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8화 〉 6. 존재 증명(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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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을 쓴 괴한.
그 존재를 처음 인지한 곳은 페르쿠스 영지였다. 난데없이 저택에 침입한 괴한은 아이린 경을 기절시키고, 리아를 폭주시켜 나를 전투불능으로 만들었다.
절묘한 시점에 이루어진 기습이었다. 암흑교단의 계획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었다.
다시 말해, 가면을 쓴 괴한은 암흑교단과 모종의 협력관계를 맺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죽어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그래서 나는 성녀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었다.
“어젯밤의 일이었어요. 가면을 쓴 괴한이 고아원에 침투하려다 발각되었거든요.”
“발각을 당했다고요?”
신출귀몰한 행적으로 추적조차 불가능하던 인물이?
다소 의심이 가는 정황이었으나, 성녀의 생각은 조금 다른 듯했다.
“네, 우연히 그곳을 지나가던 사람이 하나 있어서.”
그제야 나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우연’이라는 말이 붙으면 대개의 문제는 해명이 가능했다.
말 그대로 ‘우연’이었으니까.
신이 아닌 이상, 누가 모든 상황을 예견하고 조정할 수 있겠는가. 운이 나쁘면 아무리 완벽한 계획도 엎어지는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날따라 가면을 쓴 괴한에게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고 하면 이해가 갔다.
당장 유르디나 영지에서도 비슷한 행운이 있었기도 했고.
황녀가 가면을 쓴 괴한을 목격한 덕에, 유르디나 후작의 배신을 미리 알 수 있었다. 델핀 선배가 결전 당일 유르디나 후작을 독대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다만 의문은 아직 남아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허술하지 않습니까? 지난번에 원장 수녀님께서 그토록 자신하지 않으셨습니까. 이 고아원에서 한정해서 그럴 일은 없다고… 심지어 보안이 뚫린 날에 우연히 지나가던 사람에게 들키다니.”
“그에 대해서는 복잡한 사정이 있어요.”
성녀는 애달픈 한숨을 내쉬며 그렇게 말했다.
씁쓸한 심정이 그대로 묻어나는 얼굴이었다. 그 눈빛에서 옅은 피로가 느껴지기도 했다.
“우선 그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해요. 저도 좀 더 알아봐야 할 것 같으니까… 당신도 거들어 주시면 좋겠네요.”
“어떻게 말입니까?”
“목격자를 면담해 주세요.”
바라던 바였다. 내게도 정보가 필요했으니까.
유일한 불만이 있다면, 잠시 쉴 틈조차 주어지지 않고 조사에 착수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전투까지 하고 온 마당에 휴식조차 취하지 못하다니.
내 씁쓸한 미소에 성녀는 아차, 싶었는지 걱정스러운 눈빛을 했다.
슬쩍 내 눈치를 살피면서, 주위를 둘러보던 여인의 손이 슬쩍 내 손등을 쓰다듬었다. 남들이 보지 않는 틈을 타 나를 위로하려는 듯했다.
“미안해요, 이안… 멀리서 오느라 힘들었죠? 어떻게, 성과는 있었어요?”
“네, 다행스럽게도. 그에 관해서도 나중에 이야기 나눠보죠.”
그럼에도 내 안색이 좋아지지 않자 성녀는 다소 안절부절 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또 다시 성녀의 고개가 휙휙 돌아가며 주변을 살폈다. 그러기를 얼마쯤.
성녀가 살짝 까치발을 들고 내 귓가에 속삭였다.
“상을 드릴까요?”
오랜만에 듣는 달콤한 목소리였다. 성녀 특유의 은근한 어조와 함께 어우러지니, 그 위력이 더욱 배가되는 느낌이었다.
나는 혹하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헛기침을 하고 말았다.
성녀가 주는 상이라.
내 눈이 비스듬히 하단을 향했다. 성녀가 내게 근접한 탓에, 팔뚝에 전해지는 부피감 넘치는 감촉의 근원이 그곳에 있었다. 그야말로 ‘무심코’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반응이었다.
누구나 그렇지 않겠는가.
워낙 성녀와 여러 가지 일이 있다 보니, 조건반사처럼 떠오르는 기억이 따로 있었다. 나는 무의식의 목소리에 충실했을 뿐이었다.
그 대가로 성녀의 차게 식은 눈을 마주하게 되었지만.
