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432화 (432/649)

〈 432화 〉 6. 존재 증명(20)

* * *

달빛의 커튼이 내려앉은 사이, 밤의 무대 위에 두 사내가 서 있었다.

새하얀 가면을 쓴 검사가 하나, 그리고 장신의 중년 마법사가 또 하나.

둘의 분위기는 대조적이었다. 검사가 평정을 유지하고자 애를 쓰는 한편, 마법사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 사실이 한기가 되어 골수를 침범하고 있었다. 떨리는 심장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가면을 쓴 검사는 바로 나였으니까. 더불어 맞은편에서 살의를 줄기줄기 흩뿌리는 중년은 무려 ‘대마법사’의 호칭을 받은 실력자였다.

긴장이 되지 않는 쪽이 더 이상했다.

그리고 내 본능이 옳았다는 사실은 어김없이 증명되었다.

아차, 할 틈새조차 없었다.

내가 직감에 의지해 몸을 던진 직후, 폭음이 울려 퍼졌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비산한 흙과 돌이 사나운 폭우가 되어 쏟아져 내렸다.

폭심으로부터 파직거리는 전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미처 닦아내지 못한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격발 직전까지 전조조차 눈치 채지 못했다.

아무리 영창이 필요 없다고 해도, 이토록 고속으로 시전되는 마법을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는 용병 출신이라는 레이놀드 씨의 과거와 관련이 되어 있을 확률이 높았다.

용병은 언제나 최전선에 서야 한다.

돈을 주고 그들을 고용하는 이유란 대개 그랬다.

귀한 인력을 위험한 곳에 투입할 수는 없었으니까, 죽어도 상관없는 존재들을 보내는 것이다. 그래서 찾는 이들이 바로 ‘용병’이라는 족속이었다.

이처럼 목숨을 대가로 벌어먹는 삶이었다. 분초를 다투는 전장에서 여유 따위는 사치에 불과했다. 어떻게든 시전 시간을 줄이고 줄이려는 노력이 이어졌겠지.

그 결과물이 지금 내 눈앞에 있었다.

지반이 포탄이라도 맞은 듯 터져 나가 있었다. 내 도발을 들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에 이루어진 기습이었다. ‘즉시’라고 불러도 무방할 만큼 짧은 시간이었다.

분노한 대마법사가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서는, 그 찰나만으로도 충분했다.

곧이어 노호성이 내 귓전을 강타했다.

“감히, 그 더러운 입으로 엘시를 모욕해?! 라이넬라의 핏줄을 건드린 죄, 목숨으로 갚아라!”

무어라 대답할 틈도 없었다. 그저 나는 다시금 몸을 던져야 했다.

쾅, 쾅, 쾅!

이번에는 연달아 세 곳의 지반이 터져 나갔다. 잔존하는 전류만으로도 근육이 움찔거리며 떨릴 만큼의 위력이었다. 직격이라도 당한다면 기절은 확정이었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내 뇌리는 필사적으로 사고를 반복했다.

황녀의 추리가 맞는 걸까?

가능성은 충분해 보였다. 이토록 강력한 마법을 영창조차 없이 난사하는 인간이었다. 아이린 경이든, 셀린이든 상대가 될 턱이 없었다.

그나마 나라서 버티고 있는 판이었다.

그러나 내 고민은 오랜 시간 이어지지 못했다. 연달아 세 차례의 폭음이 울려 퍼지는 동안, 레이놀드 씨의 주위로 마력이 집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중 영창.

내 손이 본능적으로 허리춤을 더듬었다. 최대한 정체의 노출을 피하고 싶었으나, 지금은 무언가를 숨길 계제가 아니었다.

대기가 비명을 내질렀다.

내쏘아진 빛의 궤적이 허공을 찢어발기며 일직선을 그린다. 명백한 의도가 드러나는 궤도, 그럼에도 레이놀드 씨의 낯빛은 한 점의 흔들림조차 없었다.

그 여유의 비밀은 곧 밝혀졌다.

캉, 하고 뇌전의 채찍을 얻어맞은 손도끼가 공중을 한 바퀴 돌았다. 전하가 물리력을 행사하는 현실에 내가 넋이 나간 사이, 허공을 떠돌던 손도끼가 자석에 이끌리듯 채찍의 끄트머리로 빨려 들어갔다.

