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0화 〉 6. 존재 증명(28)
* * *
내 침실에 안온한 불빛이 흔들렸다.
타닥이는 모닥불 소리는 심신을 안정시키는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향긋한 다향과 따스한 찻물은 가을 밤의 쌀쌀한 온도를 잊게 했다. 나는 일부러 잘 먹지 않던 다과까지 내놓은 뒤였다.
내 맞은편에 앉은 손님이 좋아할 것 같았으니까.
자그마한 체구의 사내아이였다. 낯선 어른과 독대하고 있는 상황이 영 어색한지 안절부절 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나와 눈을 마주치려는 태도가 용했다.
여동생을 구해 달라고 했던가.
꼬마 손님에게 받은 첫 번째 의뢰였다. 어린 시절에는 마을 사람의 부탁을 들어주는 이야기를 동경했는데.
설마 이 나이가 돼서 꿈을 이루게 될 줄은 몰랐다.
나는 말없이 찻물을 홀짝였다. 처음에는 내 자그마한 몸짓 하나하나에 흠칫 몸을 떨던 꼬마아이였으나, 이제는 제법 내 눈치를 살필 정도는 되었다.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야 하나.
그 무렵이었다. 굳게 닫혀 있던 사내아이의 입이 열린 것은.
“아저씨는, 우릴 도와줄 수 있으세요?”
“그럴 줄 알고 찾아온 것 아니냐?”
그리고 형, 임마.
나는 한 마디 더 덧붙이고 싶은 마음을 애써 참아냈다.
우선은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할 때였다. 불안에 떨리는 심장을 조금이나마 진정시켜 줄 수 있도록.
“그, 잘은 모르지만… 다들 아저씨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했어요.”
“운이 좋았지.”
그렇게 대답하며 나는 조용히 사내아이의 눈을 마주했다. 꽤나 간절한 눈빛, 나는 옅은 웃음을 머금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널 도울 정도는 되지만.”
“그, 그럼 제 여동생도 구해 줄 수 있어요?!”
내 고개가 순순히 끄덕여졌다. 자세한 사정은 이야기를 들어봐야 알겠지만, 어차피 나와 꼬마아이의 목표는 일치하고 있을 터였다.
나는 샤일록 상회의 꼬리를 잡길 원한다.
지난 며칠 간의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최대한 빨리 상회와 암흑교단의 연관관계를 밝혀야 한다는 사실을.
이를 위해서는 아이들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알아야 했다. 구체적인 증거만 확보한다면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물론 아직 확신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었다.
“뭘 어떻게 구해 달라는 거야? 애초에, 여동생이 상회를 따라간다고 해서 위험해진다는 보장도 없잖아. 어쩌면 좋은 가정을 만나…….”
“아니에요!”
사내아이는 억울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강한 확신이 깃든 어조였다.
내게는 그 근거가 필요했다.
“그건 전부 거짓말이에요! 전 알고 있다고요…….”
“어떻게?”
그러자 사내아이는 입을 다물었다. 갑작스레 자신감을 잃어버리기라도 한 듯한 얼굴이었다.
아마 수없이 어른들한테 이야기를 해보았을 터였다.
그럼에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아, 지푸라기라도 잡듯이 내게 찾아왔겠지.
내 입에서 재차 질문이 던져졌다.
“그 사실을 어떻게 안 거야? 다른 사람들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던데.”
“……편지.”
머뭇거리면서, 사내아이는 그렇게 말문을 열었다.
내 미간이 잠시 꿈틀거렸다. 그 말뜻을 이해하기 힘들었던 탓이었다.
하지만 사내아이는 무척이나 진지해 보였다.
“떠나간 아이들이 보내온 편지가 이상해요.”
그러면서 아이는 품속에서 조심스레 편지 봉투 몇 개를 꺼내 놓았다.
나는 그 편지지를 펼쳐 보았다.
*
“필체가 다르다고?”
어두운 밀실에 일행이 모여 들었다.
엘시 선배와 셀린, 그리고 성녀와 유렌까지.
아직 새벽녘이라 레이놀드 씨를 부를 용기까지는 없었다. 나중에 엘시 선배를 통해 정보를 공유하면 되리라.
나는 셀린의 반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래, 한두 장이 아닌 모양이야. 어른들은 무시하고 지나쳤지만.”
“그럴 만도 하죠.”
내게서 아이들의 편지를 받아 든 성녀의 의견이었다.
그녀는 탁, 하고 편지를 탁자의 중앙에 던져 놓았다. 이제 일행 사이에서는 내숭조차 제대로 떨지 않는 모습이었다.
증거를 검토하는 성녀는 오히려 냉소적이기까지 했다.
“서류와 수속은 제대로 끝나 있어요. 그리고 이 삐뚤빼뚤한 글씨… 애초에 고아원의 아이들은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어요. 필체에 다소의 차이가 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죠.”
“나도 동감이야.”
유렌도 동의를 표하며 읽고 있던 편지를 탁자 위로 던졌다.