“……어딜 봐요?”
“포상 주머니?”
팍, 하고 성녀의 손바닥이 내 등짝에 작렬했다. 그간 내 실력이 발전하다 보니 딱히 아프지는 않았지만, 나는 예의상 살짝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성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흥흥거리며 툴툴대고 있었다.
“참내, 괜히 위로해 줬어… 이러다 종교재판에 회부돼도 몰라요?”
“이미 회부됐는데요.”
“참고로 동일 죄목으로 두 번 회부되면 가중처벌을 받아요.”
그것 참 위안이 되는 소리였다.
그렇게 농지거리를 나누던 성녀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내게 물어왔다.
“그러고 보니, 남은 사람들은 어쩌고 혼자 돌아왔어요?”
나는 그 말을 듣고 슬쩍 등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마차를 몰던 성기사 하나만이 원장 수녀와 인사를 나누고 있을 뿐이었다. 마차를 호위하고 있던 나머지 성기사들과 리아, 레이놀드 씨는 없었다.
고아원으로 오던 도중 길이 갈라졌기 때문이었다.
“리아는 마수 시체를 운반할 수단을 구하러 갔습니다. 또 여러 상단과의 조율도 남아있으니까… 레이놀드 씨는 솔직히 잘 모르겠네요. 무슨 할 일이 있다던데.”
내 말에 성녀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두 사람에게는 딱히 관심도 없었던 듯했다.
그리고 다시금 주위의 눈치를 힐끔힐끔 살피더니, 이내 내 귓가에 속삭임이 와 닿았다.
“나중에, 혼자 제 침실로 와요.”
“상을 주시려고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성녀의 속내를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잠시 망설이던 성녀의 입술에서, 맑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또, 가끔은 괜찮아요.”
그 말에 의아한 시선이 여인을 향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 속뜻을 알 것만 같았는데, 또 다시 아리송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러자 성녀는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슬쩍 제 팔로 젖가슴을 받쳐 보였다.
내 동공이 홀린듯이 빨려들어갔다.
“……한 번이나 두 번 정도는, 종교재판에 회부하기 애매할지도?”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성녀가 내게서 멀어져 갔다. 나는 그러고도 한참 동안이나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반드시 성녀의 침실에 한 번 들러야겠다고 결심하면서.
정작 가면을 쓴 괴한을 목격한 인물이 누구인지는 듣지 못해서, 다급히 성녀를 뒤따라가야 했지만 말이다.
**
나는 ‘목격자’를 찾아 고아원 뒤편에 마련된 공터로 향했다. 무성히 자란 잡초들이 관리가 되지 않는 곳임을 드러내고 있었으나, 그 덕에 인적이 드문 장소를 찾는 사람에게는 적당한 안식처가 되어 주었다.
그곳에 소녀가 하나 서 있었다.
넋을 놓은 채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황갈색 눈동자는 꿈을 헤매는 듯도 보였다. 깔끔히 묶어 정리한 검은 머리카락이 등 뒤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셀린 하스터, 내 소꿉친구.
내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목격자’의 정체를 들었을 때는, 이러한 우연이 다 있나 싶을 정도였다. 하필이면 그날 가면의 괴한을 목격한 이가 셀린이었다니.
최근에는 셀린과 단 둘이 대화를 나눌 기회조차 없었던 참이었다.
이 기회에 셀린과 속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어 보자.
그렇게 마음을 먹고 한 걸음을 내딛었을 때였다.
문득 셀린의 모습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멍하니 어딘가를 향하고 있는 눈동자에 초점이 맺혀 있었다. 단순히 경치를 눈에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 지점을 응시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셀린의 시선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 보아도 공터에는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무릎 길이까지 자란 잡초들이 푸르른 색조를 더하고 있을 뿐.
내 고개가 갸웃 기울었다. 이처럼 해결할 수 없는 의문을 맞닥뜨렸을 때의 해법은 간단했다.
당사자에게 물어보면 된다.
저벅저벅 걸음을 옮기던 내 손이 셀린의 어깨 위로 떨어졌다.
“셀린?”
“히야아아아악!”
기묘한 소리와 함께 셀린의 몸이 용수철처럼 튀어올랐다.
어찌나 놀랐는지 온몸의 털이 곤두서기라도 한 태세였다. 몸을 낮춘 채,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셀린의 낯빛에 경악과 공포가 어려 있었다.
