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6화 〉 6. 존재 증명(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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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하얀 시야 위로 장면들이 부유한다.
토막 난 화상들이 정리되지 않은 서류처럼 촤르륵 넘어가고 있었다. 헐떡이는 숨소리와 덜컥거리며 뛰는 심장, 나는 얼핏 흥분이 과하다는 생각을 했다.
멀리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맑고 감미로운 음색,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었는데.
“……여동생이 있었다고요?”
이를 기점으로 세상이 채색되기 시작했다. 등불이 일렁이는 천막 안, 한 손에 술병을 든 여인이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연분홍빛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시큰둥한 얼굴에서 염증과 회한이 묻어나왔다. 그 눈빛에서조차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삶 자체가 지루한 듯했다.
그래서 온갖 기행을 벌이고 다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때는 모범적인 성직자였다는 기억이 났지만, 오랜만에 본 여인은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
귀동냥으로 들은 전적도 화려했다.
잦은 음주를 책망하는 대주교의 정수리를 술병으로 후려치지 않나, 고해성사를 하러 온 신도를 폭행했다든가 봉사를 하러 간 빈민가에서 주민들과 목청을 높여 싸우기도 부지기수였다.
어쩌다 이토록 불량해진 걸까.
나는 옅은 호기심과 함께 조언을 건네지 않을 수 없었다.
“술, 계속 드셔도 되겠습니까? 성국에서 좋아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만…….”
“꼬우면 파문하라고 해요.”
코웃음을 치면서, 여인은 손에 든 술병을 호쾌하게 기울였다. 꼴깍꼴깍 목을 타고 넘어가는 소리가 그대로 들릴 정도였다. 이내 푸하, 하고 입을 닦으며 여인은 염세적인 미소를 지었다.
“나 없이 전선을 유지나 할 수 있을까? 신의 이름을 빌린 겁쟁이들, 언제까지고 성도에 쳐박혀 있을지 두고보라지…….”
“말씀이 과하십니다.”
“네네, 황제 폐하께 잘 보고해 주시고요… 그보다 여동생이 어쨌다고요?”
나는 대답 대신 술잔을 기울였다. 말하고 싶지 않다는 완곡한 의사 표현이었으나, 상대는 도리어 흥미롭다는 듯 팔짱을 낄 뿐이었다.
성격 나쁘기로 유명한 여자다웠다.
반항이 소용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나는 항복의 표시로 시선을 돌렸다.
“……실종됐습니다.”
“페르쿠스 영지 사건 때군요? 흐음.”
성녀는 별 것 아니라는 듯 내 아픈 기억을 들추어냈다.
한 줌의 거리낌도 없는 행위였다. 가족과 영지를 잃은 귀족 앞에서, 그날의 참상을 이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꺼내다니.
불쾌하다 못해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 내가 헛웃음을 머금고 있자, 턱을 괸 채 고민에 잠겨 있던 성녀의 입이 열렸다.
“별 수 없네요, 순명(??)하는 수밖에.”
울컥, 하고 목젖까지 차오르는 감정이 있었다.
‘순명’하라니, 얌전히 따르란 말인가. 가족과 영지, 심지어 존경하던 스승과 사랑하던 연인마저 잃었던 나였다. 이 기구한 운명조차 받아들이란 그 말이 어찌나 폭력적으로 느껴지던지.
나는 무심코 반항적인 말씨를 하고 말았다.
“그것이 신의 뜻이니까요?”
내 반문에 성녀는 흐으응, 하고 묘한 소리를 내며 나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그러기를 한참.
입술이 달싹이며, 또 하나의 물음이 던져졌다.
“불만인가요?”
“……당연하지 않습니까?”
간만에 달구어진 목소리였다. 점차 마모되어 있던 감정에 불길이 당겨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녀는 오히려 웃는 낯이었다.
“오, 좋네요. 그러니까 인간적으로 보여요. 늘 딱딱한 말투만 해서 몰랐는데.”
이대로 두면 박수라도 치며 웃을 기세였다. 내 표정이 더욱 싸늘해지자, 성녀는 쿡쿡거리며 웃음소리를 억눌렀다.
뒤이어 연민을 가득 담은 조언이 하나.
“다만 안타깝네요. 운명의 질곡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으니까요.”
한 번이라니, 이미 수도 없이 겪었다.
이보다 더 나빠진 삶이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말없이 술잔을 들이키며 침묵을 지킬 따름이었다.
그래, 그때까지는 그랬다.
전장에서, 칼과 도끼를 들고 여동생과 재회하기 전까지는.
온몸에 피칠갑을 한 소녀가 웃고 있었다.
“안녕, 오빠.”
주위에는 으스러진 시체가 수십, 나는 그 황금빛 눈동자를 마주하고 굳어 버렸다.
괴물의 눈이었다.
**
콱, 하고 내리꽂힌 도끼날을 중심으로 뇌수와 살점이 튀어 올랐다.