두 손으로 제 뒷머리를 받치며, 사내는 흥미 없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안, 이 고아원은 아인델 총주교의 관리만 받는 게 아니야. 나를 비롯해서 여러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곳이라고… 누구 하나의 의지로 좌지우지 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암흑교단이 샤일록 상회와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는 건 확실해.”
내 시선이 흘깃 성녀를 향했다. 그러자 성녀의 입에서 자그마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딱히 밝히고 싶어 하는 기색은 아니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성녀는 순순히 내 말을 시인했다.
“샤일록 상회와 관련이 있는지는 알 수 없어요. 다만, 샤일록 상회에서 파견된 젊은 상인의 몸에서 암흑교단의 흔적이 발견되긴 했죠.”
“그럼 당연히 조져야지.”
엘시 선배의 명쾌한 의견이었다.
성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엘시 선배를 아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이러한 결과를 예상하고 있었으리라.
“상회와 관련이 있는지는 알 수 없어? 너무 낙관적인 판단이잖아… 우연이 이만큼 반복되면 그건 필연이야.”
“샤일록 상회는 대상단이에요. 아무련 혐의도 없이 조사를 강행할 수는 없어요.”
“방금 말하지 않았어? 그쪽 소속 상인 중 하나가 암흑교단과 관련 있다며.”
성녀는 다시 입을 다물었고, 엘시 선배는 느긋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누구의 의견이 우세한지는 명백했다.
더불어 엘시 선배는 슬쩍 내게 눈길을 던지기까지 했다.
“그리고 또 뭐가 문제야? 우리한테는 용혈 문자도 있는데.”
묘한 뿌듯함이 느껴지는 음색이었다.
나는 그 말에 어색한 미소를 머금는 수밖에 없었다. 사실 합법적인 경로로 얻은 힘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우선 제국 황실이 나를 용혈 문자의 소유자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얼마 전에도 검공 어르신께 보증을 받은 내용이었으니까.
하지만 성녀는 도리어 그 말에 울컥하고 말았다.
“이곳은 성국이에요. 제국 황실이라고 멋대로 굴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럼 네가 잘 말해주면 되겠네.”
“지금 장난해요? 이게 얼마나 예민한 문제인데, 남의 나라 일이라고 함부로……!”
“그만.”
슬슬 감정 싸움으로 번질 기미가 보였기에, 나는 우선 만류에 나서기로 했다.
다행스럽게도 성녀와 엘시 선배의 말싸움은 곧장 소강 상태로 전환되었다. 두 사람 다 불만스러운 눈빛이긴 했으나, 지금은 다툴 때가 아니었다.
두 사람의 의견은 대충 정리가 끝난 뒤였다. 내 눈이 흘깃 셀린을 향했다.
셀린은 아직도 편지를 훑고 있는 중이었다. 그 멍한 눈빛이 어딘가 넋을 놓고 있는 듯도 보였다.
의견을 밝히지 않은 사람은 이제 그녀뿐이었다.
“셀린, 네 생각은 어때?”
“응, 응? 아, 아아… 나?”
셀린은 그제야 화들짝 정신을 차리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누가 보아도 이야기를 하나도 듣지 않은 모습이었다.
요즘따라 셀린이 정신을 놓고 있을 때가 잦았다. 나는 그 점이 못내 걱정스러웠으나, 셀린의 입이 그보다 먼저 열렸다.
“아니, 편지를 읽다 보니 좀 눈에 띄는 부분이 있어서…….”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셀린에게 집중되었다. 다들 필체에 집중하느라 딱히 눈치 채지 못했는데, 혹시 입양된 고아들이 보내 온 편지에 공통된 특징이 있는 걸까.
다만 셀린은 갑작스러운 관심이 부담스러운 듯했다.
볼을 긁적이던 그녀가 자신 없다는 듯 말끝을 흘렸다.
“그, ‘붉은 보석’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오더라고. 모든 편지는 아니고, 한 절반쯤?”
흠, 하고 나는 탁자 위로 내던져진 편지의 면면을 살폈다.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는데, 나도 얼핏 그러한 낱말을 본 듯한 기억이 났다. 별 의미 없는 내용들이라 지나치고 말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고민이 더 이어지기도 전에, 유렌은 다시 한 번 반대 의사를 밝혔다.
“하여튼 나와 누님은 반대야. 아직 ‘가면을 쓴 괴한’이 어디 갔는지도 모르는 마당이잖아? 고아원을 비워둘 수는 없어.”
“이안, 굳이 서두를 필요가 있을까요?”
다시금 성녀의 간곡한 설득이 이어졌다.
이전에도 그렇지만, 성녀는 이 문제를 공론화시키고 싶어 하지 않았다. 사실 내가 성녀라도 그랬을지 몰랐다.
“섣불리 벌집을 들쑤시다간 오히려 진상이 멀어질 수도 있어요. 아직은 지켜봐야 할 때에요.”