“과연, 한가닥 솜씨는 있구나! 물론, 내 조카를 모욕할 정도는 아니지만!”

감탄인지 조롱인지 모를 소리였다.

사실 그보다 시급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뇌전의 채찍이 커다란 궤적을 그리며 내게 날아들고 있었다.

내 망막 위로 가상의 궤적이 그려지고 있었다.

검으로 요격해?

불가능했다. 검은 전도체였다. 저 무시무시한 채찍에 닿는 순간 감전은 확정이었다.

차라리 손도끼를 던질 수 있다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내 손도끼는 채찍의 일부가 되어 내게 날아들고 있었다. 그 원리는 짐작하기 힘들었지만, 정중동의 묘리조차 제대로 통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몸을 낮추고 땅을 구르는 수밖에 없었다.

뇌전의 채찍에 이변이 감지된 것은 그때였다.

길쭉이 이어진 전하의 실선이 난데없이 토막토막 끊어졌다. 그렇게 여러 마디로 분열한 채찍은 창의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과연 대마법사의 호칭을 받은 인물다웠다. 마법을 자유자재로 변용하고 있지 않은가.

감탄과 별개로, 나는 무심코 욕지거리를 내뱉을 뻔했다. 검을 쥔 손에 자연스레 힘이 들어갔다.

어차피 피할 수는 없었다.

시야에 들어오는 뇌전의 창은 총 여섯. 각 창이 저마다의 궤도를 그린다고 가정할 때, 도주로는 존재하지 않았다.

상대는 전장에서 구를 대로 구른 노련한 마법사였다. 당연히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야 옳았다.

은빛의 오러가 들불처럼 타오른다.

검신을 뒤덮은 불길은 예전에 비해 명도와 채도가 현저히 증가해 있었다. 위력 또한 마찬가지일 터였다.

실험해 보지는 않았으나, 내가 의지할 구석은 이뿐이었다.

처음에는 도발만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느덧 나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조카사위를 죽이겠냐만은.

죽기 직전에는 가면을 벗을 생각이었다. 인연을 맺은 동료의 삼촌을 도발하다 죽는 것만큼은 사양이었다. 그것만큼 개죽음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럼에도 이대로 얌전히 가면을 벗어줄 생각은 없었다.

아직 정보 수집이 미진했다. 보다 더 흥분하고, 보다 더 접전을 벌여야 했다. 그래야 레이놀드 씨의 진정한 실력이 드러날 테니까.

우선 나는 비명을 내질렀다.

“죽일 셈입니까!”

“그럼 살 생각이었나? 감히, 우리 엘시를 건드려놓고……!”

내 뻔뻔한 발언에 레이놀드 씨의 목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지나치게 흥분한 탓인지, 집약된 마력이 다소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그 틈을 노려 오러에 정신을 집중했다.

결(?)과 해(?).

대륙에 단 셋밖에 없는 마스터의 비전이었다. 나는 이 기술에 잠재된 힘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하나.

둔중히 흐르는 시간 속에서 자그마한 실선이 그어졌다. 창이 내리꽂힐 궤적이 미리 보이고 있었다.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던 오러가 단단히 압축되었다. 차라리 은빛의 수정이라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전력을 다해 검을 사선으로 휘둘렀다.

결(?).

그러자 캉, 하고 튕겨나가는 뇌전의 창.

전하는 은빛의 칼날을 침범조차 하지 못했다.

처음으로 레이놀드 씨의 낯빛에 균열이 일었다.

“뭐라?”

하지만 아직 놀라기는 일렀다.

허공을 핑그르르 돌던 뇌전의 창이 다시금 나를 겨누었다. 여섯 개의 창이 동시에 내 급소를 노리고 쏘아질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내 검신을 단단히 붙잡고 있던 오러가 안개처럼 풀어 헤쳐졌다.

해(?).

휘둘러지는 검의 궤적을 따라 은하수가 펼쳐졌다. 은빛의 안개가 닿은 뇌전의 창이 불안정하게 흔들리더니, 검에 닿을 무렵에는 와장창 깨져나갔다.

