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7화 〉 6. 존재 증명(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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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닷없는 조우는 늘 색다른 감흥을 주곤 했다.
당혹감, 반가움, 혹은 증오나 분노조차도 이러한 우연의 결과물이 될 수 있었다. 수정구 너머로 시에네 알펜하우저 선배를 마주한 직후, 내가 느낀 감정 또한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당황했다.
왜 시에네 선배가 이곳에 나타난다는 말인가. 아카데미에서 한창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어야 할 인물이었다. 내게 사적으로 연락을 취해야 할 까닭을 짐작하기 힘들었다.
뒤이어 의문과 불안이 찾아왔다. 까닭을 알 수 없다는 것은 늘 두려움을 수반하기 마련이었으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찾아온 감상이 바로 ‘여유’였다.
떨떠름한 표정, 토라진 눈빛, 무엇보다 급한 용무가 있다며 나를 부른 쪽은 시에네 선배였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문제가 생긴 쪽은 내가 아니었다. 시에네 선배가 곤란을 겪고 있기에, 내게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려 하는 것이다. 내가 움츠러들 이유는 하등 없었다.
이를 깨닫자마자 내 안색이 급격히 평온해졌다. 평정을 되찾은 내 눈빛에 시에네 선배는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그 시선의 행방을 분간하기 힘들었다. 은빛의 동공은 흰자위와의 경계조차 모호했다.
다만 그 언어만큼은 또박또박 내 귓전을 파고들고 있었다.
“좋아 보이네요. 성국 생활도 할 만한가 보죠?”
“그러는 시에네 선배께서는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또, 제 이름은 ‘손도끼 바보바보’가 아니라 ‘이안 페르쿠스’고요.”
내 여유 있는 반론에도 시에네 선배는 입술을 삐쭉 내밀 뿐이었다.
아니, 내미는 수준이 아니라 눈까지 감으며 질색을 하는 모양새였다. 우우, 하는 비난의 아우성이 귓가에 들려오는 듯했다.
당연하다는 듯 시에네 선배의 타박이 이어졌다.
“그랬나요? 몰랐네요. 손도끼로 힘없는 아녀자를 협박하는 불한당이라는 인상이 너무 강해서요.”
“친애의 표시라고 생각하시죠.”
“어떤 미친 인간이 그딴 걸 친교의 의미로 해석해요?!”
은발의 여인이 책상을 쾅쾅 두드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고민에 잠겼다.
지금까지는 성공적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시에네 선배는 예외인 모양이었다. 하기야, 일반적으로는 저렇게 반응하기야 하겠지.
또 나로서도 딱히 선배와 친하게 지낼 생각은 없었다.
“원래 어린 나이에는 주먹질을 하면서 친해지고 그러지 않습니까.”
“잘도 사춘기 꼬마 아이 같은 소리를 하네요… 통상적으로 폭력은 관계 단절의 신호라고요. 호의? 그딴 건 일절 없어요! 당신과 내 관계는 끝, 그리고 내 마음속에서도 끝! 알겠나요?!”
아르릉거리며 적의를 표출하는 꼴이, 아직도 지난 만남의 충격을 이겨내지 못한 듯했다. 정작 손도끼로 위해를 가하지는 않았음에도 말이다.
결국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곧장 핵심을 찔러 보기로 했다.
“그래서, 이미 끝난 관계인 우리가 이렇게 다시 대화를 나눠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아픈 지적이었다.
직전까지만 해도 나의 무례를 열렬히 규탄하던 시에네 선배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침묵이 얼마간 이어지더니, 결국 여인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리고 이내 고분고분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뭘 원하죠?”
“뭘 원하냐니요?”
나는 진심으로 알 수 없어 되물어야 했다. 느닷없이 연락을 건 쪽은 시에네 선배인데, 마치 요구사항은 내가 가지고 있을 것처럼 말하다니.
내 고개갸 갸웃 기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에네 선배는 도리어 가증스럽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뜰 뿐이었다.
“일부러 한 거잖아요? 마수 시체의 공급을 틀어쥐려고, 우리 알펜하우저의 상단이 입찰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알고서.”
아하, 하고 나는 희미한 탄성을 터트렸다.
이제야 사정이 이해가 갔다. 나와 레이놀드 씨의 참전으로 성국 측에서는 막대한 양의 마수 시체를 리아의 상단에 불하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최근 마수가 대량 발생한 이곳은 마수 시체의 주된 공급 경로 중 하나였다.
마수 시체 사업을 하는 상단이라면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멀쩡히 입찰을 준비하던 와중에, 그 많은 물량을 누군가가 독점하게 되다니.
다만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있었다.
“그 정도야 알펜하우저의 수많은 사업 중 일부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해도 그만, 하지 않아도 그만일 텐데.”
“계약이 걸려 있으니까 문제죠.”
흥, 하고 시에네 선배는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최근 들어 마수 산업이 가장 주목받는 사업이란 사실을 모르는 사람도 있나요? 특히 성국 인근에서 인기가 높아요. 마수 시체라면 덮어놓고 사들이는 이들이 있거든요.”
‘마수 시체’라.
