는 레이놀드 씨였다.

묵직하고 싸늘한 목소리는 위압감을 형성하기 좋았다. 특히나 상대가 우리의 신분을 함부로 단정할 수 없다면 더더욱.

물론 상대도 쉽사리 물러나지는 않았다.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만에 하나 성국의 관할 지역에서 제국의 사절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야 한다면…….”

“사절이 아닐세. 그저 개인적인 용무를 보러 왔을 뿐.”

나는 레이놀드 씨의 뻔뻔함에 헛웃음을 삼켰다.

황실의 인장까지 보여주었는데, 황실과는 연관이 없다니. 당연히 씨알도 먹히지 않을 핑계였다.

이쯤 되니 상대도 강경하게 나올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한 걸음을 내딛으며 간곡한 어조로 사정했다.

“한 번만 사정을 봐주시지요. 저희 또한 상부의 지시를 이행할 뿐입니다.”

측은지심을 자극하는 설득이었다.

사이에 낀 자의 서글픔이란 그렇지 않겠는가. 한 쪽에서는 어떻게든 하라고 보채고, 나머지 한 쪽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버티고.

나 또한 일순 연민의 감정이 들 정도였다.

정작 레이놀드 씨는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야 자네들 사정이 아닌가? 다시 말하지만, 제국에서 성국에 책임을 묻는 일은 없을 걸세.”

“하지만…….”

이야기는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다. 이대로 두었다간 날이 새도록 줄다기리를 할지도 모를 판이었다.

결국은 내가 나서야 했다.

나는 최대한 목소리를 내리깔며 물었다.

“성국의 요구는 우리를 호위하는 것뿐입니까?”

“네? 네… 그, 그렇습니다만.”

그 직후였다.

무릎을 살짝 굽히고, 자세를 낮추자 호흡이 느려졌다. 그 둔중한 흐름을 검 한 자루가 가르며 쏘아졌다.

빛살, 혹은 직선.

어떠한 표현이든 좋았다. 내 검이 성기사의 목젖에 닿을 때까지는 찰나조차 필요하지 않았다.

성기사는 본능적으로 몸을 흠칫 떨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내 입에서 또 다시 메마른 말씨가 내뱉어졌다.

“……이래도 말입니까?”

그제야 넋을 놓고 있던 성기사의 낯빛에 감정이 부활했다.

처음에는 당혹, 이후에는 공포, 마지막에는 분노.

그 또한 오랜 시간을 수련한 무인이었다. 이러한 도발을 받고 얌전히 넘어갈 리가 없었다.

내 예상은 오래지 않아 적중했다.

성기사의 머리가 급격히 틀어졌다. 내 칼끝이 목젖을 스치듯 지나치고, 얇은 실선이 사내의 피부 위로 새겨졌다.

한 걸음, 품을 파고들며 내지르는 주먹.

이대로 내가 검을 휘두르면 끝장이었다. 당연히 실전에서는 불가능한 전략이었으나, 이곳은 성국의 군영이었다.

성기사의 목숨을 취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훌륭한 임기응변이었다. 내 실력이 조금만 떨어졌다면 말이다.

검이 퉁기듯 하늘로 솟구친다. 빙글빙글 칼날이 회전을 시작하고, 자유를 되찾은 내 팔이 곧장 바깥쪽을 휘젓듯 덮치며 성기사의 팔꿈치를 감아올렸다.

이후에는 힘을 주어 한 판.

주먹이 채 닿기도 전에, 우둑거리는 불길한 소리와 함께 성기사의 몸이 허공에서 뒤집어졌다.

쿵, 하고 충격파가 올리자 공중에 떠올려 보냈던 검이 추락을 시작했다.

이를 낚아채는 것은 남은 손의 몫이었다.

나는 후우, 하고 숨을 가다듬으며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남은 성기사 하나의 낯빛은 딱딱히 굳은 지 오래였다.

내가 던질 질문은 하나였다.

“떠나도 되겠습니까?”

남은 성기사는 땅에 누운 채 신음하는 제 동료를 흘깃 내려다보았다. 분한 기색이 엿보였으나, 누가 보아도 실력은 내 쪽이 월등했다.

호위 따위는 필요 없다.

그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이보다 효율적인 설득이 존재할 수 있을까.

성국의 기사로서 수치스러운 마음이 들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가 성기사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가십시오.”

