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8화 〉 6. 존재 증명(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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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푸른 하늘 아래로 인구의 파도가 넘실댄다.
어느 도시나 마찬가지겠지만, 시장은 금과 은이 흐르는 혈관이나 다름없었다. 이 수많은 인파를 중심으로 다양한 시설이 자리하고 있는 까닭이었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기 마련.
이 왁자한 인간의 숲은 또 그만한 규모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숨기라는 말이 있듯이, 제 종적을 감추고자 하는 이들 또한 시장을 애용했다. 후드를 눌러쓰고 얼굴을 감추는 것쯤이야 예삿일에 속했다.
오늘의 나와 성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우리 둘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특정 집단을 추종하고 있었다. 물론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체를 하기도 했다.
그러던 나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오늘 우리가 시내로 나온다는 이야기를 했던가요?”
“당연히 했죠. 고아원에서 얼마나 걱정을 하겠어요? 소문이 퍼지기는 했을 거에요.”
다시 말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금세 정체가 탄로날 수도 있단 뜻이었다.
내 입에서 흐음, 하고 옅은 침음이 흘러나왔다. 한 술 더 떠 힐끔힐끔 리아의 기색의 살피려던 내게, 성녀는 책망의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그만, 그만 봐요! 벌써 저쪽에서 우리를 신경 쓰고 있잖아요.”
그 말을 듣자마자 내 몸이 멈칫했다. 이어 자연스럽게 성녀에게 시선을 돌리면서, 마치 대화를 나누는 한 쌍의 연인인 척을 시작해야 했다.
정작 서로 속삭이고 있는 내용은 사랑의 은어와 영 딴판이었지만 말이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애초에 후드를 눌러쓴 이인조라니, 너무 특이하잖아요.”
“성국에서는 괜찮아요. 순례자들이 후드를 눌러쓰곤 하거든요. 스스로의 죄를 부끄러워 하면서 주님을 향한 속죄행에 나서는 거죠.”
그럼에도 저쪽에서 우리를 의심하고 있다라.
통상적인 순례객과 행동 양식이 다르기 때문일 터다. 나는 성녀에게 재차 물어야 했다.
“단 둘이서 순례에 나서는 경우는 없습니까? 아무래도 우리가 어색해 보이는 모양인데…….”
이전과 달리 성녀는 머뭇거리며 곧장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내가 의아한 낯빛을 하고 있자, 우리가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누는 양을 지켜보고 있던 상인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신혼부부인가? 혼례를 기념하여 순례에 나서다니, 요즘에는 드문 편인데… 젊은 부부에게 축복이 있기를 바라겠네. 임마누엘!”
그러면서 은근슬쩍 은으로 도금된 십자가 목걸이를 내미는 꼴이, 과연 상인은 상인인 모양이었다.
나는 당황해서 상인의 추론을 부정할 뻔했다. 하지만 그러기도 전에, 성녀의 손이 재빨리 내 손을 맞잡았다. 난데없이 느껴지는 보드라운 감촉에 내 몸이 잠시 얼어붙고 말았다.
그새 성녀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가설을 진실로 못 박았다.
“우리가 만날 수 있게끔 주선해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어서요. 또, 우리가 주님의 품에서 다시 태어나듯 부부로서 새로운 출발을 하고 싶다는 뜻도 있고요.”
“이야, 참 뜨거운 사랑이구만… 어떤가, 남편 양반? 사랑하는 아내한테 자그마한 선물이라도 해주는 건?”
‘신혼부부’라.
일순 망설이긴 했으나, 돌이켜 보면 단 둘이 순례에 나설 만한 관계는 그 정도가 고작이었다. 심지어 나와 달리 성녀는 여성으로서의 굴곡을 두터운 후드로도 감추지 못했다. 남녀가 단 둘이 동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길 수는 없었다.
그리고 또 내 손을 맞잡은 성녀의 손에서 힘이 전해지고 있기도 해서.
나는 이내 쓴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됐습니다.”
성녀의 상인의 표정이 묘해지려던 찰나, 내 말이 재빨리 덧붙여졌다.