나는 문득 잊고 있던 목표가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처음에 내가 리아를 따라 이곳에 온 이유, 그것은 마수 시체를 거래하는 어느 상단에 대한 소문을 듣기 위해서였다.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짐짓 태연한 체를 하며 물었다.
“잘 모르겠군요.”
“진짜 마지막까지 모른 척 할 거에요? ‘샤일록 상회’ 이야기잖아요! 도대체 무슨 조건을 내걸고 싶어서……!”
‘샤일록 상회’라는 이름은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었다.
고아원과 거래를 한다는 곳이었다. 상행을 떠나기 전, 일부러 성녀에게 이름을 물어봤으니 확실했다. 그래서 나는 더욱 의문이었다.
마수 시체를 쓸어담을 만큼 규모가 있는 상단이었다. 굳이 여타의 상단을 통하지 않더라도 직접 입찰에 참여하는 방법도 있었다.
특히 마수의 대량 발생지처럼 대량의 시체가 유통되는 곳이라면 더더욱 그러는 편이 유리할 터.
하지만 군영에 도착한 이후, 나는 샤일록 상단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마 자세한 내용은 리아에게 물어봐야 할 테지만 말이다.
혹시 중소상단과의 상생을 위해 일부러 추가적인 비용을 지불하고 있는 걸까?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를 무슨 뜻으로 받아들인 건지, 시에네 선배는 초조한 낯빛이 되고 말았다.
“왜, 왜요… 뭐가 불만인데요?”
딱히 불만은 없었다. 어차피 내 선에서 결정할 이야기도 아니었고.
상단은 리아의 소유였다. 상단이 관련된 일의 결정권도 내가 아닌 리아에게 있었다.
하지만 시에네 선배는 무엇을 착각하고 있는 건지, 슬슬 내 눈치를 살피며 기가 죽고 있었다.
“흠, 흠. 제 말투가 다소 무례하긴 했죠? 사죄 드릴게요. 다만 그만한 물량을 한 번에 소화시킬 수 있는 상단은 드물어요. 우리 알펜하우저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여전히 나는 대답 대신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별다른 이유는 없고, 힐끔힐끔 시에네 선배가 내 눈치를 살피는 꼴이 재미있어서.
결국 시에네 선배는 울상을 지어 보였다.
“미안하다고요! 이 시에네 알펜하우저가, 사과까지 했는데 그렇게 나올 거예요?!”
이 여자가 과연 ‘알펜하우저 가문의 해와 달’이라 불릴 만한 여자인가.
나는 헛웃음을 삼키며 의문을 품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시에네 선배한테 물어보고 싶은 내용이 하나 있었는데.
성녀와 관련된 첩보.
어쩌다 보니 그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하고 회담이 종료되고 말았다. 나는 그 사실에 묘한 찝찝함을 느끼며 리아의 천막을 찾아가기로 했다.
**
“싫어.”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내뱉어진 단언이었다.
나는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며 허탈한 심정을 드러내는 수밖에 없었다. 내 여동생의 고집이 쉽사리 꺾일 리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어떠한 사안에 대해서는 더욱이.
리아는 지금 내 품에 얼굴을 파묻은 채였다. 침대 위에 걸터앉은 내게 매달리다시피 한 꼴이었다. 남들이 보기 남사스러운 자세가 아닐 수 없었다.
리아의 ‘싫어’라는 말은 이어질 내 요구사항에 대한 거부 의사였다.
결과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부탁을 입에 담는 수밖에 없었다.
“리아, 제발 좀 떨어져… 벌써 두 시간째 이러고 있잖아. 그것도 아무 말도 없이.”
“하, 하지만 무섭단 말이야……”
습기가 섞인 목소리에 일순 내 굳은 결심이 흔들렸다. 이러면 안 되는데, 눈물을 머금고 나를 올려다보는 리아의 눈은 반칙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나는 또 다시 리아를 품에 껴안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어야 했다.
“괜찮아, 리아. 이제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성국에서도 조사단을 파견했고, 우리가 돌아가는 길도 호위해 주기로 했어.”
“그래도 불안하다고!”
리아는 눈에서 이슬을 뚝뚝 떨구며 그렇게 목청을 높였다. 어지간히 충격을 받은 듯했다.
“뜬금없이 얼굴도 없는 사람들이 쳐들어 왔는데, 어떻게 무섭지 않을 수 있어?! 심지어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았다고… 으으, 땅속에서는 괴물들이 솟구치질 않나.”
나는 진절머리를 치는 리아에게 우선 공감을 표하기로 했다. 쓸데없이 당시의 기억을 들추어내 상세한 증언을 얻으려 해봐야, 역효과만 날 것이 뻔했다.
“그래, 무서웠겠다. 다친 곳이 없어서 다행이야.”
“당연히 다치지는 않았지! 자꾸 나 보고 무어라 중얼중얼거리는데, 겁이 나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니까. ‘성’, ‘성’… 어쩌고?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를 생각으로…….”
부르르 몸을 떨며 분노를 토해나던 리아의 몸에 힘이 빠진 것은 그 직후였다.
당시의 악몽을 회상하다 다시 울음보가 터졌던 탓이었다.
