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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436화 (436/649)

〈 436화 〉 6. 존재 증명(24)

* * *

암흑교단은 온갖 금지된 비술을 다룬다.

그들이 반인륜적인 실험을 계속하는 까닭 또한 이와 무관하지는 않을 터였다. 진리를 추구하는 마도의 구도자들이 일부러 봉인까지 해둔 지식이 아닌가.

당연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보는 편이 합당했다.

은폐된 연구 과정 중에는 생체 실험은 물론이고, 정신과 영혼을 제물로 삼는 일도 흔했다. 그 끔찍한 참상은 이미 여러 번 목격한 바 있었다.

페리의 몸에서 발견된 마법 또한 마찬가지였다.

무언가를 대가로, 정신과 영혼을 차츰차츰 빼앗아 가는 암흑의 마도.

마음만 먹는다면 악용할 소지는 차고 넘쳤다. 그 대표적인 결과가 바로 우리의 눈앞에 있지 않은가.

성녀는 침중한 표정을 지은 채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권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나갑시다.”

페리는 위험한 존재였다.

그가 얼마나 침식되었는지는 아직 미지수였다. 하지만 리아를 습격했던 얼굴 없는 괴한들을 생각해 보았을 때, 전망은 희망적이지 못했다.

최악을 가정하면, 그래.

침상 위에 누워 있는 사내는 ‘페리’조차 아닐지도 몰랐다. 한때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살아 움직이는 껍데기에 불과하리라.

이처럼 종 잡을 수 없는 인물을 옆에 두고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다.

성녀는 힘없이 걸음을 내딛었다. 어디로 향하는지는 대략적으로 짐작이 갔다.

아마도 그녀의 침실이겠지.

나는 속으로 쯧, 하고 혀를 찼다. 고집스럽게 내 주장을 부정하던 것이 괘씸해 놀려 주려 했더니만, 분위기가 상상 이상으로 좋지 않았다.

내게도 최소한의 눈치는 있었다. 그저 침묵 속에서, 나는 넋을 놓고 걸음을 옮기는 성녀를 뒤따랐다.

이 무언의 행진이 끝날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침실에 도착하자마자, 성녀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내 자리는 자연스레 그 맞은편이 되었다.

성녀의 입에서 픽, 하고 얕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이가 없다는 듯이.

“거짓말이에요.”

정작 흘러 나온 목소리는 진지하기 그지 없었지만 말이다.

나는 정색하는 성녀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말을 꺼내기가 힘들었지만, 이제 와서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나지막한 설득이 이어졌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성녀님. 본인이 직접 확인하셨잖습니까… 샤일록 상회는 암흑교단과 관련이 있어요. 그리고 높은 확률로 이 고아원도…….”

“아직, 아직이에요.”

성녀는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연분홍빛 눈동자가 아래를 향하고, 모아 쥔 손은 꼼지락거리며 불안을 대변했다. 나로서는 성녀가 이러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언제나 이성적이던 성녀답지 않았다.

내 의혹이 담긴 시선을 마주치지 못한 채로, 성녀는 중얼중얼 변명을 주워섬겼다.

“아직 확실하지 않아요. 샤일록 상회는 대상단이에요. 상인 하나가 암흑교단과 관련이 있다고 해서, 상단 전체를 의심하기는 힘들어요. 또 고아원도 별 관련이 없을 수도 있잖아요? 오히려 성국과 신뢰를 쌓기 위해 일부러 아무런 음모를 꾸미지 않았을지도…….”

“성녀님.”

고작 한 마디였다.

꼬리에 꼬리를 물던 의혹들이, 내 호명 한 번에 지워졌다. 성녀는 입을 꾹 다문 채로 고개를 숙였다.

“암흑교단은 이미 오래 전부터 각국에 잡입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리고 가면의 괴한처럼 수상한 인물이 마침 이곳에 나타나기도 했고요. 이 모든 것이 우연에 불과하다는 말씀이십니까?”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죠.”

결국 내 입에서는 한숨이 새어 나왔다.

고집을 넘어 필사적이기까지 한 부정이었다. 아무래도 성녀와 보다 깊은 대화를 나눠야 할 필요가 있을 듯했다.

“……진짜로?”

존칭조차 생략된 내 반문에, 성녀는 처음으로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시선을 이리 돌렸다가, 저리 돌렸다가.

종래에는 입술까지 깨문 성녀가 두 손으로 제 얼굴을 덮었다.

“이안, 당신이 몰라서 그래요… 이게 얼마나 큰 일인 줄 알아요?”

“왜 모르겠습니까? 성국 곳곳에 암흑교단이 침투해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인데. 그러니까 더더욱 진상을 밝혀야 한다는…….”

“아니에요.”

단언이었다.

성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 주장을 끊어 버렸다.

“성국은 국가 자체가 신앙을 토대로 이루어져 있어요. 그리고 신성력은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고요.”

“성국이라고 해서 범죄나 비리가 없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랬죠… 하지만 적어도 선이 있잖아요!”

성녀는 헛웃음을 삼키며 두 팔을 벌렸다. 얼마나 황당한 심정인지를 드러내고 싶은 듯했다.

“암흑교단? 심지어 이곳은 성국에서도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고아원이에요. 아인델 총주교가 손을 댈 정도라고요! 그런데 만에 하나, 성국의 최고위직 중 하나가 암흑교단과 연루되어 있다?”

“당장 쳐내야겠네요.”

“그 이상이죠.”

