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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433화 (433/649)

〈 433화 〉 6. 존재 증명(21)

* * *

마력에 대해 밝혀진 바는 많지 않았다.

수많은 이들이 연구에 매진하고 있으나, 그 원천조차 불분명한 힘이었다. 모든 비밀을 밝혀낼 때까지는 시일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오랜 역사 속에서 체감한 사실이 하나 있긴 했다.

마력은 위험천만한 힘이다.

정제되지 않은 날 것의 상태일 때도 그렇지만, 가장 위험할 때는 따로 있었다.

바로 누군가 이 미지의 힘에 통달했을 때.

세간에서는 이러한 경지를 ‘하이 익스퍼트(high expert)’, 혹은 ‘대마법사’라 불렀다.

온 대륙을 통틀어 스무 명 남짓한 괴물들이었다.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마스터’를 목전에 두었다고 할 수 있었다.

지금 내 앞에서 진심으로 내보이는 인물 또한 이러한 ‘괴물’ 중 하나였다.

빛과 열의 폭풍이 오감을 새하얗게 물들인다.

시야뿐만이 아니었다. 소리도, 촉감도 그 압도적인 폭력 앞에 지배당하고 있었다. 단 한 치의 틈조차 허용하지 않는 굉음과 열기가 내 망막을 뒤흔들며 내질러졌다.

차라리 뇌전의 격류를 맞이하는 감각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검을 치켜 세웠다. 일직선으로 선 검신을 중심으로 은빛의 오러가 집결하기 시작했다.

그 직후, 벼락의 폭격이 내 전신을 강타했다.

으득, 하고 악물어진 이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순 기절할 뻔했지만, 어떻게든 정신을 붙잡은 내 몸이 다시금 땅을 딛고 섰다.

파직거리는 전하가 위협적인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따금씩 튀기는 전류의 파편이 근육을 수축시키며 통증을 전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버티고 있었다.

그 점이 중요했다.

내가 아직 밀리지 않고 있다는 사실.

비록 눈동자에는 핏발이 선 지 오래고, 검을 쥔 팔은 덜덜 떨리고 있었으며, 닫힌 잇새로 끊임없이 신음이 새어 나오고 있었지만.

우선 한 번은 견뎌낼 수 있었다.

번쩍이는 전하 탓에 제대로 눈조차 뜨지 못하는 나를 두고, 레이놀드 씨는 드물게도 달아오른 목소리로 말했다.

“벌써부터 우는 소리를 내면 곤란하지… 아직 한참 더 남아있으니까!”

이미 고막은 전하가 튀는 소리로 구워지다시피 하고 있었다. 분명, 여타의 소음 따위에는 귀를 기울일 여유조차 남아있지 않을 텐데.

이상하게도 레이놀드 씨의 음색만은 선명히 다가왔다.

생존 본능일지도 몰랐다. 당장 내 목숨은 경각에 달려 있었고, 살기 위해서는 아주 사소한 정보 하나조차 놓칠 수 없었으니까.

나는 차라리 눈을 감아 보기로 했다.

새하얗게 달아오른 시야는 눈꺼풀이 닫힌 이후에도 주홍빛 잔상을 남겼다. 이윽고 세상이 칠흑으로 물든 후에야, 나는 레이놀드 씨가 무얼 하는지 깨달았다.

빙글, 하고 고농도로 농축된 마력의 구체가 허공에서 원을 그리고 있었다.

그 궤적을 따라 하나둘씩 뇌전의 창이 나타났다. 그 숫자는 수십, 아니 그 이상인가.

아무리 청각에 정신을 집중해도 영창을 하는 소리 따위는 들려오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하고 있는 거지.

강한 의혹이 차올랐으나, 내게 고민을 할 여유 따위는 남아있지 못했다. 오직 온 마력을 검신에 밀어넣었을 뿐.

은빛의 오러가 더욱 맹렬한 불길이 되어 타올랐다.

서서히 일렁이던 불길이 단단한 금속처럼 응집될 무렵, 하늘에는 수백 개에 달하는 죽음의 별이 떠 있었다. 하나하나가 담고 있는 마력이 무시무시했다.

직격 당하면 기절이나 부상으로 끝나지 않는다.

무조건 사망이었다.

전력을 다해 상대해 주기를 바라긴 했지만, 설마 진짜로 살수를 쓸 줄이야.

나 또한 전력으로 임하는 수밖에 없었다.

온 힘을 다한 횡베기가 정체되어 있던 전선을 단숨에 밀어붙였다.

그리고, 세상이 반으로 쪼개진다.