나는 망설임 없이 뒤돌아 걸음을 내딛었고, 레이놀드 씨 또한 자연스레 내 뒤로 합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옆에서 흐릿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새 훌륭한 남자가 되었군.”

“원래는 이러지 않았는데 말이죠…….”

쓴웃음이 절로 떠올랐다. 점점 더 강해질수록 무력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해져서 문제였다.

대화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대화로 해결해야 하는데.

하지만 레이놀드 씨의 지론은 정반대인 듯했다.

“무력 또한 훌륭한 대화 수단 중 하나일세. 가진 무기를 썩히는 것은 무인의 자세가 아니지.”

“엘시 선배도 비슷한 말을 할 것 같아서 무섭네요.”

“당연하지, 그 아이 또한 라이넬라의 피를 이었으니까… 후후, 자네도 잘 기억해두게. 아이를 낳으면 라이넬라의 이름을 물려주어야 하지 않겠나?”

내 잇새로 짙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벌써부터 자식 교육을 간섭받는 처지라니.

나는 약간의 짜증을 담아 답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페르쿠스의 성을 물려주는 편이 낫겠군요.”

“흠,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네만… 우리 가문에도 후계자는 필요하지 않겠나?”

예전이었다면 꼼짝없이 데릴사위 취급이었을 텐데.

이제 페르쿠스의 성을 물려준다고 해도 별 반발이 없었다. 그만큼 내 지위가 높아진 덕이겠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했다.

결국 귀족의 결혼이란 이런 것이다.

일종의 거래관계나 다름없었다. 나와 엘시 선배의 관계는 보다 순수한데 말이다.

이처럼 레이놀드 씨와의 동행은 부담스러운 면이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기대하던 대로의 수확도 존재했다.

“예전에도 오신 적이 있습니까?”

군영에서 어느 정도 멀어졌을 무렵, 내가 레이놀드 씨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그는 허리를 숙여 대지의 검게 물든 흙을 꼬집어 들고 있었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비비며 냄새를 맡아보기까지.

얼핏 보기에는 우스운 꼴이었지만, 레이놀드 씨의 낯빛은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내 예상과 달리 레이놀드 씨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꽤 오래 전의 일이지. 아직 내가 용병이었던 시절이니까.”

“이곳은 그때도 이랬습니까?”

내 눈동자가 슬쩍 주위를 훑어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평탄한 대지, 흙은 기묘할 만큼 검어서 기괴한 느낌마저 줄 정도였다.

하물며 땅은 또 어떤가. 푹신한 감각이 느껴질 만큼이나 저항력이 없어서, 길을 걸을 때마다 푹푹 발자국이 남았다.

불쾌한 장소다.

이곳에 방문한 대개의 인간들은 나와 비슷한 감상을 품을 터였다.

“아니, 이러지 않았네. 마수의 대량 발생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거든. 그때는 아직 울창한 숲과 푸르른 초원이 있었지. 하지만 지금은 흔적도 보이지 않는군.”

“마수를 토벌하러 오셨었군요.”

나는 주어진 정보에서 가장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했다. 레이놀드 씨 또한 나의 추론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내가 왜 용병을 그만두었는지 들었나?”

“라이넬라 백작께서 찾아오셨기 때문이 아닙니까? 설득에 결국 마음이 움직이셨다고…….”

레이놀드 씨는 침묵 속에서 흙을 몇 번이고 비비적거렸다.

어느덧 세상에는 어둠이 깔려 있었다. 침전한 공기가 호흡에 육중한 무게감을 더했다.

생명이 사라진 땅에는 정적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숨소리조차 예민하게 들려올 만큼.

“당시의 나는 고집이 강했네. 설령 형님이 오시더라도 꿈쩍하지 않을 생각이었지. 왜냐하면, 내겐 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으니까.”

깊은 회한에 잠긴 말이었다.

나는 레이놀드 씨가 이처럼 다채로운 감정을 지니고 있는 줄 처음으로 알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멍하니 과거의 어딘가를 헤매고 있었다.

“복수를 해야 했거든.”

“……복수요?”

“그래, 동료들의 복수. 바로 이곳에서, 내 동료들의 태반이 사망했네.”