피비린내, 다져진 살점들이 피부에 들러붙는 감각은 언제 느껴도 불쾌했다. 나는 헐떡이며 다음 희생양을 찾아 헤맸다.
지옥구멍과 함께 흑의를 입은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얼굴 가죽이 뜯겨진 인간들은 존재 자체로 기괴한 면이 있었다. 이제는 전부 죽어버린 뒤였지만.
천막으로 침입한 지옥구멍들은 바깥의 지옥구멍과 달리 크기가 작았다. 기습에 용이하도록 개조된 괴물이었다. 그 저의가 소스라치도록 빤히 보여서, 나는 흥분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감히 누구를 건드리려고.
내 여동생이었다. 누구에게도 뺏길 생각은 없었다.
절대로, 무슨 짓을 해서도.
그렇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어느덧 내 눈동자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거칠게 몸을 돌려, 다시금 적을 찾으려 들었을 때.
시야에 문득 내 여동생의 모습이 들어왔다. 넋을 놓고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희미한 두려움이 읽히고 있었다.
덜덜 떨리는 목소리가 귓전을 간지럽힌다.
“오, 오빠…….”
그제야 정신이 맑아졌다.
리아는 상인이었다. 전투에 익숙하지 않았을 뿐더러, 내가 전투하는 장면을 눈앞에서 본 적도 없었다. 그러니 내가 손도끼를 들고 날뛰는 건 난생 처음 보는 광경이겠지.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나는 무심코 손에서 손도끼를 놓아버렸다. 뒤이어 더듬거리는 언어가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어, 음. 그러니까… 리아?”
여동생은 여전히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이를 보는 내 가슴이 더욱 쓰라렸다.
“……괜찮아?”
내 상냥한 어조에, 리아의 망막 위로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이내 소녀는 펑펑 울면서 내 품에 안겨 왔다.
“아니, 안 괜찮아! 흐윽, 흑… 가, 갑자기 괴물들이 몰려와서… 얼굴도 없는 사람들이 와서 괴성을 내지르지 않나… 흐어엉……!”
나는 서럽게 우는 리아를 보듬어 안았다. 상냥한 손길로 머리카락을 쓰다듬어도 리아의 울음은 그치지 않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내 시선은 조용히 천막 안의 풍경을 도해하고 있었다.
지옥구멍이 넷, 흑의를 입은 정체불명의 인물들이 셋.
리아의 전투 능력을 볼 때 죽이거나 중상을 입힐 시간은 충분했다. 그럼에도 내가 현장에 진입하기 전까지 천막 안에 튄 핏자국은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이제 막 떨어진 피를 선홍빛을 띠고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목적은 명확했다. 리아를 최대한 건드리지 않고 데려가려 했다는 뜻이다.
도대체 왜?
하지만 내게 그 이상 지체할 시간은 남아있지 못했다.
웅웅거리는 진동이 땅 밑을 타고 전해져 왔다. 명백히 이쪽으로 가까워지고 있는 기척이었다.
지옥구멍들이다.
나는 리아를 당장 품에 번쩍 안아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지하로 오러를 투사하고 싶었지만, 이미 오늘은 너무 많은 마력을 사용한 후였다.
지금으로서 가장 안전한 곳은 하나뿐이었다.
군영의 본대가 머무르고 있는 곳.
그날 밤은 밤새도록 전투가 이어졌다. 지옥구멍들은 지겨울 만치 나와 리아를 쫓아다녔다. 다음날 동이 트고 나서야 지옥구멍들의 습격이 멈추었고, 군영에는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
인간이 아닌 마수의 시체가.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대승이었다. 군영에서는 종일 승리를 기념하는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나와 레이놀드 씨의 활약을 칭송하는 목소리이기도 했다. 밤이 되어서야 풀려난 나는, 새근새근 자고 있는 리아의 옆에서 사제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다소 놀라셨을 뿐입니다. 신체 자체에 이상은 없어요.”
“그 흑의를 입은 시체도 조사해 보셨습니까?”
사제가 슬쩍 내 시선을 피하며 침묵을 지켰다. 물론 부질없는 반항이었다.
“제가 누구인지 아시지 않습니까. 제 여동생이 습격당했고, 흉수는 아마도…….”
“암흑교단이 맞습니다.”
천막의 입구를 가린 천을 거두고, 중년의 성기사가 들어오며 던진 말이었다. 나를 호위하려다 팔이 꺾여버린 그 성기사였다. 그리고 내가 구해낸 인물이기도 하고.
이를 듣자마자 사제는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부단장님! 하지만 그건 상부에서 정보 공유에 신중을 기하라고…….”
“피해를 입은 당사자이자, 우리 군영의 영웅에게 이렇게 중요한 정보를 숨기라고? 향후 제국과의 관계를 고려하더라도 있을 수 없는 일이네.”
반박의 여지가 없었는지 사제의 고개가 뚝 떨구어졌다. 그도 내심으로는 내게 진실을 전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부단장’이라 불린 성기사는 기나긴 한숨을 내뱉었다.
