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7화 〉 6. 존재 증명(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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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엘시 선배는 다소 불안정해 보였다.
마침 성녀와 싸운 다음날이었다. 나는 착잡한 심정에 휘적휘적 걸음을 옮기는 수밖에 없었다.
사실 성녀의 논리 중에는 틀린 부분이 없었다.
더 많은 희생을 내지 않기 위해 작은 희생을 감내한다. 나는 그조차도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지만, 일개 검사와 일국의 명운을 짊어진 정치인의 판단은 상이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해내겠다는 말은 터무니 없을 만큼 낙관적인 전망에 불과했다.
정치인은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했다. 나처럼 근성론으로 일관할 수만은 없을 터였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못내 울적해지는 마음을 털어내지 못했다.
그래도 성녀라면 알아주리라 생각했다.
아이를 구하겠다는 마음만큼은 이해하고 응원해 주지 않을까, 이러한 얄팍한 기대를 품었으나 성녀가 짊어진 짐은 상상 이상이었다. 나는 아직도 넋이 나가 있던 성녀의 얼굴이 잊혀지지가 않았다.
이 고아원에 얽힌 비밀이 그만한 파급효과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겠지.
나는 성녀의 마음을 십분 헤아리면서도, 막막해지는 심정을 거둘 길이 없었다. 성국에서 성녀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도대체 누구의 도움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제국 황실의 권위를 빌려야 하나?
이 또한 매력적인 선택지였지만, 나는 이내 불경한 생각을 접어야 했다. 성국의 치부를 건드리는 과정에서 제국 황실의 이름을 남용한다?
외교적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이 컸다. 아무리 내가 황실의 권위를 이래저래 써먹었다지만, 그 정도까지 민폐를 끼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 어떻게 한다.
그러던 차에 마주친 사람이 바로 엘시 선배였다.
공터 한가운데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자그마한 체구의 소녀, 도저히 눈길을 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엘시 선배를 향해 다가갔다.
엘시 선배의 손에는 자그마한 책자가 들려 있었다.
제목은 보이지 않았으나, 얼핏 내용을 읽어 보니 각국의 특이한 문화를 소개하는 책인 듯 싶었다. 특히 남부 열왕국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 보였다. 아무래도 여러 나라와 부족이 모인 연합체라서 그렇겠지.
소문에 따르면 몇몇 부족은 아직도 인신 공양을 하기도 한다 들었는데.
여러모로 남부 열왕국은 특이한 장소였다. 여태껏 내가 만나 본 열왕국 출신 사람들이 그랬듯이.
양아치 테안이야 말할 것도 없고, 우리 학년의 검술학부 수석도 그랬다.
엘시 선배는 도대체 얼마나 이상한 문화를 접하고 저토록 떨고 있는 걸까.
내 입에서 나지막한 호명이 새어 나왔다.
“……엘시 선배?”
“히이이이이익?!”
엘시 선배는 내 목소리에 발작이라도 하듯 몸을 튕겨 올렸다.
그리고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며,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기까지.
이쯤 되니 꼭 끌어안은 책자의 내용이 더욱 궁금해졌다.
내 손가락이 슬그머니 엘시 선배의 품 안을 가리켰다.
“뭐해요? 무슨 책을 읽고 있던데……?”
엘시 선배는 한 술 더 떠 식은땀을 뻘뻘 흘리기까지 했다.
“아! 주, 주인님…. 그, 그러니까 이건 말이죠…….”
소녀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렇게 한동안 내 눈치를 살피던 엘시 선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책의 내용을 실토하고 말았다.
“아주 야만적인 문화를 다룬 책이에요!”
“야만적인 문화라뇨?”
금번의 머뭇거림은 짧았다. 이제 전략을 수정하기로 했는지, 엘시 선배는 도리어 발을 구르며 분개했다.
“어느 야만적인 부족은 개를 잡아먹는대요! 그것도 여름철에, 몸보신을 하기 위해서! 어떻게 그럴 수 있죠? 강아지는, 강아지는 인류의 오랜 친구인데……!”
물기 어린 호소에 나는 흐음, 하고 묘한 소리를 삼켰다.
내 눈이 슬그머니 엘시 선배의 몸을 훑었다. 애써 분노를 가장하고 있었지만, 빳빳이 굳은 그 근육이 엘시 선배의 진정한 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충성에 대한 배신이잖아요?! 어떻게 그럴 수 있죠! 강아지는 인간을 사랑할 뿐인데……!”