나조차도 깜짝 놀랄 만한 위력이었다.

대마법사의 마법을 이토록 간단히 분쇄하다니?

전력을 다한 마법은 아니겠으나, 고도로 응집된 마력을 흩어놓았다는 점이 중요했다. 더구나 ‘해’에 이르러서는 영향을 미치는 범위까지도 넓었다.

깨져 나간 전하의 파편 사이로 손도끼 하나가 튕겨져 올랐다.

그리고 탁, 하고 하늘로 치켜든 손에 안착하는 나의 애병.

레이놀드 씨는 한결 신중해진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은빛 오러에, 깊은 현기가 느껴지는 비전 기술이라…….”

그의 푸른 눈동자가 내 손에 들린 손도끼에서 우뚝 멎었다. 이쯤 되면 정체를 숨기는 것은 무의미한 짓이나 다름없었다.

이내 묵직한 질문이 던져졌다.

“이게 무슨 짓인가?”

나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무어라 말을 해야 할까 했지만, 당장 떠오르는 생각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더 해보시겠습니까?”

끓어오르는 전의를 꾹꾹 눌러담은 목소리였다.

이제야 슬슬 감이 잡혔다. 내게 필요한 것은 마수나 마인을 치는 경험이 아니었다.

보다 더 강한 존재들.

진리의 심처에 손을 댄 이들과의 전투가 모자랐다. 암흑교단이 만든 괴물 따위는 내게 그러한 경험을 선사해 줄 수 없었다.

레이놀드 씨는 내 반문에 흐, 하고 헛웃음을 머금었다.

눈을 감은 그의 낯빛이 가라앉았다. 맥이 탁 풀린 듯 그의 건장한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러기를 얼마쯤.

다시금 뜨인 대마법사의 눈은, 맹렬한 푸른 불길로 타고 있었다.

마안(??), 지극히 강한 마력을 품고 있는 존재가 본심을 드러낼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그의 손이 망토에 가려진 품속을 더듬었다.

“……좋네. 마침 우리 엘시를 데려간 도둑놈을 한 대 패주고 싶던 참이었거든.”

“언제는 제발 좀 데려가라더니?”

“웬 놈팽이가 엘시를 말짱 홀린 뒤인데, 그럼 어쩌란 말인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참아야지.”

휘리릭, 탁.

중년의 사내가 꺼낸 막대가 허공에서 회전을 마치고 떨어졌다. 짤막한 칠흑의 막대는 기묘할 정도로 주위의 빛을 흡수하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귀한 물건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 막대의 출현을 기점으로 숨이 막힐 듯이 마력의 밀도가 올라가기 시작했으니까.

마치 물기를 잔뜩 머금은 대기 속을 유영하는 듯했다. 폐부가 거칠게 부풀며 가까스로 뇌로 산소를 전달했다. 밀물이 밀려오는 갯벌 한가운데에 서 있으면 이러한 기분일까.

하나, 둘씩.

푸른 전하로 타는 원이 대마법사의 뒤로 도열하기 시작했다. 달빛 따위는 보이지도 않을 만큼 강렬한 광원이었다. 총 여덟 개의 원이 중년의 배후로 떠올랐다.

원형의 배치, 진리와 완전성을 상징하는 도형이었다.

내가 고조되는 심장 박동을 억누르고 있자, 레이놀드 씨는 태연자약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하나만 묻겠네… 그 말, 사실이었나?”

무슨 말이냐고, 굳이 되물을 필요는 없었다.

처음에 내가 던진 도발의 말에 대해서일 터다. ‘네 조카 쩔더라’라고 하는, 살면서 몇 번 입에 담아본 적도 없는 천박한 어휘였다.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내가 어찌 엘시 선배와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이어질 수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심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네, 장난 아니던데요? 특히 살결이 부드러워서…….”

“그렇군.”

알겠다는 듯 고개를 몇 번 주억거리던 레이놀드 씨는, 이내 새파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맹수의 눈빛을 하고서.

“사형일세.”

그래, 이래야 재미있지.

내가 짙은 미소를 깨문 직후, 시야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빛의 폭풍이 몰아닥치고 있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