은하수가 어둠에 잠긴 대기를 가르고 있었다. 새하얀 별의 조각들이 파편처럼 흩어져 내렸다. 이 모든 것이 박살 난 마력의 잔여물이었다.

시야가 시원할 만치 맑아졌다. 저 멀리에서, 칠흑의 막대를 나를 겨누는 레이놀드 씨와 눈을 마주할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반갑다는 의미로 입꼬리를 씨익 말아 올렸다.

어차피 가면 때문에 보이지는 않겠지만, 눈빛이 통하니 마음의 언어도 통하길 바라는 수밖에.

이내 내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죽일 셈입니까!”

“그러니까 말했잖나… 사형이라고!”

그와 동시에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안개처럼 일렁이던 오러가 다시금 결집한 것은 그때였다. 내 검이 뇌전의 창을 후려칠 때마다 캉, 캉, 하는 충돌음이 울려 퍼졌다. 주로 내 검이 내지르는 비명이었다.

검신이 파르르 떨리며 내 팔까지 옅은 전류를 전달했다.

아무리 결(?)을 다룬다고 해도 이만한 물량을 감당하기에는 무리였다. 심지어 뇌전의 창은 나 하나만을 겨누고 있지도 않았다.

푹, 푹, 푹.

내 옆을 스쳐 지나간 뇌전의 창이 지반을 간단히 파고들었다. 마치 송곳이 푸딩을 찌르듯 손쉽게 내리꽂힌 창은 이내 새하얀 빛으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뻔했다.

폭음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이미 인접한 거리에서 일어난 폭발이었다. 삐이이­ 하는 이명만이 귀를 울릴 뿐이었다. 일순 정신을 잃고 땅을 짚고 일어나려는데, 무릎이 꺾여 다시금 진창을 파고들었다.

주위는 이미 엉망진창이었다.

인적 드문 여로는 이미 곳곳에 구덩이가 형성되어 있었다. 단단하던 지반은 터져 나가고 뒤집어지며 보드라운 토양으로 화한 지 오래였다.

단 몇 초만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이것이 대마법사의 힘인가, 나는 흐릿한 시야를 정면으로 고정했다.

그곳에는 엄숙한 얼굴을 한 레이놀드 씨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묵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더 해보겠나?”

내가 레이놀드 씨를 도발할 때 써먹은 대사였다.

흐, 하고 내 입에서 흐릿한 웃음이 토해졌다. 누가 봐도 내 실력은 아직 대마법사에 미치지 못했다.

마스터를 목전에 둔 마법사가 ‘대마법사’라 불리듯이, 검사 또한 ‘하이 익스퍼트’라는 칭호가 존재했다. 오러를 개화하고 자유자재로 다루는 이가 ‘익스퍼트’라면, 그보다도 격이 다른 존재가 바로 ‘하이 익스퍼트’였다.

안타깝게도 나는 아직 그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하지만 언젠가 내 길은 그곳으로 이어지리라. 지금만 하더라도 내 눈앞에 잡힐 듯 말 듯 그 길의 초입이 보이고 있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비틀거리긴 했지만, 아직 견딜 만했다.

“……당연히 그래야죠.”

“죽더라도 원망은 하지 말게.”

이미 삼중의 마법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늘에는 뇌전의 구체, 정면으로 다가오는 것은 뇌전의 파도, 지면으로부터는 끓어오르는 뇌전의 그물.

의도는 명백했다.

그물로 나를 포박하고, 뇌전의 파도로 내 검을 묶어둔 뒤, 뇌전의 구체로 나를 요격하겠다는 뜻이었다. 이토록 친절하게 밑바닥을 보여 주는 심계는 드물었다.

그 함의 또한 명확했다.

어차피 내가 이를 뚫어낼 수 없으리라 생각하고 있겠지.

나는 후우, 하고 심호흡을 하며 검극을 바로 세웠다. 뇌전의 공습은 그때부터 재개됐다.

쾅, 하고 쏘아진 뇌전의 해일이 포탄처럼 검신을 강타했다. 그새 지직거리며 끓어오르는 대지에, 나는 허리춤에 매고 있던 손도끼를 내던지듯 박아 넣었다.

그리고 발바닥으로 손도끼를 누르며, 오러를 분산시키기 시작했다.

이게 되나?

오러는 심장으로부터 팔, 손을 거쳐 무구로 전달된다. 지금껏 그 외의 방법을 시도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내심은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왜냐하면 전신에 오러를 퍼트리는 것은 검사의 기본 소양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이상으로 걱정이 되는 지점은 따로 있었다.

