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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424화 (424/649)

〈 424화 〉 6. 존재 증명(12)

* * *

정제되지 않은 마력은 위험하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이 힘은 생물을 오염시켜 괴물로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탄생하는 존재가 바로 ‘마수’였다.

대개는 원본에 비해 크기가 적당히 커지는 정도로 끝나지만, 몇몇 종들은 마력에 호응하여 극적인 변화를 이루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마수들은 새로운 분류를 부여받는다.

내 앞에 늘어선 괴물들이 대표적이었다.

꿈틀거리는 직선의 살덩이, 입은 커질 대로 커져 얼굴과 분간이 불가능했다. 그 테두리를 타고 뾰족뾰족 나 있는 이빨들 사이로 산성의 침이 질질 흘렀다.

일명 ‘지옥구멍’이라 불리는 개체였다.

마수의 생태가 잘 밝혀지지 않았던 시절에는 그 원본조차 짐작하지 못하던 괴물이었다. 지하 깊숙한 곳에 살고 있던 수수께끼의 생물이 마력에 의해 변질되었다고 짐작해 왔을 뿐.

그래서 이름조차 ‘지옥구멍’이라고 불려왔던 마수였다. 그 원본이 설마 ‘지렁이’이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당연했다. 누가 이 압도적인 거체를 앞에 두고 지렁이를 상상한단 말인가.

주름진 피부와 육식을 추구하는 식성마저 원본과 정반대였다. 어째서 지렁이를 비롯한 몇몇 종만이 이처럼 특이한 변이를 일으키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하나였다.

‘지옥구멍’처럼 특이한 변이를 일으키는 개체는 여타의 마수들보다 강하다. 이름이 붙여지는 마수의 비율이 유의미하게 높을 정도로.

키에에에에에엑!

불쾌한 괴성이 야밤의 정적을 찢고 울려 퍼진다. 고막이 아릴 만큼 높은 소리, 내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방울지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지옥구멍은 딱히 무섭지 않았다.

나는 악신의 권속을 쓰러트린 전적이 있었다. 이름을 가진 마수가 아니라면,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내게 별다른 감흥을 주진 못했다. 혹은 마인이라면 모를까.

내가 긴장하고 있는 까닭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의 존재, 누구인지는 몰라도 이 사태의 배후에 그녀가 자리하고 있을 터였다.

그것이 문제였다.

정체를 모르는 만큼, 그 힘도 가늠할 수 없다. 설상가상으로 시간은 이미 밤이었다. 명도가 낮은 색을 식별하기는 더욱 어려웠다.

마수와 전투를 하는 도중이라면 더더욱.

나는 자세를 낮추고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지금으로서는 전황을 정리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검에 맺힌 은빛 오러가 들불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섬(一?).

새하얀 검광이 날카로운 실선을 그리며 대기를 찢어발겼다. 은빛의 지평선이 가로지르는 살점들이 소리조차 없이 터져 나갔다.

비명과 함께 몇 개체의 지옥구멍이 반토막이 나 허공으로 솟구쳤다.

핏물이 후두둑 떨어져 내린다. 나는 그 불쾌한 피 냄새를 끼얹으며 레이놀드 씨에게 외쳤다.

“레이놀드 씨, 얼마나 더 필요합니까!”

“조금만 기다리게!”

옅은 신음이 섞인 목소리, 고통스러운 연산 과정을 거치고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으득으득 이를 갈면서 앞을 내다보았다. 이미 몇 번이고 반복된 광경이었다.

칼질 한 번에 지옥구멍이 몇 마리씩이나 시체가 되어 쓰러진다.

지극히 효율적인 전투였다. 이대로라면 나의 압승을 점쳐야 정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승부는 결정적으로 기울지 못했다.

지옥구멍의 수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심지어 끝없이 솟구쳐 오르는 지옥구멍들은 지능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피보라가 일어 시야가 가려진 사이, 꿈틀거리던 무언가가 급격히 가속하기 시작했다.

나는 검을 횡으로 세워 달려든 지옥구멍의 아가리를 막아냈다. 그 와중에도 몇 마리의 지옥구멍들이 절묘한 궤적을 그리며 레이놀드 씨를 향해 쏘아지고 있었다.

마수의 지능이 아니었다. 빈틈을 일부러 만들어내다니.

팍, 하고 손에서 벼락이 터져 나왔다. 허리춤에 매달아 둔 손도끼였다.

날아든 손도끼가 레이놀드 씨에게 달려들던 지옥구멍 하나의 대가리를 찍었다. 웅웅거리는 비명 소리가 다시금 터져 나왔다.

캬아아아아아악!

연달아 터져 나오는 핏물이 지옥구멍의 죽음을 증언하고 있었다. 그 틈을 노려 나는 검신이 웅웅거릴 만큼의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점차 커져 가는 은빛의 오러.

순백의 불꽃이 타오르자 치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산성액이 타올랐다. 지옥구멍은 안간힘을 쓰며 나를 밀쳐내려 했지만, 그것이 패착이었다.