‘먹는다’라.
그야 말 그대로의 의미겠지만, 하필 내 앞에 있는 상대가 엘시 선배라는 점이 문제였다. 자연스레 ‘먹는다’라는 표현이 가진 은유적인 함의를 떠올리고 만 것이다.
이성 간에 ‘먹는다’라고 하면, 한 가지 뜻밖에 없었다.
나는 무심코 예전의 기억을 반추했다. 엘시 선배의 살결에서 전해지던 부드러운 감촉, 자그마한 체구와 달리 발달할 곳은 적당히 발달한 몸이었다.
전날 무리를 한 탓일까. 내 생각은 뇌를 거치지 않고 곧장 척추를 타고 내려갔다.
“……좋을 것 같은데.”
“히이이익?!”
내 짤막한 감상에 엘시 선배의 눈에는 물방울이 맺히고 말았다.
책자조차 땅바닥에 떨어트린 채, 엘시 선배는 오들오들 떨면서 제 몸을 끌어안았다.
“살려 주세요, 물 올리지 말아 주세요… 앞으로 착하게 살게요. 주인님 말 잘 들을게요! 다른 사람 괴롭히지 않고, 말도 예쁜 말만 쓸게요… 그리고 또, 또…….”
실로 오랜만에 보는 광경이었다. 나로서는 이토록 겁을 먹은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문득 그 중얼거림 중에 유독 뇌리에 꽂히는 말귀가 하나 있었다.
“앞으로는 제 말 잘 듣겠다고요?”
“네, 네… 시키는 대로 할게요. 그러니까 엘시 잡아먹지 말아 주세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엘시 선배를 향해, 나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함께 성녀님을 설득해 볼 방안을 고심해 봅시다.”
“네, 네… 무엇이든… 네?”
엘시 선배의 울음이 뚝 그친 것은 그 무렵이었다.
멍하니 나를 올려다보던 그녀는, 이내 툴툴거리며 미간을 좁히기 시작했다.
“제가 왜 그 년이랑…….”
“예쁜 말.”
“……그분과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지, 들을 수 있을까요. 헤헤.”
그렇게 세워진 계획이 바로 ‘성녀 질투 유발 작전’이었다.
참고로 내가 입안한 내용은 아니었다. 아무리 내가 쓰레기라도 내게 고백까지 한 여자에게 그러한 짓을 할 리는 없었다.
물론 엘시 선배도 썩 내켜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엘시 선배가 이러한 역할을 맡기로 한 까닭은, 이 일이 레이놀드 씨와도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삼촌이 얽힌 문제인 만큼 적극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겠지.
그래도 엘시 선배의 도움을 얻어 다행이었다.
이렇게 성녀와 단 둘이 시내를 거닐 수 있었으니까.
다만 얼굴을 드러내고 다닐 수는 없었다. 우리는 유명인이었고, 신분을 노출하는 순간 둘만의 시간을 가지기는 힘들었다. 우리 둘이 후드를 깊이 눌러쓰게 된 내막이었다.
오히려 이러는 편이 더 행운일지도 몰랐다.
나와 성녀의 손이 아슬아슬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인파에 휩쓸려 서로를 놓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방책이었다. 지금 와서 되짚어 보면, 핑계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지만.
시내를 걷는 동안에도 성녀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혹시 어젯밤의 대화를 떠올리고 있는 걸까.
갑작스레 데이트를 권한 까닭을 모를 만큼 성녀는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일종의 화해 표시라는 사실은 진작에 이해했을 테고, 그 기저에 숨은 의도 또한 눈치 챈 지 오래겠지.
나는 이 기회에 성녀를 설득하고 싶었다.
그럼에도 입술이 차마 떨어지지가 않았다. 무어라 말을 하긴 해야 하는데, 뇌리가 복잡해서 언어가 정제되지 않았다. 오히려 먼저 입을 연 쪽은 성녀였다.
“……놀랐어요?”
야트막한 농담에, 내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뼈 아픈 지적이었다. 사실 지금의 내 몸은 필요 이상으로 뻣뻣해진 뒤였다.
그 계기는 오늘 후드를 쓰기 전, 처음으로 성녀를 만났을 때였다.