나는 두 개의 오러를 운용할 심산이었다. 검으로는 결(?)을, 손도끼로는 해(?)를.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지금껏 그러한 방식으로 오러를 다룬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내가 이토록 무모한 시도를 하는 이유는 하나.

결과 해는 본래 하나의 비전이었다. 이를 내가 임의로 두 개로 나누어 사용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물며 결과 해의 원류는 마도의 끝을 보았다 전해지는 대마녀였다.

이중 영창도 당연히 염두에 두었으리라.

그리고 나의 믿음이 옳았는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밝혀졌다.

“뭣……!”

레이놀드 씨가 당황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끓어오르는 전하의 그물에 맞서, 은빛의 오러가 지면을 가르며 빛을 뿜고 있기 때문이었다.

뇌가 팽팽 돈다. 혈도를 타고 흐르는 마력이 이리저리 날뛰며 통증을 일으켰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나는 웃고 있었다.

되는구나.

쾅, 하고 대지가 갈라지며 지반이 터져 나갔다. 안개처럼 퍼져 나가는 은빛 오러에 뇌전의 그물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폭발의 반발력으로 떠오른 손도끼가 내 남은 손에 붙잡혔다.

이후 망설임 없이 이어지는 투척, 회전하는 손도끼가 은빛 안개를 흩뿌리며 뇌전의 구체를 연타하기 시작했다.

캉, 캉, 캉!

날카로운 충돌음과 함께 하나둘씩 뇌전의 구체가 터져 나갔다. 금색으로 물든 마력의 입자가 반딧불이처럼 하늘하늘 떨어져 내렸다.

내 검신을 달구고 있던 뇌전의 파도가 그제야 균열을 보였다.

레이놀드 씨의 당혹감이 마법에 그대로 반영된 듯했다. 나로서는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카각, 하고 검날이 뇌전으로 이루어진 원통을 파고든다.

이미 너무 많은 마력을 썼다. 이전처럼 단숨에 이 마력의 파도를 지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가로지르는 것뿐이라면?

검이 뇌전의 해일을 가로막고 있는 사이, 내 몸이 측면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이를 악물고 땅을 박차자, 칼날이 원통형의 마력을 횡으로 절단했다.

질주, 질주, 질주!

오직 하나의 일념으로 뭉친 내 시야가 차츰차츰 좁아졌다. 숨소리가 둔중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계의 시간이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

흑백으로 물든 세상 속을 오직 나만이 질주하고 있었다.

단 몇 걸음, 도약하듯 달린 결과 어느덧 레이놀드 씨가 내 눈앞에 자리 잡았다.

이대로 검을 휘두르기만 하면 끝이다.

그렇게 승리를 확신한 순간.

빙글, 하고 칠흑의 막대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 직후.

하늘을 유영하던 뇌전의 구체 두 개가 떨어져 내렸다.

나와 레이놀드 씨의 사이로.

폭음, 한계를 모르고 내달리던 내 몸이 그제야 후방으로 내던져졌다. 이 충격으로부터 레이놀드 씨도 자유롭지는 못했는지, 그 또한 땅을 굴러야 했다.

다시금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헐떡이면서, 나는 폐부를 쥐었다. 너무나 아팠다. 이만큼 전속력으로 질주한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레이놀드 씨 또한 휘청이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입에서 옅은 신음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방금, 그건 뭐였지……?”

내 의문에 잠긴 시선이 레이놀드 씨를 향했다. 그는 무척이나 놀란 기색이었다.

“순간적으로 시간이 멈춘 것 같았는데… 아니지, 그건 불가능해.”

그렇게 레이놀드 씨는 제멋대로 꺼낸 화두를 제멋대로 정리했다. 몇 번 고개를 휘젓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제정신을 되찾았다.

그의 눈동자에 다시 푸른 불길이 일렁이고 있었다. 오히려 이전보다도 더욱 강렬한 빛의 파장이었다.

“훌륭하네. 자네 실력은 인정하지, 엘시를 데려갈 만해.”

“그럼, 허억… 이제 끝입니까?”

토막 난 호흡으로 가까스로 꺼낸 반문에, 레이놀드 씨는 우습다는 듯 헛웃음을 삼켰다.

“하, 재미는 재미대로 보고 말인가? 그것도 자네만… 이보게, 조카사위.”

쿵, 하고 나는 어딘가에서 이는 충격음을 들은 듯했다.

하지만 정작 어디에서도 충격파는 일어나지 않아서, 내 눈이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뒤이어 웅웅거리며 대기가 떨리기 시작했다.

온 세상의 마력이 한 곳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그 중심을 눈치 채고, 말없이 레이놀드 씨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에서 타오르는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거세져 있었다.