이를 악물고, 전력을 다해 검을 끌어낸다.

저항감은 한순간에 불과했다. 짧은 멈칫거림 이후, 오러가 가파른 질주를 시작했다. 반으로 쪼개진 지옥구멍의 살점이 덜렁거리며 허공에 떠올랐다.

내 입에서 고함이 절로 터져 나왔다.

“아직입니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대신, 레이놀드 씨는 영창에 열중할 뿐이었다.

이제 막바지라는 뜻이었다.

“삶과 죽음을 언도하는 진리의 별… 구도자의 길잡이, 천리와 순리, 영원무궁한 질서가 빛과 불에게 명하노니!”

살점과 핏물이 뒤엉킨 세상에 잔잔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리고 산들바람은 이내 돌풍으로, 돌풍은 폭풍으로. 파직거리는 전하가 맹렬히 진동하는 대기 속에서 터져 나오고 있었다.

하늘이 울고 있다.

지옥구멍들조차 이상한 조짐을 느끼고 일순 멈춰 설 정도였다. 내달리는 질풍의 중심에서, 레이놀드 씨의 갈색 머리카락이 마구잡이로 흩날렸다.

그럼에도 그는 침착하기만 했다. 사내의 이목은 제 주먹을 향하고 있을 뿐이었다.

새파란 빛이 움켜쥔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오고 나오고 있었다.

“발(?)하라.”

시동어와 함께 레이놀드 씨의 손가락이 펴졌다. 손바닥 위에는 자그마한 빛의 구체가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후, 하고 레이놀드 씨와 입바람을 불자마자 두둥실 떠오르는 구체.

그것이 회오리의 중심부에 위치한 직후였다.

“엎드려!”

나는 레이놀드 씨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했다. 땅 위로 엎어진 내 몸뚱아리 위로 새파란 벼락이 마구잡이로 뻗어나왔다.

그야말로 분쇄기나 다름없었다.

회오리에서 끝없이 터져 나오는 벼락들이 회전하며 주위의 모든 것을 일소해 버렸다. 지옥구멍들이 비명을 내지르고, 오발처럼 땅바닥을 긁고 스치는 전하들은 매캐한 탄내를 풍겼다.

썩둑썩둑 토막 난 살점들이 벼락의 중개인이 되어 전하를 더욱 확산시킨다.

무자비한 마법이었다. 짧은 영창 끝에 연출된 광경은 너무나 참혹했다.

심지어 이조차도 시작에 불과했다.

레이놀드 씨의 손이 땅을 팍, 하고 후려쳤다. 그곳을 중심으로 지반이 부풀기 시작하더니, 이내 빛과 열의 폭풍이 땅 속을 터트리며 일대를 초토화시켰다.

벼락, 피, 흙.

나는 그 사이에서 흐릿한 소음을 채냈다. 그리고 이내 땅속 깊숙한 곳에 숨어있던 괴물들이 비명과 함께 제 육체를 세상에 드러냈다.

키엑, 케에에에에에엑!

폭풍이 잦아들고 있었다.

전하로 마비된 괴물의 몸뚱아리가 곧추세워졌다. 나는 막 치솟기 시작한 지옥구멍의 대가리에 손도끼를 던졌다.

콱, 하고 틀어박힌 자리에서 피분수가 뿜어졌다. 지옥구멍이 경직된 사이, 나는 내달려 그 머리를 타고 올랐다.

그보다 먼저 솟구치고 있던 지옥구멍과 내 눈이 마주쳤다. 나는 흐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뭘 봐, 새끼야.”

푹, 하고 내던져진 검이 지옥구멍의 정수리를 관통했다. 피와 함께 뒤로 넘어가는 괴물의 대가리로 도약, 그제야 이 무리의 우두머리가 보였다.

여타의 지옥구멍들도 체장이 약 6~8m는 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 녀석의 크기는 그 배는 되어 보였다. 그야말로 까마득하게 높은 곳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도약을 감행하는 내 손에 손도끼가 핑그르르 돌아 되돌아왔다. 연달아 튀어오른 내 몸이 정점에 오르는 순간, 우두머리 지옥구멍과 내 눈높이가 동등해졌다.

진작 이랬어야지.

나는 두 손으로 손도끼를 높이 치켜든 채로, 은빛의 오러를 불태웠다.

은빛의 불꽃이 세상을 반으로 가르며 내리꽂힌다.

키에에에에에에에에액…….

비명 소리가 아득해지고, 도끼날이 땅바닥에 꽂힌 직후.

두 토막 난 괴물의 육체가 쩍 벌어졌다. 나는 쏟아지는 핏물을 담담히 받아내며 숨을 몰아쉬었다.

손이 뻐근하다. 힘이 너무 들어갔다는 뜻이었다.

피비린내조차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쥐었다 펴고 있자, 레이놀드 씨가 저벅저벅 내게 다가왔다.

그 몰골은 나와 마찬가지로 피투성이었다.