“그럼 그 고아 꼬맹이는 어떡하고?”
나를 대신해서 반론에 나선 사람은 엘시 선배였다.
지극히 마법사적인 시각에 입각한 주장이 이어졌다.
“고아 하나가 사라진다고 신경 쓰는 사람이 세상이 얼마나 있겠어? 내가 금지된 마법을 연구 중이라면, 당연히 고아를 실험체로 가져다 쓸 거야. 어쩌다 죽어도 별 탈이 없거든… 다시 말해서, 그 꼬맹이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가 유일하다는 거지.”
“감시 인원을 추가로 파견하면 돼요.”
물론 이대로 얌전히 물러날 성녀가 아니었다. 그 정도는 이미 고려하고 있었다는 듯, 성녀는 막힘없이 달변을 이어갔다.
“예상 외로 이목이 집중되면, 암흑교단도 함부로 움직이지 않겠죠. 애초에 우리가 따라붙는 순간 그들의 꼬리를 붙잡는 건 불가능해요. 상식적으로 포섭이 불가능한 사람 앞에서 수상한 짓을 할 리가…….”
“적당한 시점에 헤어지면 됩니다.”
내 단호한 반론에 성녀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눈치가 빠른 여인이었던 만큼, 내 말을 듣자마자 직감했을 터다.
이미 내 결심은 굳었다. 더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으니까.
“아이 하나를 지속적으로 관리하기란 까다로워요. 아무리 감시 인원이 따라붙더라도, 기회가 오는 즉시 처분하려 들겠죠. 특히 은폐 작업이 이미 체계화되어 있다면 더더욱.”
“……이안.”
하지만 굳은 결의는 성녀도 만만치 않았다. 그 연분홍빛 눈동자에 흐릿한 분노가 묻어나올 정도였다.
“더 많은 사람들이 다칠 수도 있어요. 혼란은 늘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이들을 잡아먹고 자라나죠.”
“그렇다고 희생을 두고 볼 수만은 없습니다.”
“두고 보자는 소리가 아니에요. 최대한 시간을 끌면서, 방법을 찾아보자는 거죠.”
“한시가 급한 사안입니다.”
한 치의 접점조차 없는 평행선이 나란히 섰다. 나와 성녀의 거리가 이토록 멀게 느껴진 적은 오랜만이었다.
“이미 사라진 아이들은요? 그리고 암흑교단이 줄을 대고 있는 고아원이 과연 이곳뿐일까요?”
“함부로 손을 댔다가 암흑교단이 자취를 감춰 버릴 수도 있죠. 그러면 더 많은 아이들이 죽고 다칠 거예요.”
“당장 구할 수 있는 목숨부터 구하는 것이 순리죠.”
“아니요, 목숨이 걸린 문제니까 더더욱 신중해야 해요. 우리의 선택이 얼마나 많은 목숨을 담보로 하고 있는지, 알잖아요?”
그러면서 성녀는 유심히 내 낯빛을 살폈다.
오늘따라 내가 더욱 고집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눈빛이었다. 나는 슬쩍 그 시선을 피하면서, 남은 동료들에게 결정권을 일임했다.
“나머지는 어떻게 할래?”
사실 물어볼 것도 없는 질문이었다. 엘시 선배와 셀린 둘 다, 누구를 지지할지는 뻔했으니까.
“나야, 뭐… 당연히 이안 오빠를 따라가야지.”
“당연히 주인님 뜻대로 해야지.”
삼 대 이.
내 우묵한 시선에 성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리고 쾅, 하고 탁자를 손바닥으로 내리치며 몸을 일으켰다.
그 짓씹어진 입술 사이로 노기 섞인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렇다면 행운을 빌어요, 여러분… 부디 주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임마누엘.”
죽어도 내 결정을 따르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이러자 난감해진 쪽은 유렌이었다. 그는 나와 성녀를 번갈아 보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성녀를 뒤따라 몸을 일으켰다. 그의 원망스러운 시선이 내게 내리꽂혔다.
“이안, 왜 그래? 오늘따라 너 너무 이상하다.”
“……사정이 있어.”
후우, 하고 두 손으로 낯가죽을 쓸어내리며 한 말이었다. 내 말을 들은 유렌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하여튼, 성녀님은 둘째 치고 너는 따라 와. 아무래도 위험해질 것 같으니까.”
“미쳤냐? 위험한 곳에 내가 왜 가.”
유렌은 어이가 없다는 듯 하, 하고 웃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툴툴거리고는 있으나, 나는 알았다.
진짜 따라오지 않을 생각이었다면 대답조차 하지 않았으리란 사실을.
그렇게 성녀와 유렌이 떠난 밀실은 다시 침묵에 잠겼다. 내 복잡해 보이는 표정에 셀린과 엘시 선배는 괜히 시선을 마주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든 말든, 내 입에서는 더욱 심란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제국 황실과 연락을 해봐야겠습니다.”
결전이 다가오고 있었다.
* * *