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1화 〉 6. 존재 증명(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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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가 빠르게 온기를 잃어갔다. 싸늘한 낯빛의 엘시 선배는 묵묵히 황녀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황녀는 사과조차 제대로 건네지 못했다. 오직 덜덜 떨며 나를 힐끔힐끔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언젠가의 악몽이라도 떠올리는 얼굴이었다. 예전에도 엘시 선배가 이토록 황녀를 몰아붙인 적이 있는 모양이었다. 나로서는 자세한 사정을 알 수 없었지만, 황녀가 공포에 질려 있다는 사실은 명백해 보였다.
우선 나라도 엘시 선배를 만류해 보기로 했다.
“엘시 선배, 진정하시죠. 황녀 전하께서도 악의는 없었을…….”
“우리 삼촌이 암흑교단의 끄나풀이라도 된다는 소리야?”
으득, 하고 이를 갈면서 내뱉은 말이었다.
내 잇새로 절로 한숨이 흘러 나왔다. 사실 엘시 선배의 마음 자체는 이해가 갔다.
엘시 선배는 고위 귀족 출신이었다.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고, 위대한 우수한 삼촌을 두려워하는 만큼 존경하고 있을 터였다. 또 레이놀드 씨는 라이넬라 가문이 자랑하는 두 명의 대마법사 중 하나가 아니던가.
가문에 대한 모욕을 참을 수 있는 귀족은 많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상대가 황족이라면 숙여야겠으나, 상대는 제5황녀 시엔이었다. 우리 사이에서 황녀의 위계서열은 딱히 높은 편이 아니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운 탓이겠지.
지금만 하더라도 황녀는 충격에 빠져 바들바들 떨고 있던 참이었다. 본래라면 정반대의 구도가 나와야 했다. 귀족이 황족에게 모욕적인 표현을 썼다면, 당연히 용서를 빌어야 하는 쪽은 귀족이었다.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엘시 선배가 아니었다.
입술을 짓씹고 있던 엘시 선배의 고개가 이내 푹 꺾였다. 선을 넘었다는 사실 자체는 인지하고 있는지, 더 사나운 말이 뱉어지지는 않았다. 다만 그대로 등을 돌려 외로운 걸음을 내딛었을 따름이었다.
나는 다급히 엘시 선배의 어깨를 붙잡았다.
“엘시 선배, 우리에게는 의무가 있어요.”
구구절절 까닭을 늘어놓을 생각은 없었다. 단지 나는 엘시 선배가 내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랐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버려야 한다.
미래에서 온 ‘나’는 그렇게 말했다. 나 또한 아무것도 버리지 않으려 발버둥쳤지만, 내 손에 묻은 핏물 중엔 한때 전우였던 이의 것도 섞여 있었다.
가족마저 저버리라고는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가족이 배신자라면 버려야 했다. 이는 호오의 영역이 아니라, 인류의 명운이 걸린 문제였다.
일순 머뭇거리던 엘시 선배는, 곧 침울한 음색을 내뱉었다.
“……나도 알아.”
못내 마음에 걸리는 한 마디였다. 나는 이대로 엘시 선배를 따라갈까 하다가, 언뜻 귓가를 스치는 목소리를 들었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럴 생각은 아니었어요. 이안 경이 그렇게 다치고 쓰러질 줄 몰랐어요. 건방지게 굴어서 죄송합니다…….”
황녀가 망가진 인형처럼 사죄의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결국 내 선택은 황녀 쪽으로 기울었다.
엘시 선배는 그나마 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반면 황녀는 누가 봐도 과거의 상처를 자극당한 모습이었다. 나는 한동안 황녀를 달래 주기로 했다.
엘시 선배가 떠난 이후, 나는 여전히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 황녀에게
“황녀 전하, 괜찮으십니까?”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흑, 흐으윽…….”
이제 황녀의 눈에는 이슬까지 맺혀가고 있었다. 황제의 핏줄로부터 눈물이 나오게 하다니, 귀족으로서 불충도 이만한 불충이 없었다. 나는 어떻게 황녀를 달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웃긴 이야기라도 해볼까?
그러자 문득 내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최근에 있었던 일 중에는 가장 우스운 편에 속하는 이야기였다.
“황녀 전하, 그러고 보니 들으셨습니까? 아카데미에 제 모양을 본뜬 상품이 유행 중이라던데…….”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도대체 누가 그딴 걸 만들었는지 모르겠다며 농을 던질 셈이었으나.
내 말을 들은 황녀의 떨림이 이내 우뚝 멎어 버렸다. 내가 의아한 눈빛을 하고 있자, 황녀는 물기가 사라진 해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앗, 그거 제가 만들었어요.”
당신이었냐.
나는 그저 헛웃음을 삼키는 수밖에 없었다.
늘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었다.
범인은 언제나 근처에 있다. 가면을 쓴 괴한도 마찬가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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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시 선배는 멀리 있지 않았다. 어차피 고아원 안에서 인적이 드문 곳은 많지 않았던 탓이었다.
아이들마저 식사를 하러 떠난 운동장.
그 구석에 엘시 선배가 우울한 낯빛을 하고 앉아 있었다. 고깔모자마저 힘이 없어 비실비실해 보일 정도였다.
나름대로 고민을 많이 해본 모양이었다.
황녀의 추리가 옳은지, 어떤지. 아마도 부정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궁리했겠지.
그럼에도 엘시 선배의 기분이 울적한 그대로라.