“오러가 예전보다 더 강해졌군. 특성을 개화했나?”

“아니요, 아직…….”

“그런데도 이 위력이라.”

레이놀드 씨의 눈이 흘깃 주위를 훑었다. 그제야 나도 우리가 만들어낸 참상을 시야에 담을 수 있었다.

흙 위로 살점과 피의 대지가 만들어져 있었다. 더불어 토막 난 사체 중 대부분은 일격에 쓰러져 반 토막이 난 채였다.

나도 느꼈다. 마지막에, 내 오러가 도끼날을 압도할 만큼 맹렬히 타올랐다는 사실을.

그 증거로, 작은 손도끼가 저 거구의 괴물을 단숨에 갈라버리지 않았는가.

그래서 더욱 흥분했는지도 몰랐다. 괜히 힘을 쓸 만큼.

무뚝뚝한 낯빛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던 레이놀드 씨는, 이내 아무래도 좋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마수 따위는 됐네. 중요한 것은, 그 여자가 어디로 갔냐는 점이지.”

“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레이놀드 씨 또한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우리 둘 다 기척을 감지하고 못하는 뜻이었다.

말이 되나?

내가 입에 담고도 실감이 나지 않는 가능성이었다. 익스퍼트에 이른 검사와 대마법사의 칭호를 받은 마도사가 그 존재조차 눈치 채지 못하다니.

나는 끄응, 하고 신음을 흘리며 물었다.

“레이놀드 씨, 그 여인을 본 적이 있다고 하셨죠?”

“그렇지. 얼마 전부터, 이상하게 자꾸 기억이 났거든.”

“방금 전에 무언가 말하려 하지 않으셨습니까?”

내 말에 레이놀드 씨가 잠시 멈칫했다.

그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나는 초조한 마음에 그를 더욱 채근했다.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눈동자’가 어쨌다고…….”

“아아, 그래. 그랬지.”

중년의 눈꺼풀이 다시금 닫혔다. 과거의 어디쯤을 침잠하는 그의 표정은, 한편으로는 무기력해 보이기도 했다.

“어두운 밤이었네. 바람 하나 불지 않는 초원은 고요했지… 마수들이 도시라고 있다는 실감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그때 나는 보았던 걸세.”

“소녀를 말입니까?”

“아직 어려 보였지. 긴 흑발이 나부끼고 있었어.,, 나는, 그 아이에게 다가가서 물었네.”

세월의 풍랑 속을 표류하는 레이놀드 씨는 일순 괴로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내 눈앞에 증언으로 이루어진 단막극이 펼쳐진다. 용병 하나가 어둠이 내려앉은 초원에서, 주저앉은 채 하늘을 바라보는 소녀를 만났다.

아직 등을 지고 있던 터라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눈에 띄는 것은, 오직 기나긴 칠흑의 머리카락뿐.

“이곳에서 무얼 하고 있느냐고, 이곳은 위험하다고 말이지.”

그러자 소녀는 새하얗게 웃는다. 너무나 순수한 미소라, 섬뜩할 만큼.

“그 아이는 웃고 있었어. 내게는 그저 기다리고 있다고만 하더군. 무엇을 기다리고 있냐고 묻기도 전에, 지옥구멍들이 우리를 습격했고……”

“그 이후에는? 그 이후에 소녀는 어떻게 됐습니까?”

중년의 신음이 점차 깊어진다. 레이놀드 씨는 괴로운 안색으로, 이마를 짚으며 기억을 되살렸다.

“그래, 그래! 우리를 지켜보며 웃고 있었지! 지옥구멍 따위는 우리의 상대조차 되지 않아야 했어. 그런데,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과거를 되짚어 가던 사내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핼쑥해진 그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는 당황한 눈빛으로, 더듬더듬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는 당황해서 레이놀드 씨에게 되묻는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러십니까, 레이놀드 씨?”

“……이 정도가 아니었네.”

넋이 나간 목소리였다. 그의 시선이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군영 쪽.

불길함을 감지한 나는 망막에 마력을 집중시켰다. 향상된 시력이 어둠을 꿰뚫고 머나먼 곳에서 피어오르는 흙먼지를 시야에 우겨 넣었다.

내 표정이 단번에 굳어졌다.

“고작 이 정도가 아니었어… 본대는 따로 있네.”

“이런 씨발.”

나는 저벅저벅 걸어, 지옥구멍의 시체에 꽂혀 있던 검을 거칠게 뽑아들었다.

망설이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내 머릿속은 이미 한 사람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리아, 내 여동생.

검을 수납하고, 곧장 땅을 박차려던 내 몸이 일순 멈칫한 것은 그때였다.

내 눈이 공허한 허공을 되짚었다. 등 뒤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어느덧 정신을 차린 레이놀드 씨가 내게 물어왔다.

“왜 그러나?”

“아니요, 그냥…….”

웃음 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군영을 향해 내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부디 리아가 무사하기를.

마음속에서 간절히 기도하면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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