“도금된 물건 말고 순은으로 된 십자가 있습니까? 아내한테 주는 선물인데, 당연히 좋은 물건을 줘야죠.”
그러자 성녀와 상인의 얼굴이 동시에 환해졌다.
결국 나름대로 멋들어진 로자리오를 고르고 나서야, 나와 성녀는 상인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동시에 리아와 페리 일행의 수상하다는 시선 또한 거두어진 뒤였다.
나는 그제야 직감했다. 남들의 의심을 피하며 목표를 이룰 수단은 오직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성녀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면서, 까치발을 들고 내 귓가에 속삭였다.
“그럼 갈까요, 서방님?”
얼마든지.
무심코 속으로 중얼거리며, 나와 성녀의 추적이 재개되었다.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졌다.
**
그 후에는 의외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리아와 페리 일행이 이따금씩 우리를 경계하는 기색을 보이기는 했다. 아무리 그래도 동선이 너무 겹치다 보니, 눈에 띄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유난을 떨어야 했다.
예를 들어 ‘막대기 과자 놀이’라든가.
각자 막대기 과자의 양 끝을 물고 얼마나 더 많은 양을 먹어치우는지를 내기하는 놀이였다. 당연히 이제 막 연인이 된 풋풋한 남녀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모르는 척 입술을 덮치면 진도를 나가기 제격이었으니까.
성녀는 유독 이 놀이를 하기 꺼려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부끄러워 했다’라는 표현이 알맞을 터였다.
“어, 어떻게 남사스럽게 남들 앞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성녀의 당혹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미 서로 농밀한 신체 접촉까지 나눈 사이에, 무얼 또 창피해 하는 걸까. 이러한 생각이 들던 찰나였다.
불현듯 내 머릿속을 스치는 질문이 하나 있었다.
‘성녀가 아닌 저는, 뭔데요?’
그랬던가.
나는 묘한 감흥을 느끼며 성녀를 바라보았다.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하는 그녀의 모습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여인과 별 다를 바가 없었다.
단지 너무나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을 뿐.
성녀는 사랑조차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
연심을 품더라도 그 마음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신분 자체가 종교적인 상징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이름을 버린 여인.
그 의미가 묵직하게 내 가슴을 내리눌렀다. 감정을 억누르고, 사고의 틀을 맞추어 가며 살아왔던 여인이 아니었던가.
길거리에서 사랑을 속삭이는 일조차 쑥스럽고 두려우리라.
그래서 나는 일부러 고집을 부려 보기로 했다.
“난 하고 싶은데.”
“이… 아니, 여보!”
깜짝 놀라 내 이름을 부르려던 성녀가 다급히 호칭을 바꿨다.
명백한 악수였다.
우리 둘을 구경하고 있던 행인들의 반응이 곧장 달아올랐다. 이곳저곳에서 장난 섞인 응원이 날아들었다.
“새댁인가 보지? 아직도 부끄러움이 많나 보네!”
“부부지간에 부끄러울 게 어디 있어? 해라, 해!”
분위기가 이만큼 달아오르면 무작정 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성녀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주춤주춤 내게 다가왔다.
“이 빚은 절대 잊지 않을 테니까요…….”
“이미 빚은 질 대로 져서 괜찮습니다.”
내 능청스러운 대답에 성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시작된 막대 과자 놀이는, 의외로 성녀의 승리로 끝났다.
단숨에 거리를 좁히는 성녀의 기세에 내가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했던 탓이었다. 어어, 하는 사이에 입술이 부딪히고, 말랑하고 촉촉한 감촉이 느껴지더니.
혀의 끝과 끝이 맞닿았다 떨어졌다. 나는 화들짝 놀라 몸을 빼려고 했으나, 그보다 먼저 성녀가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내뱉는 성녀의 혀끝으로 은빛 실선이 떨어져 내렸다. 찰나에 불과한 풍경이었으나, 나는 그러는 성녀의 모습이 무척 요염하다고 생각했다.
성녀가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돌렸다.
“진짜, 변태라니까…….”
누가 보면 내가 한 줄 알겠네.
물론 내 억울한 심정이 언어가 되는 일은 없었다. 조금만 더 골려 주었다가는 성녀의 얼굴이 폭발할 것만 같았으니까.