“나가 보게. 나머지는 내가 이야기하지.”
짧은 목례와 함께 사제가 천막을 나서자, 부단장은 곧장 고개를 깊이 숙여왔다.
“사죄 드립니다, 이안 경. 본국의 불미스러운 일에 말려들게 되어…….”
“괜찮습니다. 억지를 쓴 쪽은 저니까요.”
나는 재빨리 그를 만류하며 그렇게 말했다. 그보다 듣고 싶은 내용은 따로 있었다.
“우선 암흑교단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말씀해 주시지요. 무엇보다 중요한 일 아닙니까?”
“네, 알고 있습니다. 바로 숨김 없이 말씀드리겠습니다.”
부단장에게 전해 들은 정보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얼굴 가죽을 뜯긴 흑의인들은 예상대로 암흑교단과 관련이 있었다. 성국에서 급파된 사제가 검사한 결과, 금지된 마법의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했다.
자세한 술식을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원형이 되는 기록을 찾아보면, 오래 전 마신에게 정신과 육체를 대가로 힘을 내려받는 계약과 관련이 있으리라고 추측해 볼 뿐이었다.
그 의미는 다음과 같았다.
“그럼 그 흑의인들은 암흑교단에게 조종당한 존재들이란 소리입니까?”
“한때는 그랬겠죠. 하지만 마력의 흔적으로 보아, 이미 늦은 뒤였다는 추측이 중론입니다. 정신이고 육체고 이미 뿌리까지 잠식되어 있었어요. 그래서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니죠.”
제 몸도 마음도 타인의 뜻대로 움직인다.
그것을 살아있다고 부를 수는 없을 터였다. 차라리 죽여 주기를 잘했을지도.
그럼에도 가시지 않는 불쾌감에, 나는 혀를 쯧 하고 차고 말았다.
다소 무례한 행위였으나 부단장은 이해한다는 눈빛이었다.
“무척 교묘한 마법입니다. 시체를 해부라도 하지 않으면 감지조차 불가능해요.”
“타인을 조종하는 마법은 그 흔적을 숨기기 쉽지 않을 텐데요?”
“자의로 인한 계약이기 때문입니다.”
부단장은 씁쓸한 어조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강제로 술식을 심어놓고 조종하는 마법은, 의식을 제압해야 하기 때문에 티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 술식은 피시전자가 자의로 계약에 응해야만 발동합니다.”
“스스로 몸과 정신을 바쳤다는 이야기입니까?”
“네, 그렇죠. 그 과정에서 어떠한 수작질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최소한 성국이 밝혀낸 사실은 그렇습니다.”
나는 낯가죽을 쓸어내리며 신음을 삼켰다.
암흑교단이 하는 짓은 하나같이 불쾌하고 음침한 면이 있었다. 인간이 스스로 제 육체와 정신을 바치도록 유도하고, 이후에는 버림패로 써먹다니.
슬슬 들을 만한 정보는 전부 들은 뒤였다. 내 입에서 의례적인 안부 인사가 흘러나왔다.
“그나저나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사상자는 얼마 없다지만, 재산상의 피해가 막대할 텐데요.”
그러자 부단장은 도리어 손사래를 치며 웃음을 머금었다. 걱정은 하지 말라는 듯.
“의외로 그렇지는 않습니다. 마수들이 철저히 인간을 중심으로 노리기도 했고, 또 그만큼 마수의 시체도 많이 회수했으니까요. 이를 판매하면 충분히 메꿀 수 있는 정도입니다… 아 참! 이안 경께도 전과에 따른 마땅한 보상을…….”
“괜찮습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허허, 곤란하군요. 마침 레이놀드 님께도 비슷한 말씀을 전해 들은 참인데.”
부단장은 턱을 쓰다듬다가, 이내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손바닥을 내리쳤다.
“그렇다면 여동생 분의 상단에 물량을 염가에 매각하면 어떻겠습니까? 마침 저만한 물량을 소화할 상단이 얼마 없기도 하고, 또 성국에서도 은혜를 보답하는 셈이 되니 면이 설 겁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마수 시체를 입찰하기 위해 상단이 몇 곳 모여든 것으로 아는데…….”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지요. 입찰이란 때로 실패할 가능성도 염두에 두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가, 이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여동생을 도와주겠다는데 거절할 까닭은 없었다. 또 명분도 확실한 만큼 뒤에서 이야기가 나올 일도 없을 터였다.
정작 이 결정을 두고 곤란을 겪은 쪽은 예상치도 못한 인물이었다.
다음날 아침, 나를 급히 찾아온 모 상단의 인물이 수정구 하나를 공손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마력의 빛이 감돌기 시작하더니, 그곳에서 선명한 화질의 화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실시간 통신 마법.
그 너머에서 보이고 있는 인물은, 얼마 전에도 얼굴을 본 바 있던 여인이었다.
“……반가워요, 손도끼 바보바보 경.”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 있는 은발의 미인.
시에네 알펜하우저 선배였다.
퍼즐이 한 조각씩 모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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