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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434화 (434/649)

〈 434화 〉 6. 존재 증명(22)

* * *

짧은 전투가 남긴 흔적은 참혹했다.

곳곳이 터져 나간 공터는 흉물스럽기 짝이 없었고, 무더기로 쏟아진 흙무더기와 자갈이 난잡하게 널려 있었다. 이를 복구하기 위해서는 꽤 많은 비용이 필요하리라.

물론 이는 후일 다루어야 할 문제에 불과했다. 나는 일단 흥분한 리아를 만류하고, 기절한 레이놀드 씨를 등에 업기로 했다. 이대로 두면 시체를 하나 치워야 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엄습했기 때문이었다.

‘대마법사’의 칭호까지 받은 인물이 이토록 허무하게 가다니.

국가적인 손실이었다. 내게는 제국의 귀족으로서 레이놀드 씨의 생명을 온존할 책임이 존재했다. 그렇게 고아원에 돌아가 침상 하나를 빌린 뒤에야, 우리는 서로 대화를 나눌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내게 대략적인 사정을 들은 리아는 흠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내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꼴이, 미안한 줄은 아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리아로서는 오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는 했다.

예를 들어 가정해 보자.

느닷없이 폭음이 귓가를 스친다. 시내에서 막 고아원으로 돌아가던 도중이었다. 무슨 상황인가 싶어 진원지를 찾아갔더니, 사랑하는 오빠가 흙투성이가 된 채 헐떡이고 있지 않은가. 더구나 그 맞은편에 선 중년의 사내는 얼핏 보기에도 무시무시한 마법을 시전 중이기까지.

뒤통수를 날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오해는 오해였다. 도의적으로는 사죄를 하는 편이 옳았기에, 나는 일부러 풀이 죽은 리아를 위로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고맙다는 인사는 나중에 해도 충분했다.

만일 그 마법이 완성되었다면, 침상에 누워 있는 쪽은 나였을 테니.

설령 그렇게 되더라도 ‘그 너머’의 광경을 보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지만 말이다.

이제 와서 따져봐야 무의미한 이야기였다. 나는 몇 번 고개를 내저으며 복잡한 심정을 정리했다. 내게는 당장 리아에게 물어야 할 의문이 남아있었다.

“리아, 이 남성 분께서는……?”

내 흐릿한 목소리에 리아는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리아의 옆에는 안경을 쓴 젊은 사내가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 앉아 있었다. 낯선 얼굴로 보아 손님이 분명했고, 손님이 있음에도 소개를 하지 않는 것은 결례에 속했다.

이내 미안하다는 표정과 함께 리아가 입을 열었다.

“아, 이 분께서는 샤일록 상회에서 파견을 나온 책임자셔. 성함은 ‘페리 쿠아르스’라 하시고…….”

“반갑습니다, 이안 페르쿠스 경.”

사내는 붙임성 좋은 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슬쩍 숙인 고개가 그의 존중을 나타내고 있었다. 과하지도 않으면서, 또 나를 얼마나 인정하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태도였다.

과연, 상인다웠다. 천성 자체가 처세에 익숙한 인간이었다.

그래서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혀가 유연한 남자일수록 행실은 가볍기 마련이었다. 심지어 상인이나 정치인이라면 더더욱 말할 것도 없었다.

어영부영 몇몇 여자 사이에 발을 걸치고 있다가, 나중에 가서 억울하다는 낯빛으로 연인을 달래는 미래가 벌써부터 보이는 듯했다.

쓰레기 녀석.

나는 발달한 눈썰미로 상대를 곧장 리아의 남자친구 후보에서 탈락시켰다. 상인 나부랭이에게 귀한 리아를 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내는 이러한 내 마음도 모른 채 입에 발린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간 이안 경의 영웅담은 익히 전해 들었습니다. 예전부터 흠모해 마지 않던 분이었는데, 이처럼 짧은 인연이나마 뵙게 되어…….”

“리아와 단 둘이 오신 겁니까?”

내밀어진 사내의 손을 마주잡으며, 나는 그렇게 힘 주어 물었다.

페리는 어리둥절한 눈빛을 한 채 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리아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물론 침묵은 길지 않았다.

별 생각 없이 던진 질문이라 생각했는지, 페리의 입가에 사람 좋은 미소가 떠올랐다.

“네, 과분하게도 그렇게 되었습니다. 한동안 고아원에 머물면서 협의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아니, 고아원에 머무신다니요?”

당장이라도 펄쩍 뛰고 싶은 기분을 참으며, 나는 애써 평정을 가장해 물었다.

그럼에도 좁혀지는 미간마저 숨길 수는 없었다.

내가 그러든 말든, 페리는 너털웃음을 터트릴 뿐이었다.

“네, 평소에도 자주 신세를 지던 곳이니까요.”

그게 무슨 소리냐고, 되묻기도 전에.

리아가 슬쩍 내게 눈치를 주며 말했다.

“오빠, 페리 님은 샤일록 상회에서 파견을 나온 분이시잖아. 당연히 고아원과도 인연이 있지~”

애교가 가득 담긴 목소리였다. 남이 본다면 우애가 넘치는 남매의 대화처럼 보이리라.