아침만 하더라도 피로한 낯빛으로 내 손을 대충 맞잡았던 그녀였다. 오후에나 시간이 난다고 해서 때에 맞추어 성녀를 찾아갔더니, 나를 마중한 것은 미의 여신이었다.
한동안 잊고 있었다.
나와 성녀가 향했던 곳은 늘 피와 병마가 넘쳐나는 장소였다. 스스로를 꾸밀 여유나 염치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관심 있는 사내와 단 둘이 외출을 해야 한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은은한 화장만으로도 여인의 미모는 한층 무르익는다.
오늘 나는 그 진리를 여실히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후드의 음영에 가려진 여인의 미소만으로도 눈을 마주하기 힘들 정도였으니까.
성녀는 그 점이 못내 마음에 드는 듯했다.
“이제야 알았나요? 당신이 누구와 나란히 걷고 있는지?”
“아니, 뭐…….”
내가 어물어물 답을 얼버무리자, 성녀의 입술 사이로 자그마한 웃음소리가 배어 나왔다.
쿡쿡, 하고 귀엽다는 듯 날 바라보던 여인의 검지가 느닷없이 내 옆구리를 찌르기 시작했다.
“윽! 아니, 지금 뭐하는…. 악, 악!”
유슬을 단련한 만큼 그 위력이 만만치 않았다. 결국 나는 신음 대신 약한 비명을 토해내는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해 참을 수는 있었지만, 이러는 편이 성녀의 기분에 더 나을 것만 같아서.
다행스럽게도 내 예상이 틀리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성녀가 이내 만족스러운 미소를 깨물었다.
“그러니까 잘해요. 쓸데없이 눈 돌리지 말고.”
그리고 까치발을 들더니, 의미심장한 속삭임을 하나 더.
“……괜히 내 기분 망칠 생각도 하지 말고.”
흐, 하고 난 헛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과연 성녀다웠다. 오늘은 데이트를 하러 나왔으니, 심기를 거스를 만한 말은 하지도 말라는 뜻이었다.
물론 그런다고 포기할 내가 아니었다.
“기분만 망치지 않으면, 가능성은 남아있는 겁니까?”
“어디 멋대로 해보시든가요.”
흥흥, 하고 성녀는 새침을 떼며 그렇게 말했다.
그만큼이나 마음을 돌릴 생각이 없다는 의미겠지. 겉으로는 태연을 가장했으나, 내 고심은 더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도무지 성녀를 설득할 만한 재료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나마 떠오르는 방법은, 글쎄.
밀실에 가서 성녀를 밀어붙이면 되지 않을까. 강한 어조로 명령하며 성추행을 곁들이면 될 것 같은데.
무척이나 쓰레기 같은 발상이었다. 하지만 성녀의 취향을 고려하면 이만한 방법이 없기도 했다.
내가 묘한 기척을 감지한 것은 그때였다.
어라, 하고 내 눈이 길거리를 지나치는 인파의 구석진 곳을 향했다. 도도한 척을 하고 있던 성녀의 시선 또한 나를 따랐다.
그리고 성녀의 미간이 좁혀졌다.
“……어라?”
그곳에는 익숙한 얼굴이 하나 보이고 있었다. 어젯밤에 피를 흘리고 쓰러진 상인, 페리 쿠아르스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리아를 비롯한 몇몇 일행이 동행 중이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으나, 그 차림새만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상인들의 모임이었다. 화목한 분위기는 겉보기에 불과하다는 뜻이었다.
이 무렵에서 나는 두 가지 의문을 느꼈다.
“페리가 정신을 차렸습니까?”
“네, 오늘 오전에… 하지만 한동안 안정을 취하라고 단단히 일러두었을 텐데?”
예상하던 대로의 대답이었다. 별 말 없이 내 고개가 두어 번 끄덕여졌다.
오히려 내 진정한 의문은 따로 있었다.
두 번째 궁금증, 그것은…….
“일단 쫓아가 볼까요?”
성녀는 한동안 머뭇거리는 기색이었다. 그 심정이 낯빛에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서운함, 아쉬움, 그리고 불안과 걱정.
결국 여인의 아리따운 입술 사이로 기나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별 일 아니라면, 무사하지 못할 줄 알아요.”
누구한테 한 말일지 모를 경고였다.
나인가, 혹은 페리인가.
어느 쪽이든 상관 없었다.
그렇게 후드를 쓴 이인조의 미행이 시작되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누가 보아도 수상한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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