예상 외로 적극적인 성녀의 모습에, 구경꾼들은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환호성이 귀가 먹먹할 정도로 쏟아져 내렸다.
그중에는 리아와 페리의 일행 또한 섞여 있었다.
그들은 유쾌한 웃음을 터트리며 나와 성녀가 하는 양을 지켜보던 참이었다. 젋은 남녀가 모여 있었으니, 연애에 대한 관심이 없지는 않을 터였다.
나와 성녀를 응시하는 시선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내 눈이 흘깃 리아와 페리 무리를 훑다 가라앉았다.
의심이 점점 더 깊어진다.
**
“……우리가 왜 이곳으로 온 거죠?”
문득 정신을 차린 성녀가 꺼낸 의문이었다. 말없이 걸음을 옮기고 있던 내 망막에 주위의 풍경이 맺혔다.
뒷골목이었다. 아직 저녁 노을이 지지도 않았으나, 어둑한 분위기가 은근한 불안을 조성하는 장소였다.
오늘 하루는 즐거웠다.
웃기도 많이 웃었고, 성녀의 귀여운 모습도 많이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이는 나만의 감상이 아니었는지, 성녀 또한 신이 나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덧 이곳에 도달해 있었다.
나는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귀한 분을 누추한 곳에 모시게 됐군요.”
“흥, 농담이죠?”
성녀는 황당하다는 듯, 도도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고아 출신한테 누추한 곳이 어디 있어요? 오히려 어린 시절에는 뒷골목을 많이 쏘다니기도 했죠. 당시의 고아원은 너무 좁았거든요.”
그 말대로였다.
성녀는 이곳저곳이 얼룩진 담벼락을 보고도 별다른 감흥이 없어 보였다. 귀한 신분의 자제라면 본능적으로 불쾌감을 표하기 마련인데.
내친 김에 나는 성녀의 어린 시절을 들어 보기로 했다.
“위험하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성국이라도 고아에게 친절한 도시는 없을 텐데.”
“맞아요, 그랬죠.”
시원스러울 정도로 깔끔한 인정이었다.
그만큼 나와 성녀의 사이가 가까워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고아 시절의 이름을 버릴 만큼, 성녀는 제 출신을 감추고 싶어 했으니까.
어느덧 우리의 인연은 이토록 깊어져 있었다.
“시내에 나갈 때는 일부러 숯검댕이를 묻히기도 했어요. 저뿐만 아니라, 유렌까지도요. 조금이라도 예쁘장한 얼굴을 한 아이는 실종되기 일쑤였거든요.”
“성국도 사람 사는 곳이었군요.”
내 맞장구에 성녀는 흐, 하고 얕은 웃음을 터트렸다.
오래 전의 기억이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고통스러우면서도, ‘성녀’라는 굴레를 쓰기 이전의 시절.
꽤나 홀가분한 고백이 이어졌다.
"모든 곳이 그렇잖아요? 사실, 당시에는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기도 했고요."
"천신께서 슬퍼하셨겠습니다."
"네, 그럴지도 모르죠. 그럼에도 전 끊임없이 기도했어요. 우리 아이들이 좋은 곳에 가기를... 아니, 더 나아가 모든 고통 받는 아이들이 구원 받기를 바라면서."
이쯤에서 나는 항복이라는 듯 두 손을 들었다.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깊은 이야기였다. 내 몸짓에 성녀는 쿡쿡,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물론, 그래봐야 자그마한 발버둥에 불과하겠죠. 그보다는 더......."
그때였다.
내 손이 자연스레 허리춤을 향했다. 그리고 성녀가 우쭐한 표정을 짓는 틈에, 은빛의 직선이 쏟아졌다.
직후 팍, 하고 새빨간 불꽃이 튀었다.
붉은 꽃잎이 후두둑, 담벼락과 바닥을 적신다. 그때까지도 넋을 놓고 있던 성녀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목청을 높여 부르짖어야 했다.
"엎드려!"
얼굴 없는 괴한들이 담벼락을 타고 넘어오고 있었다.
예상하던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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