하지만 나는 알았다.

리아가 살짝 이를 악물고 있다는 사실을. 더불어 나를 바라보는 눈빛마저 심상치 않았다.

적당히 좀 하라는 뜻이었다.

그제야 내 뇌리를 스치는 정보가 하나 있었다.

‘샤일록 상회’,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지난번 마수가 집단 발생한 성국의 군영에서도 정보를 전해 듣지 않았던가.

성국 전역에서 마수 시체를 쓸어담고 있다던 대상단이었다.

또한 정작 마수가 대량으로 나타난 지옥구멍의 영역에는 나타나지도 않았던 곳이기도 했고.

나로서는 잠시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마침 조사를 해보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일부러 나설 필요도 없이 상대가 이곳으로 왔다. 당연히 두 팔 벌려 환영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왜, 마음이 내키지가 않는지.

내 입에서 끄응, 하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페리는 순박한 얼굴로 눈을 깜박이고 있을 뿐이었다.

상인이 순수한 척은,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 세상에 순수한 상인은 우리 리아가 유일했다.

하지만 결국 나는 묵직한 한숨을 토해내는 수밖에 없었다. 사감과 공무, 어느 쪽을 우선해야 하는지는 너무나 명확했다.

“그럼, 한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안 경… 마침 이 고아원에 성녀님께서 머물고 계시다 들었습니다. 인류의 영웅을 두 분이나 뵙게 되어 깊은 영광입니다.”

엘시 선배나 셀린도 있는데.

속으로 불만을 투덜거렸으나, 이를 입에 담는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았다. 최대한 상대의 경계심을 사는 일만큼은 피해야 했다.

대신 나는 리아에게 신신당부하기로 했다.

“리아, 너는 매일 자기 전에 나한테 검사 맡으러 와라.”

“그건 또 무슨 헛소… 리가 아니라, 무슨 말씀이세요. 오라버니?”

가식적인 미소를 머금은 소녀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불만을 여실히 드러내는 모습이었지만, 내가 발언을 철회하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코웃음을 치며 살짝 고개를 돌렸을 따름이었다.

이에 울컥한 리아가 주먹을 불끈 쥐었을 무렵이었다.

“끄으으…….”

어디선가 묵직한 신음이 흘러 나왔다. 나와 리아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침상 위에서, 중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정신을 되찾기 직전의 신호였다. 나는 우선 리아와 페리에게 눈짓을 주어 침묵시키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레이놀드 씨, 정신이 드십니까?”

“내가, 무슨…….”

이후 리아의 사과가 이어졌고, 나는 자세한 사정을 털어놓기 위해 리아와 페리를 퇴장시켰다.

리아는 몰라도, 페리는 샤일록 상단의 인물이었다. 의심스러운 조직의 일원에게 우리의 비밀을 밝힐 까닭은 없었다.

이어진 내 설명에 레이놀드 씨의 표정이 시시각각 굳어갔다.

종래에는 어이가 없다는 듯 불쾌한 목소리를 낼 정도였다.

“도대체 그따위 추론을 한 사람이 누군가? 감히 날 뭘로 보고…….”

“제5황녀 전하십니다.”

그러자 레이놀드 씨의 입이 꾹 닫혔다. 이후, 그의 입에서 기나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내가 좀 의심스럽긴 했나 보군.”

그제야 레이놀드 씨는 잠자코 내 부연 설명을 듣기 시작했다.

하필 가면의 괴한과 일행에 합류하는 시점이 겹쳤다는 점.

굳이 이 시기에 성국을 찾아올 이유를 짐작하기 힘들었다는 점.

또 이 주변의 실력 있는 전격 마법사는 레이놀드 씨가 유일했다는 점까지.

내 설명이 이어질수록 중년의 마법사는 황당하다는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그가 생각해도 워낙 의심할 만한 이유가 많았던 탓인지, 또 다시 나를 타박하려는 기색을 보이지는 않았다.

단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을 따름이었다.

“그래, 내가 잘못했군… 하아, 이럴 줄 알았다면 미리 밝혀둘 것을.”

팔짱을 낀 채, 레이놀드 씨는 베개 속에 몸을 깊이 파묻었다. 머뭇거리던 그의 입이 열릴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내가 어쩌다 용병 생활을 하게 됐는지, 말한 적이 있던가?”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려 과거를 되짚어 갔다. 이내 그날의 기억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연인과 파혼을 당했다고…….”

“그렇지. 그런데 사실, 이유는 하나가 더 있었네.”

그렇게 과거를 토해내는 중년의 낯빛은 어느덧 쓸쓸해져 있었다. 망막마저 빛 바랜 추억을 비추는 듯 흐릿했다.

“고집을 부렸던 걸세. 어떻게든 그 여자와 결혼하고 싶어서, 가출을 하고 여자와 함께 용병 생활을 시작한 거지.”

드디어 밝혀진 진실에 내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 말대로라면, 페르쿠스 저택에서 엘시 선배를 설득했던 논리가 우스워질 판이었다. 분명 엘시 선배더러는 사랑 대신 가문을 택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정작 젊은 시절의 레이놀드 씨는 사랑을 택했다.