“흑, 나 무서웠어… 오빠아…….”
“괜찮아, 괜찮아. 이제 내가 있잖아… 그럼 일 이야기는 내일 하자.”
그때, 눈물을 펑펑 쏟던 리아의 태도가 돌변했다.
‘일’이라는 낱말을 듣자마자 이루어진 극적인 변화였다.
어느덧 울음을 뚝 그친 리아의 귀가 쫑긋이는 환각이 보일 정도였다.
“……일이라니?”
“당연히 네 상단 일이지. 너 없는 동안 성국 측이랑 논의를 좀 했거든.”
꿀꺽, 하고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당연히 리아로부터 나는 소리였다. 곧 기대와 흥분이 반씩 섞인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무, 무슨 논의였는데?”
“마수 시체를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해서? 또, 나와 레이놀드 씨에게도 활약에 따른 보상을 줘야 하니까. 그런데 내가 돈을 받아서 뭐하겠어?”
리아의 심박수가 급격히 오르기 시작했다. 반짝이는 눈동자의 채도가 너무 높아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여동생은 제 주먹까지 몰아 쥔 채 내게 물어왔다.
“그,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했어?”
“네 상단한테 맡기기로 했는데.”
하아, 하아. 이제는 리아의 숨결마저 거칠어지고 있었다.
오빠의 품에 안겨 홍조를 띄운 채 헐떡이는 여동생이라니.
진심으로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광경이었다.
리아는 흥분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설마, 그 많은 물량을 전부……?”
“어,”
그리고 그 다음 순간.
“꺄아아아아아아! 우리 오빠 최고! 역시 나한텐 오빠밖에 없어! 나, 오빠랑 결혼할래!”
눈물 짓던 모습 따위는 온데간데없이, 리아는 환호성을 내지르며 내 품에 볼을 비비댔다. 한 술 더 떠 내 볼에 입을 맞출 정도였다.
쪽, 쪽, 쪽.
이대로 두면 리아의 입술 자국으로 얼굴이 뒤덮일 판이었다. 나는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리아를 만류해야 했다.
“그만, 그만… 하여튼 이제 불만은 없는 거지?”
“당연하지! 습격 한 번 당해서 이만큼 벌어들일 수 있다고? 몇 번 더 당해도 돼! 암흑교단한테 편지라도 쓸까?!”
내 입에서는 대답 대신 허허, 하는 헛웃음만이 흘러나올 뿐이었다.
아직 어리기는 어렸다. 암흑교단이 얼마나 무서운 집단인지도 모르고.
물론 굳이 타박을 하진 않았다. 기뻐하는 여동생의 기분을 망칠 만큼, 내가 눈치가 없는 편은 아니었으니까.
대신 기쁨에 겨워 나를 부둥켜 안는 리아에게 물었을 따름이었다.
“그러고 보니, 리아. ‘샤일록 상회’라고 들어봤어?”
“응응? 당연히 알지, 마수 산업의 큰손인데.”
리아는 한 점의 의심조차 없이 그렇게 답했다. 내가 왜 그러한 사실을 묻는지 호기심조차 일지 않는 듯했다.
그래서 나는 더욱 거리낌 없이 정보를 캐낼 수 있었다.
“혹시 그 상단도 이곳에 온 거야?”
“아니, 입찰자 목록에는 없던데? 그보다 오빠, 우리 돈 계산하자! 잘 봐, 우리가 유복한 노후를 보내기 위해서 얼마가 필요하냐면…….”
리아는 그 이후에도 무어라 떠들었지만, 정작 내 정신은 딴 곳으로 가 있었다.
‘샤일록 상회’.
이만하면 본격적으로 캐봐도 좋을 듯했다. 다소 억지를 부려서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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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국과 필요한 협의를 끝마친 다음날, 우리는 비로소 고아원으로 돌아가는 길에 올랐다.
티는 내지 않았어도 다들 피로가 쌓인 참이었다. 호위도 성국이 서주겠다, 우리는 종일 꾸벅꾸벅 졸면서 여로를 보냈다. 다만 레이놀드 씨가 조금 이상한 행동을 보이긴 했다.
“그래서 레이놀드 씨, 그 ‘소녀’의 눈동자가 어쨌다고요?”
불현듯 떠올라 던진 질문이었다. 내 물음에 레이놀드 씨는 아아, 하고 옅은 탄성을 터트렸다. 그리고 슬쩍 나와 리아를 번갈아 보기를 한참.
그의 입에서 무심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모르겠네. 아마도 착각한 거겠지.”
허무한 결론이었으나, 또 이를 두고 레이놀드 씨를 심문하기도 우스운 꼴이었다.
무엇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정신을 온통 빼앗아 버리는 사건이 일어났으니까.
고아원에 도착한 날, 어수선한 분위기 틈으로 성녀가 다가와 말했다.
“가면을 쓴 괴한이 나타났어요.”
나는 흐, 하고 웃음을 터트리는 수밖에 없었다.
“아주 쉴 틈을 주지 않는구나.”
아무래도 여독을 푸는 것은 좀 더 시간이 지난 뒤의 일이 될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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