내 정체를 확인한 뒤에는 그러한 기색이 많이 가셨지만 말이다.
이내 셀린의 손바닥이 내 등을 강하게 후려쳤다. 내 입에서 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상상 이상으로 강한 완력이었다. 셀린의 지난 노력이 엿보이는 훌륭한 일격이었다.
“아악! 셀린, 너 생각보다 거 강해진…….”
“미, 미, 미쳤어?!”
물론 내 찬사는 셀린에게 닿지 못했다. 그보다도 전에 폭포수처럼 타박이 쏟아져 내렸던 탓이었다.
“왜, 왜, 왜 갑자기 나타나고 난리야! 깜짝 놀랐잖아… 애 떨어지는 줄 알았네.”
“너한테 애가 어디 있어?”
내가 어이가 없어 되묻자, 셀린은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가슴을 폈다. 제 손까지 얹는 폼으로 보아 거리낌 없는 태도를 보이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필이면 성녀를 보고 온 바람에.
묘한 아쉬움이 뇌리를 스쳤으나, 나는 이를 티 내지 않으려 애를 썼다.
“언젠가는 생길 수도 있지! 그러니까 조심해야 할걸?”
“뭘?”
셀린의 검지가 나를 쿡쿡 찌르고 들어왔다. 배시시 웃는 셀린의 입가에는 의미심장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자식은 소중하잖아?”
“뭐, 그렇긴 한데…….”
나는 그렇게 답하면서 셀린의 아이를 상상했다.
엄마를 닮아서 장난을 좋아하려나. 아니지, 어린 시절의 셀린은 얌전한 편이었다. 검을 배우면서 새로운 본성을 개화했다고 봐야 할 정도였다.
딸이 태어난다면 검은 쥐어주지 말아야겠군. 감당이 불가능해질 테니까.
잠시 헛된 망상에 빠져 있던 나는 곧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 보니, 내게는 해결되지 않은 의문이 하나 있었다.
“그보다 셀린, 너 어딜 보고 있었던 거야?”
“응? 어디냐니? 당연히 저곳에 서 있던 여자… 어라?”
의아한 낯빛으로 시선을 돌리던 셀린의 몸이 다시금 폴짝 뛰어 올랐다.
진심으로 놀란 눈치였다. 내 미간이 더욱 좁아졌다.
“어, 어디 갔지? 분명 저기 있었는데… 이안 오빠, 진짜 못 봤어?”
“무슨 소리야? 한참 전부터 너밖에 없었는데. 너 진짜 괜찮은 거 맞아?”
내 걱정스러운 물음에도 셀린은 그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아닌데, 분명 있었는데… 여자가 하나.”
나는 다시금 셀린이 바라보던 자리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어떠한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여인이 서 있었다면 풀이라도 눌려 있어야 할 터였다.
하지만 그러한 기색조차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셀린이 환각을 보았다는 추론이 가장 타당했다.
“셀린, 너 진짜 요즘 많이 힘들구나…….”
“아, 아니라니까! 아니, 아닌가……? 내가 잘못 봤나……?”
이제 셀린조차 헷갈리는 모양이었다. 나는 언젠가 이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환각은 심각한 문제였다. 또 ‘여자’라는 표현이 괜히 마음에 걸렸다.
왜 하필 여자의 환상을 보는 거지?
어차피 기회는 많이 남아 있었다. 그보다 나는 가장 시급한 사안에 대해 질문을 던지기로 했다.
“아무튼 그에 관해서는 이따 이야기하고… 셀린, 너 가면 쓴 괴한을 봤다며.”
“응? 아, 아아! 그랬지, 내가 봤어.”
그런데 내 물음에 답하는 셀린의 태도가 미묘했다.
방금 전까지는 평소와 다름없이 활달한 느낌이었는데, 느닷없이 시선을 피하고 우물쭈물하는 기색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내 눈빛이 미묘해지자, 셀린은 다급히 이유를 주워섬겼다.
“보긴 봤어, 진짜로! 그런데 말이지…….”
볼을 긁적이던 셀린은 자신감 없는 웃음 소리를 흘렸다.
아하하, 하고.
“눈앞이 번쩍! 하더니 기절해 버렸어, 나.”
이건 또 무슨 헛소리야, 씹.
나는 목젖까지 치닫는 욕지거리를 삼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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