성녀의 선언은 틈새 하나조차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묵직했다. 연분홍빛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중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신앙은 맹목적인 감정이에요. 그만큼이나 무결성을 요구받죠. 성국의 지도자 중 하나가 암흑교단과 협력하고 있다면, 교단 자체가 후폭풍에 시달릴 수 있어요.”

“잠깐의 내홍에 불과하지 않겠습니까.”

“네, 언젠가 수습이 되긴 할 거예요. 다만, 그때까지 암흑교단이 얌전히 기다려 줄까요?”

흐음, 하고 나는 침음을 삼키며 시선을 돌렸다.

성녀의 말뜻은 이해가 갔다. 암흑교단과의 일전을 앞두고 있을지도 모르는 마당에, 굳이 내분을 일으킬 이유가 없다는 소리였다.

물론 배신자를 가만히 두자는 말은 아니었다.

“우리, 좀 더 신중히 접근해요.”

바싹바싹 마르는 입술을 적시면서, 성녀는 나의 설득에 나섰다.

“이 문제를 당장 공론화 할 수는 없어요.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오히려 이쪽이 다칠 수 있단 말이에요.”

“그렇다면?”

“흑막의 꼬리를 잡아야죠.”

나는 슬그머니 팔짱을 끼며 고심에 잠겼다.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사고의 파편들이 있었다.

“환부는 통째로 소독해야 염증이 번지지 않잖아요? 배신자도 마찬가지에요.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진짜배기를 놓칠지도 모르죠. 차라리, 사태를 관망하며 증거를 수집하는 편이…….”

“안 됩니다.”

내 짤막한 대답에 성녀의 안색이 단번에 구겨졌다.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나의 결심이 흔들리는 일은 없었다.

“샤일록 상회의 중개로 이미 수많은 아이들이 사라졌어요. 이대로 얌전히 지켜본다면, 앞으로도 더 많은 아이들이 희생될 겁니다.”

그렇다. 이미 샤일록 상회는 고아원에서 많은 아이들을 데려간 뒤였다.

그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최소한 좋은 꼴은 보지 못했으리라. 암흑교단이 저지르는 짓들은 대개 그랬으니까.

성녀의 눈빛이 처음으로 흔들린 것은 그때였다.

그러지 않아도 고아들의 처우에 관심이 많은 그녀였다. 심지어 어린 시절 이곳에 적을 두기도 했으니, 더욱 마음이 복잡할 터였다.

나는 그 틈을 파고들어 보기로 했다.

“마음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고아원의 아이들뿐만 아니라, 제 여동생까지 연루된 사건이에요. 마냥 손을 놓고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성국의 사정도 이해는 갔다.

최대한 내분을 피하고, 파급 효과를 줄인 뒤에 문제를 해결하고 싶겠지.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정치인의 논리에 불과했다.

예정된 비극을 얌전히 지켜보기만 하는 건, 도무지 내 성미에 맞지 않았다.

성녀가 다시금 입술을 잘근잘근 씹기 시작했다. 머뭇거리는 그 눈빛에는 다양한 감정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불안, 초조, 그리고 연민.

고뇌는 길지 않았다. 여인의 고혹적인 입술 사이로 기나긴 한숨이 흘러 나왔다.

“……안 돼요.”

의외로 단단한 어조였다. 나와 마찬가지로 마음을 돌릴 생각이 없단 의미이리라.

그래서 나는 의아한 어조로 되묻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 아이들은요?"

"제 마음이라고 편하겠어요?"

성녀의 태도는 강경했다. 어느덧 깊이 가라앉은 그 눈동자에서는 감정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정치인의 눈이었다.

"모든 희생을 묵인할 필요는 없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은 아이들을 구해야겠죠… 하지만 그뿐이에요."

가녀린 손가락이 제 가슴에 성호를 긋는다.

오랜만에 보는 몸짓이었다. 그에 맞추어 내 미간도 좁아졌다.

"더 많은 희생과 혼란을 감수할 수는 없어요. 성국의 성녀로서 내린 판단입니다."

"성녀가 아니라면요?"

내 반문은 기습적이었다.

여인의 말문이 일순 멈추었다. 유심히 나를 바라보는 그 눈빛에 당혹감이 섞여 있었다.

문득 떠오른 의문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성녀'가 아니라면 어떻겠습니까? 그래도 대답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성녀가 아니라면요?”

내가 던진 질문과 완전히 동일한 말귀였다.

하지만 그 무게감만큼은 너무나도 달라서, 나는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성녀’가 아닌 저는, 뭔데요?”

‘성녀’가 되기 위해 이름마저 버린 여인이었다.

당장 떠오르는 대답이야 있었다. ‘당신은 당신입니다.’ 그러나 성녀의 이름조차 제대로 호칭하지 못하는 주제에, 어찌 그따위 위로를 건넬 수 있겠는가.

모순이고 기만이었다.

결국 내가 가까스로 내뱉은 말은 하나뿐이었다.

“……제가 알아서 해보겠습니다.”

그렇게 나는 도망치듯 성녀의 침실을 떠났다. 성녀는 끝까지 나를 배웅하지 않았다.

*

그리고 다음날.

“성녀님, 우리 데이트 좀 할까요?”

내 제안에, 성녀는 그대로 제 이마를 짚고 말았다.

“뭐하자는 건데요?”

그러면서도 슬그머니 내 손을 맞잡는 걸 잊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내 옆에 불만스러운 표정의 엘시 선배가 서 있었으므로.

성녀는 유독 엘시 선배에게 지기 싫어했다. 이처럼 노골적인 견제에 나서면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엘시 선배에게 사죄하는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선배.

그리고 감사합니다.

그렇게 난 처음으로 성녀와 단 둘이 외출을 하게 되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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