이후에 후회하고 가문에 되돌아왔을 수도 있겠지만, 레이놀드 씨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래 보이지는 않았다.

“행복했네. 그 어느 때보다 빛나던 시절이었지. 하지만, 그 끝은…….”

나는 얼마 전에 들었던 레이놀드 씨의 상처를 떠올렸다.

정체불명의 소녀를 본 그는 마수에 의해 모든 동료를 잃었다.

그래, 모든 동료를.

그 사실을 깨우친 내 침묵이 더욱 무거워졌다.

“며칠 후가 기일일세.”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는 품에서 칠흑의 막대를 꺼냈다. 나와 일전을 벌일 때도 사용했던 물건이었다.

마력을 증폭시키는 효과가 있어 보였는데.

그만한 귀물을 얻기는 쉽지 않았을 터였다.

“내가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받은 선물이네. 얼마 전까지는, 볼 때마다 가슴이 아려 꺼내지 못했지… 그러던 차에 불현듯 깨달은 걸세.”

휘리릭, 탁.

중년의 마법사는 그렇게 칠흑의 막대를 하늘로 살짝 던졌다 잡기를 반복했다. 그래야만 마음이 안정되기라도 한다는 듯이.

예전에 레이놀드 씨는 낡은 지팡이를 내게 소개해 준 적이 있었다. 그때는 용병 시절에 사용하던 물건이라 했었는데, 진정으로 소중하게 여기던 물건은 따로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 오히려 너무 소중하기에 꺼내 보지도 못했겠지.

“……아직 내게 매듭 지어야 할 과거가 있다는 사실을.”

평탄하지만, 단단한 뼈대가 느껴지는 말이었다. 그만큼 굳은 결심이 담겨 있기 때문이리라.

큭큭, 하고 대마법사는 제 스스로가 우습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아마 자네와 함께한 것이 계기가 아니었나 싶네.”

느닷없는 고백에 내 눈이 의문으로 가득 찼다. 레이놀드 씨의 눈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담고 있었다.

“승산이 없는 전투에 목숨을 던지는 자네와, 개죽음을 당하더라도 상관 없다는 엘시… 오래 전 내 모습이 떠올랐네. 들추어 내기가 괴롭고 무서워, 상처를 덮어두고만 살았던 비겁한 사내가 하나 있었지.”

무어라 위로를 건네야 할까 하다가.

나는 입을 다물기로 했다. 어떠한 말귀조차 그의 상처를 아물게 하지는 못할 테니까.

오직 복수뿐이었다.

그는 오래 전 꾸었던 악몽에 종지부를 찍고자 이곳으로 왔다.

“엘시에게는 부디 비밀로 해주게.”

쪽팔리니까.

그렇게 말하는 레이놀드 씨의 표정은, 드물게도 쑥쓰러운 빛을 띠고 있었다.

**

다음날, 나는 피로한 낯빛으로 고뇌를 반복했다.

그렇다면 가면의 괴한은 누구란 말인가?

내 직감에 불과했지만, 레이놀드 씨는 가면의 괴한이 아닌 듯했다. 애초에 가면의 괴한이 어떤 수를 쓰는지도 밝혀지지 않은 판이 아닌가.

무조건 전격 마법사를 의심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사실이 있다면, 엘시 선배의 낯빛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는 점이었다.

삼촌의 누명이 벗겨져 무척 기쁜 모양이었다.

정확히는, 의심을 덜하게 되었다는 표현이 맞겠지만.

레이놀드 씨의 진술을 무조건 신뢰하기는 힘들었다. 사정이야 끼워 맞추면 그만이고, ‘소녀’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는 어딘가 이상한 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다시 한 번 황녀와 연락을 해볼까.

그러던 찰나에 사건이 벌어졌다.

그날 밤, 나는 의자 위에 웅크려 앉아 고심을 반복하고 있었다. 열심히 정보를 정리해 봐도 해답이 나오지 않았다. 차라리 성녀와도 상담을 해볼까, 하고 몸을 일으켰을 무렵.

흐릿한 비명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그야말로 잔향에 불과한 음량이었으나, 나는 단박에 그 목소리의 주인을 눈치 챘다.

내 여동생이었다.

당장 내 몸이 땅을 박차고 쏘아졌다. 온 마력을 각력에 집중한 결과, 난 몇 초도 지나지 않아 비명이 들려온 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보았다.

핏물을 뚝뚝 흘리며, 우두커니 서 있는 젊은 사내.

그리고 그 맞은편에 말없이 서 있는 가면을 쓴 괴한을.

리아는 덜덜 떨며 자리에 주저앉은 채였다.

나는 그 광경을 본 순간 묘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죽는다.

저 가면의 괴한은, 샤일록 상회에서 파견된 젊은 상인을 죽이려 들고 있었다. 그 까닭은 알 수 없어도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저놈을 막아야 한다.

내 입에서 단박에 노호성이 터져 나왔다.

"이 새끼가 진짜!"

손도끼가 대기를 찢어발기며 빛을 흩뿌리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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