물어보지는 않았으나, 그 결론이 어땠을지는 알 만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부정할 수 없었으리라. 최소한 확인이 필요하다는 명제 자체에는 동의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가족을 의심해야만 하는 상황.
누구라도 달갑지는 않을 터였다. 그것이 어린 시절부터 동경해 왔던 영웅이라면 더더욱.
나는 말없이 엘시 선배의 옆자리에 주저앉았다.
“얼마 전에 레이놀드 씨와 상행을 다녀왔어요.”
굳이 말을 돌릴 이유는 없었다. 엘시 선배는 꾸밈없는 사람이었고, 그만큼이나 직설적인 표현이 유효했다.
다만 다짜고짜 레이놀드 씨를 욕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 또한 알고 있었다. 레이놀드 씨는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그것이 고작 위장에 불과할지라도, 짧은 시간이나마 함께한 전우가 아닌가. 조카 앞에서 뒷담화를 늘어놓을 상대는 아니었다.
또, 레이놀드 씨가 ‘가면의 괴한’이라는 주장 또한 가설에 불과하고.
“잘 싸우던데요. 말 그대로, 혼자 전장을 뒤집어 버리더라고요.”
“……’대마법사’니까.”
우울한 와중에도, 엘시 선배는 나의 대화 요청에 순순히 응해 주었다.
나는 침묵이라는 언어에 순종하기로 했다.
“대마법사란 그런 존재야. 논리와 수식을 초월한 이들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거든. 세계를 언어와 숫자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직관으로서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그 안에 오롯이 세운 사람들.”
“엘시 선배도 되고 싶습니까?”
질문거리조차 되지 못하는 맞장구였다. 어느 마법사가 대마법사의 칭호를 흥모하지 않겠는가.
엘시 선배 또한 그 예외는 아니었다.
“멋있잖아? 누가 뭐라 해도, 제 자신의 길을 찾아내 우뚝 서다니. 누구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홀로 강한 존재들이란 뜻이야.”
“독특한 감상이네요.”
“어린 시절부터 동경해 왔으니까.”
음영이 져 있던 엘시 선배의 눈동자에 서서히 빛이 되돌아오고 있었다. 울컥, 하고 치민 감정이 언어가 되어 토해졌다.
“그런데 우리 삼촌이 암흑교단과 거래를 했다고?! 이미 대마법사의 경지까지 올랐는데……!”
"용병 시절에, 동료를 모두 잃으셨다더군요."
이제 엘시 선배가 침묵을 지킬 차례였다.
가족에겐 차마 밝힐 수 없던 이야기, 열심히 감춘 흉터조차 전장 앞에서는 무용하다.
레이놀드 씨가 태연히 고백한 이야기였다. 그래서 나 또한 태연히 말하고자 노력했다.
"레이놀드 씨도 무적은 아니더군요. 대마법사라도, 한계는 있습니다."
엘시 선배는 반박하지 않았다.
다만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떨구었을 뿐이었다. 나이를 먹다 보면, 알기 싫어도 알 수밖에 없는 사실이 있다.
누구도 홀로 생존할 수는 없다.
의지할 존재가 필요하고, 때로는 잘못된 선택을 하기도 한다.
레이놀드 씨도 예외는 아니었다.
엘시 선배는 비명을 꾹꾹 눌러 참았다. 그리고 종래에는, 눈동자를 활활 불태우며 말했다.
"그럼 시험해 봐."
증오, 분노, 결의와 신뢰가 뒤섞인 음성이었다. 엘시 선배는 이를 아득바득 갈고 있었다.
"우리 삼촌이 배신자인지, 아닌지… 직접 실험해 보면 되잖아?"
맞는 말이었다. 다만 내게 남은 의문은 하나였다.
"어떻게?"
해답은 간단했다. 엘시 선배는 기다렸다는 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주인님, 저 사랑하시죠?"
애교까지 섞어 가면서.
차마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내 신세가 원망스러웠다. 눈을 찡끗하면서도 불안에 떠는 그 허세가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아무 말도 없이 엘시 선배를 끌어안고 말았다.
내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는지, 엘시 선배의 몸이 딱딱히 굳었다. 그럴수록 자그마한 몸이 꼭 껴안길 뿐이었지만.
반항은 곧 멈췄다.
훌쩍이는 소리를 배경으로, 나는 단언했다.
"제가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대책은 없지만 그렇게 말했다. 품에서 엉엉 우는 엘시 선배의 모습에 머리가 새하얘졌으니까.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밤이 왔다.
저 멀리 달과 별이 보였다. 길은 야트막한 산으로 이어지고, 중년의 사내가 흐릿한 선을 따라 걸어오고 있었다.
갈빛 머리카락, 푸른 눈동자.
그의 낯빛은 피로와 의문에 절어 있었다. 그조차도 잠시.
중년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느닷없이 눈앞에 괴한이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새하얀 가면이 달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눈에 띄는 것은, 저 가면을 쓴 인물의 체격.
어디서 많이 본 듯했다.
"……뭐하자는 건가?"
허, 하고 레이놀드가 헛웃음을 머금으며 마주한 사내.
그는 조카딸의 약혼자와 비슷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그 실력마저 비범했다. 갈무리된 기세가 송곳처럼 레오놀드를 찌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면의 사내는 얼마쯤 머뭇거리기만 했다. 마치 할 말이 있는데 아껴야만 한다는 듯이.
한참 후, 가면의 사내가 메마른 목소리를 내뱉었다.
"네 조카 쩔더라?"
"이, 개새끼가!!!"
레이놀드는 바로 눈이 뒤집어져서 달려들었다.
엘시의 계락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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