내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레이놀드 씨는 대마법사였다. 용병이던 시절에도 그만한 실력자인지는 모르겠으나, 최소한 지금의 엘시 선배 정도는 되었을 터였다. 그럼에도 용병단이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운 나쁘게 강한 마수를 마주쳤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실력 있는 용병단을 단숨에 무너트릴 정도라면, 그 마수들의 위험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당연히 성기사단 하나나 둘쯤으로 제어가 가능한 수준이 아니었다. 당장 군대를 꾸려 토벌을 해야 안정적인 제거가 가능했다.

나는 무심코 레이놀드 씨의 말을 부정하고 말았다.

“그럴 리가요. 그만큼이나 강한 마수가 존재했다면…….”

“세상 사람들이 다 그러더군. 우리가 잘못 본 거라고 말이야. 사실, 우리를 습격한 건 이곳에 흔히 서식하는 마수들이었네. 다른 점이 있었다면… 놀라울 정도로 지능적이었고, 흉폭했지.”

그렇게 말하면서, 레이놀드 씨는 서서히 허리를 펴고 섰다. 그의 눈동자는 아직도 제 손에 남은 흙 알갱이들을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지. 그 후로 몇 년이 지나도 비슷한 현상은 벌어지지 않았고, 나는 사실 지쳐가고 있었네. 그래서 가문의 품으로 돌아왔는지도 모르겠어.”

“그렇다면 도대체 왜 다시…….”

“나도 잊었다고 생각했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얼마 전부터 자꾸만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

으득, 하고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레이놀드 씨의 표정은 일그러지다 못해 참혹할 정도였다.

“이제야 떠올랐어…그날, 나는 분명 소녀 하나를 보았네.”

“무슨, 소녀라니… 마물이 출몰하는 곳에서 말입니까?”

“그래.”

레이놀드 씨의 눈이 불현듯 정면을 향했다. 그 푸른 눈동자에서는 은은한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

“검고 긴 머리카락이 나풀거리던 기억이 나네… 그 아이는 웃고 있었어. 그리고 그 눈동자, 눈동자가……!”

훅, 하고 부릅떠진 눈동자가 내 등 뒤로 돌아간 건 그때였다.

내 눈 또한 그 시선을 쫓았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근원을 알 수 없는 바람이 살랑이며 지나가고 있었을 뿐.

“……보았나?”

“아니요, 아무것도…….”

애초에 이쯤 되는 거리라면 내가 기척을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너무 신경이 예민해진 것 같다고, 레이놀드 씨를 달래려던 찰나.

칠흑의 머리카락이 긴 꼬리를 남기고 지나간다.

레이놀드 씨의 배후, 저 멀리에서.

이어지는 벼락 같은 출수, 내 손아귀에는 어느덧 검이 쥐어져 있었다.

나와 레이놀드 씨는 서로의 등 뒤를 경계하며, 슬금슬금 한 곳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적을 상대하기 위한 기초적 전략이었다.

“조카 사위, 웃음소리가 들린 것 같네만.”

“레이놀드 씨, 이제 무서운 소리는 그만…….”

그러자 쿡, 하고 얕게 터져 나오는 맑은 웃음소리.

그 진원지를 찾아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보았으나,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나를 마중하는 것은 더욱 큰 떨림이었다.

대지가 진동하고 있었다.

웅웅거리며 떨리는 땅바닥, 나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레이놀드 씨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레이놀드 씨는, 그래.

무섭도록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때와 비슷하군.”

“그때라니, 설마…….”

의혹의 말이 채 뱉어지기도 전.

찢어지도록 높은 소리가 대지를 찢고 솟구쳤다.

그야말로 집채 만한 지렁이였다. 입은 지독히도 커서, 얼굴이라고 할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 끔찍한 살점 기둥의 입구만이 보이고 있을 뿐.

하나나 둘이 아니었다. 속속들이 솟구치는 괴물들의 숫자는 이제 한 손으로 셀 수 없을 지경이었다.

작고 가는 짐승의 눈동자와 나와 레이놀드 씨를 겨누었다.

그 의도는 너무나 명백해 보였다. 도저히 본능을 따르는 짐승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침묵 끝에, 레이놀드 씨가 내게 물었다.

“……얼마나 시간을 끌 수 있겠나?”

이를 악물며, 나는 검에 오러를 불어넣었다.

“죽을 때까지!”

한밤 중에 열린 무도회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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