"나는 아직 진리의 끝에 도달하지 못했네. 하지만 그 끄트머리는 보았지… 그때, 내가 어떤 감정을 느꼈을 것 같나?"

내 몸이 당장이라도 넘어질 듯 휘청거리며 일으켜졌다.

질풍이 마구잡이로 몰아친다. 아직 마법은 시전조차 되지 않았는데, 그 전조만으로도 이미 폭력이었다.

대마법사의 망토가 엉망진창으로 나부낀다.

"공포였네."

그리고 씹어뱉듯 이어지는 고백들.

"절망이었고, 또 무력감이었지… 그 위대한 법칙 앞에서, 인간이란 얼마나 하잘 것 없고 모자란 존재란 말인가? 온힘을 다해 발버둥을 쳤지만, 나는 끝없는 무저갱 속으로 빠질 뿐이었네."

마법사의 등 뒤로 도열한 원진들이 빛과 함께 회전을 재개했다. 빠르게, 더 빠르게.

파직거리며 터져 나오는 전하가 눈이 부시도록 강렬해질 때까지.

격이 다르다.

나는 그저 전율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바로 진리의 파편을 본 자의 전력이었다.

"그래서 도망쳤네… 나라는 존재 자체가 진리의 바다 속에서 영영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아서. 나는 결국 스스로를 증명하지 못했던 거야."

그와 동시에 마법사는 들고 있던 칠흑의 막대를 까딱였다.

와장창, 하고.

들릴 리 없는 파열음이 들려왔다. 내 눈이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밤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유리처럼 금이 죽죽 간 하늘의 틈새로 파직거리는 전하가 침범하고 있었다. 먹빛의 세계를 전부 먹어치우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저 너머에는 도대체 무엇이 존재하고 있을까.

무한한 뇌전?

어느 쪽이든 레이놀드 씨가 전력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은 명확했다. 그 외에 이 이적을 설명할 수단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생에 그 어느 때보다 열린 기감 사이로, 어떠한 냄새가 얼핏 코끝을 스쳤다.

암흑교단.

나는 어째서인지 그 이름을 떠올렸다. 정작 눈앞의 광경에 압도당해 금세 잊어버리고 말았지만 말이다.

대마법사는 사형을 언도하는 판관처럼 물었다.

"어디, 내 추레한 발버둥을 한 번 보겠는가?"

마른침이 내 목울대를 꿀꺽, 하고 치고 지나갔다.

보아서는 안 된다.

반드시 죽는다. 이 마법은 내가 감히 견줄 수도 없을 만큼 압도적인 위력을 지니고 있을 터였다.

하늘 그 자체가 무너지는 판이었다.

그 밑을 살아가는 미물 따위가 반항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왜.

그 너머가 이토록 보고 싶단 말인가. 무너져 내린 하늘의 뒤로 드러날 그 풍경이.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미처 대답을 고를 수가 없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대마법사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똑똑히 눈에 담아두게… 아주 짧은 찰나밖에 보여줄 수 없겠으나, 지금의 자네라면……"

바로 그때였다.

빡, 하고 경쾌한 타격음이 난데없이 울려퍼진 것은.

내 눈이 멍하니 그 진원지를 향했다. 그곳에서는, 레이놀드 씨의 신형이 풀썩 기울고 있었다.

일순 내 사고가 정지했다. 도저히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다.

땅 위로 엎어진 대마법사의 뒤로, 거친 숨을 몰아쉬는 흑발의 소녀가 드러났다.

황금빛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도 빛이 나고 있었다. 씩씩거리는 그녀의 손에 들린 삽이 유독 눈에 띄었다.

그제야 내 입에서 아, 하는 맹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어렴풋이 이해가 갔다.

소녀는 몸을 파르르 떨며 노호성을 내질렀다.

"야, 이… 미친 영감탱이가! 지, 지금 누굴 죽이려 든 거야?! 감히 우리 오빠를… 죽어, 죽어, 죽어… 죽어엇!"

팍, 팍.

삽날이 기절한 중년의 몸을 두어 번 더 두들겼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질풍은 그치고 하늘의 균열도 사라져 버렸다.

나는 허탈한 미소를 짓는 수밖에 없었다.

과연, 화가 난 여동생은 무적이었다.

더구나 느닷없이 나타난 손님은 리아뿐만이 아니었다.

리아의 등 뒤로 낯선 그림자가 보이고 있었다. 안경을 쓴 채,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젊은 남성.

아무래도 사정을 청취해야 할 듯 싶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오빠로서 말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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